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코이를 데려가는 동안 애슐리에게서 나온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알은체를 하는 동급생들에게 마주 인사를 하지도, 짧은 미소를 던지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코이가 어디로 달아나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어깨를 꽉 붙잡은 채 빠른 걸음만 옮길 뿐이었다. 덕분에 코이는 이따금씩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경험을 하며 다급하게 뛰다시피 그에게 끌려갔다.
애슐리가 코이를 데려간 곳은 외따로 있는 건물의 뒤편으로, 거의 찾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오솔길이었다. 거기서 애슐리는 걸음을 멈추고 코이를 내려다보았다. 코이는 숨이 턱까지 닿아 죽을 것처럼 헐떡이고 있었지만 애슐리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깨를 안았던 팔을 풀고 대신 코이의 양쪽 팔을 붙잡아 시선을 고정했다.
하아, 하아.
코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을 지켜보며 애슐리는 한동안 기다렸다.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던 애슐리는 코이의 숨이 어느 정도 잦아든 다음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괜찮아?”
“으, 으응.”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그를 올려다보지 못한 채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는데, 머리 위에서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어제는 어떻게 된 거야?”
역시나.
코이는 간신히 느려졌던 맥박이 다시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말을 더듬거렸다.
“뭐, 뭐가.”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자신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코이의 반응에 애슐리의 속은 더 타들어 갔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었잖아. 그 뒤로 연락도 안 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 미안.”
코이는 황급히 사과했다. 그것은 명백히 코이의 잘못이었다. 애슐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난데없이 뺨을 얻어맞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코너 나일즈 따위에게.
얼마나 기가 막힐까.
코이는 죄책감을 느끼며 다시 사과했다.
“미안해, 그렇게 걱정할 줄 몰랐어.”
“약속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고작 문자 몇 줄만 보내고 휴대 전화도 꺼 버리면 누구나 걱정을 하지.”
애슐리가 평소보다 엄한 음성으로 코이를 나무랐다. 코이는 더더욱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미안…….”
다시금 사과한 그에게 애슐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자코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여실히 느끼며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데, 한참 만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테스트는 어땠어?”
다행이다. 애슐리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넘어가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코이는 그의 배려심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통과했어.”
“그래, 잘됐다.”
애슐리는 말을 하면서도 코이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오늘 코이는 이상하다. 아니, 전날부터 이상했다. 그런 문자만 덜렁 남기고 사라진 것도 그렇고, 줄곧 애슐리의 눈을 피하는 것도 그렇고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애슐리가 추측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코이가 갑자기 자신을 멀리 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코이.”
애슐리가 차분한 음성으로 이름을 부르자 그의 어깨가 움칠했다. 애슐리는 여전히 코이의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채로 말을 이었다.
“혹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얘기해 줘.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해도 얘기해 줘. 같이 고민하다 보면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르잖아.”
거기까지 말한 애슐리는 코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이었다.
“우린 친구니까.”
그 말에 여태껏 간신히 버티고 있던 코이의 정신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친구, 맞아, 우린 친구야. 애쉬는 친구로서 나에게 호의를 베푼 것뿐인데 난 그것도 모르고 멋대로 착각해 버리다니.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게 되면, 애쉬는.
코이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애슐리는 좋은 애니까 코이를 경멸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더 이상 이 관계는 유지할 수 없겠지. 애슐리는 코이를 멀리 할 테고, 그러면 아침에 만나 인사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자신을 못 본 체하고 가 버리는 애슐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코이는 가슴이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숨겨야 돼.
코이는 입술을 깨물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절대 들켜선 안 돼. 난 어디까지나 애쉬의 친구인 거야. 그래. 후우, 작게 떨리는 숨을 내쉰 뒤 그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자신이 생각해도 힘이라고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코이는 애써 스스로를 북돋우며 덧붙였다.
“그렇게 할게.”
“…….”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코이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아니, 전부 다 이상했다. 코이가 자신을 보려 하지 않는 것도, 자꾸만 목소리가 떠는 것도, 애슐리의 말에 이렇게 단답만을 가끔 내뱉는 것도, 모두 다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언제나 애슐리를 만날 때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던 코이가 미소조차 짓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꽉 붙잡은 손 안에서 코이가 온몸을 떨고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손의 힘을 빼면 그대로 달아나 버릴 것 같아 애슐리는 더 세게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코이.”
