40화
하지만 통과한 기쁨을 누리던 것도 잠시.
〈몸이 아주 많이 뻣뻣하고 동작이 하나도 이어지지 않아. 아주 심각해.〉
결과와는 별개로 1차 테스트 동작을 전부 본 에리얼은 날카로운 말투로 지적했다.
〈다만 틀린 동작은 없었기 때문에 가능성을 보기로 했어. 2차 테스트 때는 더 좋아지길 바라.〉
어쨌든 통과했어! 가능성이 더 올라갔다고!
대입을 위해서는 특별 활동 점수가 절실했기 때문에 코이는 기쁨에 못 이겨 폴짝 뛰어올랐다.
어서 애슐리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고 싶었다. 오늘은 연습이 없는 날이라 코이의 테스트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며칠 동안 몸치인 자신을 열심히 이끌어 준 그이니 분명히 함께 기뻐해 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서둘러 밖으로 나온 그는 애슐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에도 원하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
어?
의아해하며 엉거주춤 멈춰 섰을 때였다. 저 멀리 걸어오는 애슐리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알은체를 하려던 코이가 주춤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누군가 있었다.
방금 전 1차 테스트 때 제 앞에 있었던…….
에리얼.
함께 오고 있는 그 여학생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코이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
“어쨌든 내가 널 찬 거야.”
에리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나란히 걷던 애슐리가 웃음을 지었다. 그런 여유 있는 태도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아 에리얼은 한 차례 그를 쏘아보았다.
“예전엔 네 그 여유 있는 모습이 좋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꼴 보기 싫지?”
애슐리는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제대로 본 거야. 난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까.”
“너희들?”
에리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애슐리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정면을 바라보며 걷던 그가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던 에리얼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애슐리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변해 있었다.
그는 언제나 다정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말투는 부드러웠고, 여자애들에게는 항상 친절했다. 에리얼은 그게 참 보기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끔은 그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의심도 들었었는데, 이제 알겠다.
애슐리 밀러는 에리얼을 좋아했지만 다른 모두에게도 같은 감정이었다는 걸.
왜냐하면 저렇게 웃는 얼굴은 지금 처음 보았기 때문에.
에리얼은 기가 막히면서도 궁금해졌다. 도대체 애슐리가 누굴 보면서 저렇게 웃는 건지.
그리고 시선의 끝이 향하는 곳을 확인했을 때, 그녀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의 앞에서 바짝 마른 나뭇잎처럼 펄럭거리던 입부 희망자가 거기에 있었다.
*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코이는 눈을 깜박이며 나란히 걷고 있는 둘을 보기만 했다. 주변에 남아 있던 치어리딩 팀 아이들이 둘을 보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애쉬가 에리얼을 기다린 거지? 응?”
“맞아, 둘이 얼굴 보자마자 같이 갔잖아.”
“다시 사귀려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어. 너무 아깝잖아, 둘.”
“맞아, 정말 잘 어울렸는데.”
“버팔로 킹과 퀸의 재결합이라니, 혹시 이번 홈커밍 파티에서?”
곧 꺄아, 하고 호들갑스러운 비명이 이어졌다. 코이는 그냥 묵묵히 서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맞아, 너무 잘 어울려.
코이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저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을 다시없을 거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사실 헤어졌을 때도 말들이 많았다. 아쉬워하는 반응 또한 만만치 않았다. 너무나도 잘난 애슐리 밀러에게 어울리는 상대로는 에리얼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러니 둘이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둘이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에리얼과 헤어진 뒤로 애쉬에게 계속 여자 친구가 없었어.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애슐리 밀러 같은 남자애가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니, 절대 말이 되지 않았다.
에리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았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에리얼이 애슐리를 찼고, 실의에 빠진 애슐리가 그녀를 기다렸는데 그 기다림이 보답을 받아 다시 둘이 이어지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그런 거야.
코이는 새삼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당연한 거였고 축하할 일이었다.
그런데 난 왜 이러는 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욱신욱신 아파 오고 마음이 심란한 걸까. 마치 어딘가 구멍이 난 것처럼 너무나 허전하고 쓸쓸했다.
어쩌면 난 애쉬가 나만의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마음 한구석엔 그를 독차지하려는 이기적인 마음이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하다. 그것 외에는 답이 없다. 자신은 지금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둘이 다시 만나면 애슐리는 전보다 코이에게 소홀해질 테니까. 그러면 자신은 애슐리와 지금보다 멀어질 수도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아예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그쪽이 더 타당하게 느껴졌다. 너무나 아픈 진실이지만 코이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자신이 애쉬와 이렇게까지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그간 그와 붙어 다녔던 시간이 오히려 더 예외적인 것이었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아. 저런 모습은, 정말이지 보기 싫었다.
“아.”
때마침 애슐리가 그를 발견했다. 언제나처럼 웃으며 그가 손을 드는 순간, 코이는 냅다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코이, 야!”
난데없이 달아나는 코이의 뒷모습에 어리둥절했던 애슐리가 이내 어떻게 돼먹은 상황인지 파악하고,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뱉어 냈다. 그가 이를 갈더니 에리얼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안, 에리얼. 다음에 보자. 안녕.”
급하게 인사를 한 그는 곧바로 코이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야, 코너 나일즈! 거기 서지 못해?”
다짜고짜 달려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에 에리얼은 어이가 없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뭐 하는 거야, 쟤들은?”
*
하아, 하아.
코이는 죽어라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갔다. 이렇게 뛰는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하지만 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달리겠다. 더 빨리, 더 멀리, 어서……!
“야, 코이! 코너 나일즈!”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이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또다시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들렸다.
“코이 너, 정말 거기 안 서?”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외침 소리에 순간 귀가 먹는 줄 알았다. 힘껏 내달리면서도 두려움을 못 이겨 슬그머니 뒤를 돌아본 코이는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애슐리가 굉장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이 지금까지 뛰어온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분명히 저만큼 먼 거리에서 달아났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따라잡혔다는 걸 알고 코이는 그만 히익, 하고 비명처럼 숨을 삼켰다.
“거기 서라고!”
“으악!”
열심히 발을 굴렀으나 애슐리의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그의 놀라운 달리기 실력에 코이는 곧 아주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해 냈다. 애슐리 밀러는 고등학교 아이스하키 우승팀의 주장이라는 것을 말이다.
“잇……!”
애슐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연신 뒤를 돌아보던 코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커다란 손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을 때, 애슐리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 난폭하게 끌어당겼다.
“아!”
코이의 몸이 일순 붕 떠올랐다. 잠깐의 부유감을 느낀 다음 순간, 코이는 벌써 애슐리의 품에 가득 끌어안겨져 있었다.
“잡았다.”
코이의 머리 위로 애슐리의 거친 숨결이 쏟아졌다. 코이는 크게 뜬 눈을 깜박거리며 그에게 안겨 넘어갈 것 같은 숨을 간신히 이어 갈 뿐이었다.
“나한테서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역시나 숨을 몰아쉬며 애슐리가 말했다.
“네가 아무리 힘껏 달아나도 넌 결국 나한테 잡히고 말 거야.”
코이의 멍한 머릿속으로 그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내가 절대 놓치지 않을 테니까.”
코이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거친 숨만 간신히 몰아쉬며 그는 애슐리에게 몸을 기댄 채 그렇게 계속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