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한동안 애슐리는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생각했다. 지금 코이가 한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코이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 분명하다. 잘못된 건 애슐리 밀러다. 그는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눈도 부정했다. 저렇게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눈물이 괴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코이의 표정은 절대 지금 상황에서는 있을 수가 없기에.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이제라도 코이가 모든 게 장난이었다고 말하면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끌어안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애슐리는 기다렸다. 자, 코이. 어서 말해, 빨리.
방금 전 했던 말은 실수였다고.
하지만 또다시 그의 기대는 어긋났다.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코이가 한 말은 애슐리의 얼굴에서 미소를 완전히 사라지게 했다.
“넌 발현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거야.”
코이가 계속해서 말했다.
“곧 정신이 들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네가 착각했다는 걸.”
그때까지 코이를 들어 올리고 있던 애슐리가 천천히 그를 내려놓았다. 여전히 물속에서 코이의 허리를 붙잡은 채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난 발현을 한 거지 미친 게 아냐.”
애슐리의 말에도 코이는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찬 거부에 애슐리는 그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코이가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 그의 마음을, 진심을 모두 헛소리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그것만큼은 결코 참을 수 없었다.
“대체 왜…….”
애슐리는 거친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내뱉었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 그는 어떻게든 코이를 달래야 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째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지 애슐리는 분통이 터져 하마터면 욕설을 뱉을 뻔했다.
“코이.”
그는 자신의 성질을 한껏 누르고 애써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왜 나를 믿지 못하는 거야? 이건 발현과는 상관없어. 난 그 전부터 널 좋아했다고.”
열성적인 애슐리의 말에 잠자코 듣기만 하던 코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부정의 의미였다.
“코이, 정말이야.”
애슐리는 애가 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좋아해, 코이. 계속, 좋아했어. 친구로서가 아니라, 이건 사랑이야. 난 널 사랑해.”
자신의 진심을 믿어 주기만 한다면 가슴을 갈라 속을 내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애슐리가 거듭해서 열렬하게 내뱉은 고백에, 한참 만에 코이가 입을 열었다.
“난…… 나는.”
거친 숨결을 사이에 두고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나는 너 안 좋아해.”
하, 애슐리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코이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급하게 덧붙였다.
“정말이야, 난 너 안 좋아해.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어.”
“코이.”
“나는 정말 널 친구로 생각하고 그래서 여기 온 거야. 그것뿐이야.”
“코이.”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한 건 분명히 착각일 거고, 나도 널…….”
“코이!”
한 번이라도 더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애슐리는 그만 고함을 질러 코이의 입을 다물게 해 버렸다. 목적은 달성했으나 그의 기분은 엉망이었다. 황급히 입을 다문 코이가 불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그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
어째서지?
왜 안 된다는 거야, 왜?
내가 너한테 말했잖아. 널 좋아한다고. 그런데 왜 넌 네 마음을 부정하는 거야? 날 좋아하잖아. 분명히 그렇게 썼잖아. 네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잖아. 그런데 왜.
하지만 코이의 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웃는 얼굴도 이제는 없다. 애슐리는 자신이 정말 페로몬 때문에 미친 게 아닐까 싶은 의구심마저 느꼈다.
“……이제, 가야겠어.”
코이가 애슐리의 어깨를 밀어냈다. 물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코이는 물속에서 버둥거리며 아직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있는 애슐리의 손에서 빠져나가려 애썼다.
“정말 가야 돼. 또 집에 안 들어가면 아버지가 화낼지도 몰라.”
애슐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코이를 서늘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가둬 버릴까.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남는 방은 얼마든지 많았고, 경찰이 와서 수색한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세이프 룸(Safe Room. 또는 패닉룸이라 한다. 외부 침입이나 토네이도 등의 자연재해를 피할 수 있도록 보호 기능을 갖춘 공간을 가리킨다.)도 있다. 코이를 그곳에 가둬 두면 영원히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굳이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냥 그대로 코이를 그 안에 가둬 두기만 해도 된다. 아무리 코이가 노력해도 절대 내게서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날 좋아하지 않는다느니 하는 헛소리도 더 이상 못 하게 되겠지. 내가 세상의 전부가 될 테니.