정말 믿기 어려웠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어?”
“뭐…… 아냐, 그런 거!”
코이가 놀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지만 애슐리가 바라던 것과는 달랐다. 자신을 향해 웃기는커녕 파랗게 질려 그를 바라보는 코이의 얼굴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거기다 코이의 두 눈동자는 공포에 질린 것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입술 또한 파리하게 떨렸다.
그걸 본 애슐리 또한 당황해 굳고 말았다. 그러자 코이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저기, 그냥, 몸이 좀 안 좋았을 뿐이야. 별거 없어, 정말이야.”
거짓말.
애슐리는 허둥지둥 말을 쏟아 내는 코이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는 너무나 티 나게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속는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이일 것이다.
하나 확실한 것은 코이가 애슐리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애슐리는 너무나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이유가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뿐.
“코이…….”
“저기, 그리고.”
다시 말을 하려던 찰나 코이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앞으로 연습, 못 하게 됐어. 저기, 치어리딩 팀에 입부했잖아. 그래서, 다 같이 수업 끝나고 훈련을 해야 된대. 끝나고 나면 늦어서 스케이트 연습까지는, 어려울 거 같아. 그동안, 고마웠어.”
“…….”
마치 밤새 생각해 온 대본을 읽듯 뚝딱거리며 코이가 말했다. 애슐리는 다시금 바닥을 내려다보며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 내는 그를 심각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코이.”
“덕분에, 합격했어, 정말 고마워. 모두, 애쉬 덕분이야. 이젠, 더 도와주지 않아도, 되니까.”
“코이!”
별안간 애슐리가 고함을 지르며 코이의 팔을 움켜쥐었다. 놀란 코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을 멈추자 애슐리 역시 멈칫하고 그를 내려다봤다.
“……미안, 코이. 미안해.”
황급히 목소리를 낮춰 사과한 애슐리가 고개를 숙이고 하아, 깊은숨을 뱉어 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두 손은 코이를 꽉 붙잡고 있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사과할게. 그런데 정말 이유를 모르겠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유라니, 그런 거 없어.”
“거짓말하지 마.”
애슐리는 고함을 지르고 싶은 걸 억눌러 참고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뭔가 있어, 그렇지? 나한테 화났어? 내가 뭘 잘못했어? 얘길 해 봐,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애슐리가 계속해서 다그쳤다. 코이는 자신이 구석까지 몰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간신히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너, 넌…… 잘못한 거 없어.”
“거짓말.”
“정말이야.”
급기야 코이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정말, 이야. 넌 잘못한 거, 없어. 잘못한 건…… 나야.”
“뭐라고?”
애슐리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코이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걸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마구 눈을 문질렀다. 넘쳐흐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애슐리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대체 단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가.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코이…….”
애슐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뭘 잘못했다는 건지, 이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 했다. 지금 이런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코이가 자신의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웃지도 않는다. 항상 열심히 움직이던 귀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애슐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조급한 마음에 다시 그를 다그치려 했을 때였다.
“이, 이제 그만해.”
코이가 애슐리를 밀어내려 했다. 두 손을 가슴에 대고 힘껏 밀었으나 당연히 애슐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이 뒤로 휘청거리며 물러나질 뻔한 것을 애슐리가 붙잡고 있어서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코이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고, 곧, 수업이니까, 들어가 봐야 돼. 이제, 이 얘기는 그만, 해 줘.”
“코이.”
애슐리가 다시 그의 팔을 고쳐 쥐었다.
“그럴 수는 없어. 지금 여기서 얘길 끝내자고? 코이, 이렇게 그만하자는 게 말이 돼? 진심이야? 난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이 아직 남았다고.”
“하, 할 얘기 없다고 해, 했잖아.”
“난 들어야겠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코이는 계속해서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이 애슐리를 못 견디게 했다. 하얗게 질린 코이의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어?
갑자기 애슐리의 눈앞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