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216)

48화

어?

뜻밖의 음성에 코이는 코를 킁,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텅 빈 교정에 문득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급히 눈을 깜박여 초점을 맞추자 저쪽에서 누군가 그를 향해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애쉬?”

놀란 코이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애슐리는 그리 빠르게 달린 것 같지도 않은데 몇 걸음 만에 벌써 코이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아직 여기 있었구나.”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여전히 현실감이 없어 그냥 보기만 하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울었어?”

“어, 어어? 아, 아니. 그냥, 먼지가 들어가서.”

보란 듯이 팔로 두 눈을 북북 문지른 코이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넌 왜?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니.”

애슐리가 코이의 말을 되풀이하더니 장난스럽게 웃었다.

“우리 스케이트 연습해야 되잖아, 잊었어?”

“어, 어어?”

놀라 또 한 번 말을 더듬는 코이를 보고 애슐리가 유쾌한 웃음소리를 냈다. 코이의 코를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던 애슐리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말했다.

“지금까지 날 기다리고 있었는 줄 알았는데, 틀렸어? 다른 친구야?”

“아, 아니, 너 맞아. 맞는데.”

코이는 여전히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치, 친구들은?”

“아, 잊은 거 있다고 하고 그냥 왔어.”

그 말에 코이는 자신의 슬픈 상상이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역시 애슐리는 나하고 둘이 있다는 걸 말하기 싫었…….

“너랑 단둘이 있고 싶은데 그 녀석들이 알면 끼려고 할 거 아냐.”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코이는 또다시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면 대부분은 알아들을 텐데 애석하게도 코이는 아니었다. 이미 그럴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슐리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지금 들은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눈만 데굴거리고 있는 코이에게서 선뜻 자전거를 가져간 그는 언제나처럼 그것을 한쪽 어깨에 멨다.

코이는 화들짝 놀라 손을 뻗었다. 자기가 끌고 가면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그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번엔 얼빠진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냥 숨만 들이켰다. 애슐리는 그런 코이의 손을 깍지 껴 쥐고 그네처럼 앞뒤로 흔들며 걸어갔다.

얼떨결에 그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동안 코이의 머릿속은 온갖 의문으로 미어터졌다. 애쉬가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걸까? 내가 들은 게 맞는 걸까? 혹시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닐까? 머리가 잘못된 걸지도 몰라. 이게 다 망상인 거지. 어떡하지, 보험도 없는데. 잠깐, 지금 같이 걷고 있는 건 애쉬잖아. 거기다 내 손을 잡고 있어. 그럼 아까 일이 꿈인 건 아닐 텐데. 그럼 정말 애쉬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나랑 단둘이 있고 싶다고? 왜? 대체 왜?

“코이.”

한창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코이의 머릿속으로 애슐리의 음성이 비집고 들어왔다. 생각의 홍수에 떠밀려 퀭해진 눈을 내려다보며 애슐리가 물었다.

“내일 아르바이트 몇 시에 끝나? 6시 맞아?”

“어? 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코이에게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6시 10분에 가면 되겠네. 그 시간이면 충분하지?”

“어? 뭐, 뭐가?”

코이는 갑자기 무슨 얘긴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애슐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일 너 아르바이트 끝나고 말이야, 같이 어디 가자고.”

“어?”

코이는 이번에도 똑같이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너 내일 파티 한다며…….”

자신은 초대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가슴 한구석이 욱신 했을 때였다. 애슐리가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건 애들끼리 놀라고 하면 되고. 우린 우리끼리 놀지 뭐.”

이게 무슨 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코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반응이 재밌었는지 애슐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짐짓 의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면, 파티에 가고 싶어? 나와 단둘이 노는 것보다?”

“아,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절대 아냐!”

코이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이내 그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중얼거렸다.

“애쉬랑 단둘이 노는 게 좋아…….”

“그래.”

애슐리는 그때까지 잠잠하던 코이의 귀가 바쁘게 파닥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그럼 됐네. 6시 10분, 괜찮아? 그때 데리러 가도.”

