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럼 네 친구들은 아무도 모르는 거지? 네가 발현했다는 걸.”
코이는 화제를 돌려 물었다.
“그래.”
애슐리가 말했다.
“내가 발현한 걸 아는 건 선생님 몇 분이랑 감독님, 아버지와 비서뿐이야. ……뭐, 좀 위험인물이 있긴 한데.”
“누, 누구?”
코이가 잔뜩 긴장해서 물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애슐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시로 내 집에 숨어드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그 사람은 내 비밀을 알고 있어.”
“저, 정말? 어떡해, 방범 시설이라도 설치해야 되는 거 아냐?”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되게 작거든, 내 반도 안 돼.”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아무리 너라도 자고 있거나 할 때 누군가 습격하면 어떡해, 위험하다고.”
그 말에 “음…….” 하고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던 애슐리가 말했다.
“그건 그래. 내가 아플 때도 내 집에 숨어들어 와서 하마터면 위험해질 뻔하긴 했어.”
“그것 봐! 그래서, 별일은 없었지? 응?”
금세 반응한 그를 내려다보며 애슐리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 목숨을 노린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정문 경비를 뚫고 매번 집에 찾아온단 말이야. 정말 무서운 존재야.”
“정문 경비를 뚫어?”
그의 말을 반복했던 코이가 문득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멈칫한 그에게 애슐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떻게 그런 길을 알았는지 산을 빙 돌아서 우리 집에 찾아왔더라고.”
그제야 의미를 깨달은 코이가 입을 다물었다. 점점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애슐리는 여전히 은밀한 비밀을 나누듯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거기다 그 녀석 이동수단이 뭔지 알아? 차도 아니고 자전거야. 그나마 낡아 빠져서 고철덩어리나 다름없는.”
급기야 토마토처럼 빨개져 버린 코이의 얼굴을 향해 애슐리는 일부러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그걸 끌고 산을 돌아오는 녀석을 어떻게 이기겠어? 정말 너무 무섭지 않아?”
“모, 몰라!”
코이는 황급히 돌아서서 교실을 향해 달려갔다. 물론 그래 봤자 애슐리는 건성으로 몇 걸음 옮기는 것으로 금세 그를 따라잡았다.
“그런데 코이, 더 무서운 일이 뭔지 알아?”
코이는 대답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뛰었다. 애슐리는 슬렁슬렁 나란히 달리며 말했다.
“글쎄, 그 녀석이 자전거를 바꿨더라고!”
“그만해애!”
결국 참지 못한 코이가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 봤자 솜방망이만도 못한 주먹일 텐데, 그나마 제대로 때리지도 못하고 비껴나 버렸다. 하지만 팔을 스쳤을 뿐인 주먹에 애슐리는 갑자기 아야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대로 다시 달려가던 코이는 한 박자 늦게 뒤를 돌아봤다가 놀라서 소리쳤다.
“애, 애쉬?”
어떡해! 코이는 사색이 되어 다시 애쉬에게로 돌아갔다. 애쉬는 그가 가까이 올 때까지 그 자리에 웅크린 채 맞은 팔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코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물었다.
“애, 애쉬, 괜찮아? 미안해, 발현한 지 얼마 안 돼서 몸도 안 좋을 텐데…… 어떡하지, 정말 미안해.”
911을 불러야 하나? 다급하게 휴대 전화를 꺼내려 했을 때, 갑자기 애슐리가 그의 두 팔을 붙잡았다. 휘둥그레진 코이의 시야로 애슐리가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잡았다.”
“날 속였구나!”
코이가 뒤늦게 버둥거렸지만 물론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애슐리는 선뜻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 안아 끌어당겼다.
“이번엔 네가 나한테 굴러들어 온 거야.”
“네, 네가 날 속였잖아.”
“응, 미안.”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말투로 애슐리가 말했다. 코이는 그를 향해 화를 내 보려 했지만 올라온 것은 안도감이었다.
다친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후우,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를 보고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다. 만약 학교가 아니었다면 키스했을 것이다. 애슐리는 아쉬운 마음을 참고 대신 그를 끌어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와 나란히 걸으며 턱까지 차오른 숨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자 코이는 문득 아까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저기, 애쉬.”
“응?”
애슐리는 언제나처럼 즉시 대답했다. 코이는 기억에 남아 있는 지식을 한껏 동원해 물었다.
“저기,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 그럼 평소에는 괜찮은데 네 집에서는 페로몬을 개방한단 말이지? 그럼 내가 너희 집에 가면 거기에 노출도 될 거고?”
