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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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애슐리가 코이를 바래다주는 길에 차를 세운 뒤 애슐리는 먼저 차에서 내린 코이와 마주 섰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애쉬.”
코이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애슐리는 묵묵히 코이를 내려다봤지만 얼굴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코이가 아래를 쳐다봤다가 아, 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또 옷을 사 주다니…… 그냥 네 걸 빌려줘도 되는데.”
“아니, 절대 안 돼.”
애슐리가 강하게 부정했다. 코이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으나 애슐리는 진심이었다. 코이는 아까 자신의 몰골이 어땠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으나 애슐리에게는 더할 수 없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샤워를 마친 후 자신이 입고 왔던 낡아 빠진 청바지에 애슐리가 빌려준 새 티셔츠를 입고 나온 코이를 본 애슐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셔츠는 사방이 늘어져 위에서 보면 코이의 속살이 훤히 보였다. 자신이 물고 빨았던 온갖 흔적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걸 보며 애슐리는 미칠 듯한 분노와 욕망을 동시에 느꼈다.
그길로 그는 즉시 코이를 차에 싣고 쇼핑몰로 향했으며, 코이의 사이즈에 맞는 셔츠를 세 벌이나 사서 입힌 다음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코이로서는 ‘애쉬는 자기 옷을 남이 입는 걸 싫어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둘은 여전히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예전과 다를 게 없는데도 코이는 왠지 오늘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하긴, 다를 수밖에 없지.
내심 씁쓸해하면서도 그는 인정해야 했다. 이런 상황을 만든 건 자신이라는 걸.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쉬는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야.
코이는 자신의 처지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애슐리는 자신이 불쌍해서 무리에 끼워 준 것뿐이고, 그것에 자신은 감사해하고 있지만 그러니 더욱 오해해서는 안 된다. 거기다 발현한 지도 얼마 안 됐으니 애슐리는 충분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분명히 후회하겠지.
내가 덥석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나중엔 다행이라고 생각할 거야.
“항상 고마워, 애쉬.”
코이는 어렵게 웃어 보였다. 착각일 뿐이었어도 좋아한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 내심 그는 덧붙였다. 넌 정말 좋은 애야.
“코이.”
“응.”
애슐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코이는 얼른 대답했다. 애슐리는 그러고도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했던 건 진심이야.”
“그건…….”
“착각도 아니고 잘못 말한 것도 아냐. 난 너를 좋아해.”
애슐리는 단호하게 코이의 말을 가로막았다. 우물쭈물하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코이를 보며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네가 왜 그렇게 강하게 내 말을 부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감정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난 너를 좋아하고, 이건 거짓이 아냐.”
“…….”
“난 널 좋아해. 왜 못 믿는 거야?”
애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기 시작하는 태양이 주변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코이는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이따금씩 바람에 흔들리는 애슐리의 찬란한 백금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건, 하고 한참 만에 코이가 대답했다.
“나 같은 걸…… 네가 좋아할 리가 없잖아.”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코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코이.”
“응.”
황급히 대답하자 애슐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다시는 ‘나 같은 걸’ 그딴 소리 하지 마. 그럼 나는 ‘너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 돼 버려.”
“…….”
코이는 말문이 막혀 그의 얼굴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애슐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널 네가 멋대로 깎아내리지 말란 말이야. 코너 나일즈를 멸시하면 그게 누구든 난 화를 낼 거야. 그게 너라도.”
강한 어조에 코이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저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그를 보고 애슐리가 물었다.
“알았지, 코이?”
“…….”
“코너 나일즈.”
애슐리가 풀네임을 불렀다.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코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서둘러 덧붙였다.
“안 그럴게, 앞으로는.”
그제야 애슐리의 표정이 풀어지더니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나자 그나마 코이는 안도했으나 여전히 지금 상황을 진심이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지금도 나는 애쉬와 함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건지도 몰라.
그의 발현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옆에 누워 있다가 그만 잠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애슐리가 이런 말을 내게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애슐리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지금 또 자기 비하를 하고 있지?”
“뭐? 아, 아냐.”
애슐리의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에 코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저기…… 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코이는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애슐리는 그런 그의 반응이 이제는 익숙해져 더 이상 놀랍지도 당혹스럽지도 않았다.
“괜찮아, 믿지 않아도.”
애슐리가 말했다.
“난 계속해서 널 좋아할 거고, 네가 믿을 때까지 몇 번이고 말할 거야. 널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상관없어. 네가 지쳐서든 진심으로든 받아들일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그런…….”
코이는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끝을 흐린 채 고개를 떨궜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애슐리가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어?
그가 내민 물건을 본 코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을 본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맞아, 네가 준 홈커밍 파티 티켓.”
“이걸 왜…….”
당황해하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난 이걸 너와 가고 싶었어.”
코이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혹시 생각이 변한 걸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굳이 티켓을 돌려주는 걸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돌아온 쿠폰이 어쩐지 가슴을 아프게 했을 때, 애슐리가 뜻밖의 말을 했다.
“네가 나와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내게 이걸 줘.”
“어…… 어?”
뜻밖의 말에 코이는 또다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애슐리는 평온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에게 같이 파티에 가자고 말하면 돼. 그럼 난 알게 될 거야.”
애슐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깃들었다.
“너도 날 좋아한다는 걸.”
코이는 입까지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그가 패닉에 빠져 버린 것을 훤히 꿰뚫어본 애슐리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몸을 숙여 코이의 손을 붙잡았다. 맥없이 풀려 있던 손바닥에 티켓을 올려놓고 손가락을 구부려 억지로 쥐게 한 애슐리가 한 손에 코이의 손을 움켜쥐었다.
“기다릴게, 코이.”
그 말을 남기고 애슐리는 다시 코이의 뺨에 키스했다. 쪽, 하고 들린 귀여운 소리와 함께 뺨에 촉촉한 감촉이 남았다.
“그럼 안녕, 코이. 내일 보자.”
애슐리는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선뜻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코이를 뒤로한 채 카이엔을 몰고 가 버렸다.
룸미러에 비쳤던 코이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애슐리는 곧장 집으로 가는 대신 차선을 바꿔 정처 없이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코이와 함께 있었는데, 이제는 또다시 아무도 없지 않은가.
사실 동부에 살 때도 그다지 다른 건 없었다. 그가 살고 있던 저택 안에는 많은 사용인들이 언제나 북적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것이 싫어서 도망쳤고, 여전히 이곳도 고요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사람이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무도 없어서 고요하다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까.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이 코이가 제집을 찾아온 이후로 바뀌었다. 애슐리는 이제 그 적막이 지긋지긋했다. 혼자 잠드는 것도 더 이상은 싫었다. 하지만 아무라도 상관없는 건 아니었다. 원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으니까.
문득 운전대를 붙잡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반팔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에는 붕대가 매어져 있었다. 잠든 사이 코이가 매어 놓은 붕대였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붕대를 감은 팔을 들어 올렸다.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던 애슐리는 슬며시 붕대 위로 입술을 댔다. 문득 느껴진 체온이 마치 코이의 그것 같아서, 그는 무의식중에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