“응, 충분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코이가 뒤늦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우리, 내일 어딜 가는 거야?”

“그런 건 허락하기 전에 물어보라고 했지?”

애슐리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경고했다.

“그렇게 덥석덥석 대답하면 나쁜 사람한테 잡혀갈지도 몰라.”

그제야 코이가 하하하, 웃음소리를 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애슐리를 향해 얼굴을 붉히고 한껏 웃는 얼굴로 그는 말했다.

“애쉬한테만 이러는 건데.”

애슐리가 바로 그 나쁜 사람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애슐리는 그의 이런 무한한 신뢰를 완전히 박살 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고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멋모르고 덩달아 웃는 코이의 귀가 연신 까딱거렸다.

애슐리는 이 순간 자신이 스포츠 팀에 들어가 꽤나 혹독한 훈련을 견뎌 냈다는 데 감사해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코이의 손을 놓고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었다.

“가서 앉아 있어.”

항상 그렇듯이 애슐리는 혼자서 코이의 자전거를 옮기고 트렁크에 실었다. 그사이 코이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그나마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서둘러 조수석으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은 애슐리는 안전벨트까지 메고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던 코이를 확인한 후 시동을 걸었다.

“어딜 가는지는 비밀이야. 내일 만나서 알려 줄게.”

애슐리가 웃으며 덧붙였다.

“깜짝 놀랄걸.”

“그래? 정말?”

대체 뭘까? 코이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물었다. 귀가 움직이는 걸 느끼고 황급히 붙잡았지만 벌써 애슐리에게 전부 다 보여 준 다음이었다. 부끄러움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코이를 모르는 체하고 애슐리는 차를 운전해 학교를 빠져나갔다.

“저, 저기, 애쉬.”

차가 도로에 들어선 뒤 코이는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흘긋 쳐다본 애슐리에게 코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내일 파티에 나만 안 부른 건…… 그래서야?”

나랑 둘이서만 놀러 가려고?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 손끝이 저릿거렸다. 아까는 그렇게 슬펐는데 지금은 정반대였다. 애슐리가 다른 친구들을 내버려 두고 자신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파티에서 빠져나온다니, 전혀 상상도 못 했다. 기대에 찬 코이의 얼굴을 본 애슐리가 짓궂게 말했다.

“아니, 널 납치하려고.”

“하하하.”

코이는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발갛게 상기된 뺨과 파닥파닥 움직이는 귀를 보면서 애슐리 또한 웃음을 지었다.

불쌍한 코이. 고작 그 정도로 울음을 터뜨리다니.

사실 애슐리는 아까 코이를 보자마자 그가 울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 눈이 있다면 누구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체하지 않고 넘어간 건, 코이가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울기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

파티에 오지 말라고 한 것 정도로 울다니, 애슐리는 내심 당황했지만 괜찮다. 지금 코이는 완전히 그 일을 잊고 한껏 기쁨에 빠져 있으니까. 아까부터 계속 까딱거리는 귀가 그 증거였다.

사실 빌을 비롯해 친구들과 함께 있는 코이를 봤을 때 그는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불쾌감에 기분이 엉망이 됐다. 지금까지 코이는 그들 무리에 잘 어울려 다녔다. 대화도 나눴고 같이 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애슐리도 함께 있을 때 얘기였다. 자신이 없는 장소에서 코이가 다른 녀석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자 그는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작은 심술을 부린 것뿐인데.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던 코이를 떠올리자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그는 화제를 돌렸다.

“코이, 가면 저녁부터 먹을까?”

“응.”

즉시 대답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시켜 먹어도 되니까 얘기 해봐, 뭐든.”

“다 좋아.”

코이는 이번에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애쉬와 함께라면 뭐든 다 좋아.”

또다시 환하게 웃는 코이의 귀가 연신 파닥거렸다. 파티 따위, 엿 먹으라 그래.

애슐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코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코이는 애슐리 밀러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니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