“그래.”
애슐리는 이번에도 선뜻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긴장하고 있었다. 어쩌면 코이는 이제 다시는 그의 집에 오지 않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다. 이것은 모두 자신이 거지같이 발현했기 때문이니까.
내심 각오하고 있는데, 코이가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알겠어.”
“……끝이야?”
너무나 간단한 반응에 애슐리가 자신도 모르게 정면에서 시선을 떼고 코이를 바라보았다.
“어? 어…….”
코이는 어리둥절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그냥 잘 씻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괜찮아, 나 하루에 샤워 두 번씩 꼭 해.”
덧붙여 그는 해맑게 웃었다.
“네가 발현하는 내내 함께 있었는데도 발현하지 않았잖아.”
아버지가 애슐리와 만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코이는 그 말에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같이 있자.〉
코이의 말을 떠올린 애슐리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애슐리가 말했다.
“같이 있자.”
“응.”
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건 상관없다. 절대 애슐리와 헤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다짐하며 코이는 애슐리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같이 있을게.”
그 순간 애슐리는 코이를 끌어안고 마구 키스를 퍼붓고 싶은 자신을 참느라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긴 학교야, 그는 연거푸 주문처럼 되뇌었다. 코이를 위해서라도 참아야 돼.
그들은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서 그런 관계가 되길 바라고 있지만 그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에게는 하루하루, 아니 1시간, 1분, 1초가 너무나 길었다.
“코이.”
수업이 있는 교실에 다다라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코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애슐리는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오래는 못 기다려.”
어…….
코이는 즉시 반응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애슐리가 그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먼저 교실로 들어갔다. 우물쭈물하며 뒤에 남겨진 코이를 내버려 둔 채 자리에 앉자 복도에서 머뭇거리다 교실로 들어온 코이가 애슐리의 눈치를 보며 옆 자리에 앉았다. 애슐리는 그를 향해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그 전에 인정해, 코이. 네 마음을.
또 다른 학생이 들어오고, 선생이 수업을 시작했다. 애슐리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는 코이를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긴장한 듯한 표정에서 방금 들은 애슐리의 말에 무척이나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런 코이의 얼굴을 보며 애슐리는 생각했다.
내가 더 이상 못 견디고 널 납치해 버릴지도 몰라.
*
“하나, 둘, 셋, 끝!”
에리얼의 구호에 맞춰 모두가 일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동시에 음악도 멈추고, 몇 초 뒤 다들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풀었다. 코이 또한 헐떡거리며 몸을 접어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18
치어리딩 팀의 연습은 생각보다 더 고됐다. 거기다 운동량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고, 따라서 팀원들의 체력 또한 어마어마했다.
코이는 팀에 들어온 이후 매일, 매순간 부원들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치어리더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동안 그들이 항상 웃으며 밝게 뛰고 있었기 때문에 이토록 고된 노력과 훈련과 눈물이 숨어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역할에 진심이었다.
“우리가 버팔로 고등학교를 우승으로 이끈다!”
에리얼의 외침에 모두가 소리를 합쳐 복창했다. 코이 또한 따라서 외치며 그들의 자긍심에 감동했다.
하지만 감동의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코이에게는 언제나 추가 훈련이 남아 있었다.
“넌 근육이 너무 없어.”
에리얼은 시시때때로 코이의 몸 여기저기를 찌르며 혹독하게 비난하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응원부의 모두는 거듭된 체력 훈련으로 제법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에리얼은 역시 부장답게 최고였다.
“에리얼은 아마추어 복싱 경기에서 우승도 했었어.”
언젠가 부주장이 자신들의 부장을 자랑스러워하며 했던 말에 코이는 감탄하는 한편 벌겋게 부어올라 있던 애슐리의 얼굴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 모두 오늘도 수고 많았어.”
대충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에리얼이 손뼉을 쳐 주의를 집중시켰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자 에리얼이 말을 이었다.
“곧 홈커밍 경기가 있을 예정이니까 그 전에 단복을 맞출 거야. 유니폼은 미리 준비해 두고, 혹시 문제가 있는 사람은 나나 부주장한테 꼭 얘기해 줘. 이번 경기는 시즌의 시작이나 다름없으니까 꼭 제대로 해내야 돼.”
“응!”
“네!”
잔뜩 기합이 들어간 외침에 에리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생긋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린 벨에서 모두 함께 단합의 시간을 가져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