“애쉬.”
코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둔해 터진 주제에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긴 한 모양이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애슐리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표정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쩌면 애슐리가 지금 자신을 감금하려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래 봤자 어쩌겠는가. 코너 나일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진심은 널 좋아하는 거라며 울며 매달려 봤자 벌써 늦었다.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코이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때 강간해 버릴걸.
그랬으면 코이는 오메가로 발현했을지도 모른다. 발현하는 극알파 옆에서 그 많은 페로몬에 뒤덮였는데도 이렇게 베타로 남아 버린 이유는 오직 그것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애슐리는 생각했다. 이대로 그를 안아 버리자. 온몸에 페로몬을 쏟아붓고 배 속까지 채워 넣으면 분명히 발현할 것이다. 임신할지도 몰라. 상관없어.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거니까.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페로몬이 그를 미치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자제심마저 놓아 버렸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강렬한 소유욕만이 그를 지배했다.
코이를 가져야 돼.
“……아!”
코이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애슐리가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것이다. 물속에서 몸이 밀착되고, 차가운 수온과 달리 뜨거운 체온이 맞닿았다.
“……애쉬.”
코이가 애슐리를 올려다보았다. 두 눈에는 확실히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애슐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어마어마하게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아버지처럼 코이를 때릴지도 모른다. 맞는 건 고통스럽지만 괜찮다. 애슐리가 때리면 기꺼이 맞겠다고 생각했다.
코이는 두려움에 먼저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온몸을 긴장시킨 채 떨고 있는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지금 키스해 달라고 눈을 감은 거야?”
어이가 없다는 듯한 물음이었다. 코이는 예상과 전혀 다른 질문에 움칠 놀라 슬그머니 눈을 떴다. 여전히 무서웠지만 시야에 들어온 애슐리의 표정은 생각도 못 한 것이었다. 황당하다는 듯이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애슐리의 모습에, 코이는 당황해 눈을 깜박거렸다.
“아니, 나는, 저기.”
코이는 더듬거리며 어렵게 대답했다.
“네가…… 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때려? 내가? 너를?”
하, 애슐리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코이가 또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코이의 반응을 보며 애슐리는 그저 기가 막혔다. 방금 전까지 그보다 더 심한 걸 생각하기도 했지만 최소한 때리는 것만은 전혀 계산에 없었다.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신의 반도 되지 않는 이 작은 몸의 어디를 때린단 말인가.
“내가 널 때릴 리가 없잖아.”
한숨에 이어 질타했지만 사실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하려던 짓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코이를 강제로 발현시키려 하다니.
거기다 감금하고 강간하려고까지 했다. 얼마나 끔찍한 상상인가. 하지만 지금에 와서도 애슐리는 그것에 너무나 강한 매혹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야, 난 그 남자와 달라.
애슐리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그렇게 강제로 코이를 내 것으로 만든다면 내가 그 남자와 다를 게 뭔가.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은 코이를 사랑하고, 그러니 아껴 주고 소중히 대해 줄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코이를 마음대로 휘두르진 않을 거야, 절대로.
애슐리는 다짐하며 다시금 코이를 끌어안았다. 어깨에 코를 묻고 깊이 숨을 들이켜자 희미한 살 내음이 느껴졌다.
그렇게 애슐리는 한동안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어두운 욕망 역시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나가.”
낮은 소리로 말한 애슐리가 천천히 팔의 힘을 풀었다.
“데려다줄게.”
품 안에서 코이의 몸이 조금씩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에서도 또한 두려움 대신 염려가 자리 잡았다.
“괜찮아……?”
애슐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코이가 물었다. 애슐리는 대답 대신 그의 뺨에 키스했다. 코이가 금세 얼굴을 붉히는 걸 보며 애슐리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 미소를 본 코이는 조금이나마 안심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뒤로 물러났다가 애슐리의 옆을 스쳐 서둘러 물 밖으로 나가는 그의 모습을 애슐리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와는 달리 천천히 헤엄쳐 풀장에서 나온 애슐리는 저택 안으로 달려가는 코이의 뒤를 느리게 뒤쫓았다.
자신 안의 어두운 집착과 끈질기게 싸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