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졌다. 코이는 숨을 씨근거리며 애슐리를 보고 있었다. 코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고 애슐리는 이성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앨은 친구잖아.”
“휘트니도 내 친구야!”
지금껏 당당하게 코이를 쥐 잡듯 몰아세웠던 애슐리의 기세가 확 죽어 버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이번엔 뒤를 보며 턱과 입을 쓰다듬더니 다시 코이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뭘 떨어뜨렸는데?”
“샤넬!”
코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치자 애슐리가 주춤했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코이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샤넬?”
코이는 억울함에 재차 소리쳤다.
“그래, 샤넬! 샤넬이라고! 샤! 넬!”
결국 코이가 눈물을 터뜨렸다. 이렇게 억울한 건 처음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온갖 부당한 일을 겪어도 괜찮았는데, 왜 이렇게 서러울까.
애쉬라서 그래.
코이는 눈물을 훔치며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애슐리가 자신을 오해하고 다그치는 건 참을 수 없다.
좋아하니까.
코이는 깨달았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나를 오해하는 게 싫은 거야.
고요한 차 안에 잠시 동안 코이가 훌쩍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애슐리는 그를 바라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비상등을 끄고 차를 출발시켰다.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슐리는 흘긋 그의 눈치를 봤으나 코이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눈물은 멈춘 것 같았지만 여전히 코는 새빨갰다. 킁, 또 코를 들이마셨던 코이가 갑자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에 당황한 애슐리가 급하게 물었다.
“또 울어?”
코이는 속상함이 가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콜라도 다 못 먹고 나왔단 말이야.”
배도 고픈데 남은 콜라가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오지 말걸. 괜히 따라와서 돈만 버리고 애쉬랑은 싸우고.
계속해서 눈물을 닦는 모습에 잠시 말이 없던 애쉬가 입을 열었다.
“저녁은? 먹었어?”
코이는 고개를 떨군 채 훌쩍거리다 작게 가로저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애슐리가 텅 빈 도로에서 유턴을 했다. 이번에도 코이의 몸이 휘청했지만 아까처럼 거칠게는 아니었다.
도로를 바꿔서 새로운 길로 달려가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계속되던 침묵을 깨고 코이가 여전히 훌쩍거리며 물었다.
“……샤넬이 뭐야?”
애슐리는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람 이름.”
“어?”
더더욱 알 수가 없어졌다. 코이는 어리둥절해져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날 놀리는 거지?”
다른 때는 자주 그랬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애슐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정말이야. 검색해 보면 알잖아.”
“……어, 응.”
코이는 머뭇머뭇 휴대 전화를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 S…….
“C.”
곧바로 애슐리가 철자를 불렀다. 황급히 S를 지운 코이는 그가 부르는 대로 알파벳을 하나씩 찾아 눌렀다. 곧 화면이 뜨고, 코이는 열심히 떠오른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되게 옛날 사람인데?”
“되게는 아냐.”
코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거기서 죽은 사람을 왜 찾아……? 애슐리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면 혹시 휘트니가 무슨 컬트 같은 거에 빠진 걸까?
순간 무서워졌을 때, 저 멀리 24시간 영업인 패스트푸드점이 보였다. 시간이 늦어 뭔가 먹을 수 있을 만한 곳은 이런 데뿐이었다. 텅 비어 있는 드라이브 스루로 향한 애슐리는 주문을 하기 전에 코이에게 물었다.
“뭐 먹을래?”
코이는 여전히 코를 훌쩍이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평소에는 상상도 못 했던 비싼 햄버거들이 가득했다. 어떤 걸 골라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는데, 그런 코이를 흘긋 본 애슐리가 말했다.
“난 베이컨 치즈 버거에 더블 패티를 주문할 건데, 너도 먹어 볼래?”
“어…….”
상상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안 그래도 비싼 가게인데 더블 패티라니. 코이의 표정을 본 애슐리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 얼굴을 보자 코이 또한 긴장이 풀렸다.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애슐리가 물었다.
“사이드 메뉴는?”
“괜찮, 아.”
코이가 대답하자 애슐리가 이번엔 음료를 제안했다.
“망고 콜라는 없어.”
“저기…….”
코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밀크셰이크 먹어도 돼……?”
맛에 둔한 그가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건 단맛이었다. 거기다 우유의 부드러움까지 합해져 밀크셰이크는 코이가 무척 좋아하는 음료였다. 비싸서 거의 사 먹지 못하지만.
애슐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어? 햄버거에 토핑은 추가 안 해?”
그때 코이는 메뉴판의 상단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모든 토핑 무료’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금세 표정이 환해진 그가 대답했다.
“할래, 토마토랑 양파. 치즈도.”
“그래.”
선뜻 말한 애슐리는 버튼을 눌러 주문을 시작했다. 줄줄 읊어 대는 메뉴는 듣기만 해도 침이 고였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동안 애슐리는 차를 이동시켰다. 방금 전까지 다퉜던 것을 잊고 코이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애슐리의 오해는 풀린 듯했다. 여자애가 코너 나일즈에게 키스라니,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걸 이젠 알았겠지.
……그러네.
문득 의기소침해졌을 때, 마침 햄버거와 음료가 나왔다. 음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받아 코이에게 건네준 애슐리가 계산을 끝낸 뒤 차를 주차장으로 뺐다.
“자.”
코이가 소중하게 안고 있던 봉지를 받아 그가 주문한 버거를 꺼내 주자 코이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고마워.”
진심을 담아 말한 코이에게 애슐리는 잠자코 밀크셰이크를 꺼내 주었다. 코이는 잔뜩 기대에 차 햄버거를 감싼 종이를 한 겹씩 벗겨 냈다.
처음 보는 두께의 햄버거가 시야에 드러나자 잠시 동안 코이는 그 황홀한 자태에 넋을 잃었다. 조심조심 입을 벌리고 전부 다 들어가지 않는 햄버거를 간신히 위아래 둘로 나눠서 베어 물고 나자, 예상보다 훨씬 부드럽고 바삭한 식감에 저절로 눈이 커졌다.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코이는 이 순간 처음으로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면 맛도 더 많이 느끼게 되겠지?
지금 느끼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맛있을 게 분명한 햄버거를 입에 넣고 씹으며, 코이는 이 즐거움을 온전히 실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몹시 안타까워했다.
“맛은 어때, 괜찮아?”
애슐리가 자신의 햄버거를 먹기 전에 먼저 물었다. 코이는 입 안 가득히 햄버거를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가 없어서, 대신 엄지를 치켜들자 애슐리는 조용히 웃더니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없이 먹기만 했다. 햄버거를 다 먹고 난 뒤 양파 튀김과 감자튀김에 치즈 스틱까지 먹고 나자 코이는 그야말로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앞으로 사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점심값을 아낄 수 있겠네.
반짝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코이를 보며 애슐리는 생각했다.
정말 냄새를 못 맡는 건가?
그런 질 나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같은 악질이 아니라면. 물론 코이는 절대 그런 쓰레기가 아니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선천적일 수도 후천적일 수도 있다. 후천적이라면 사고라도 났던 걸까? 무슨 사고?
궁금한 건 많았지만 묻는 건 쉽지 않았다. 애슐리는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애매한 것인지 새삼 실감했다.
언제까지나 코이를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
어서 결론을 내야 한다. 코이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게 하든, 납치해서 감금하든.
식사가 끝나고 나자 애슐리는 아까 음식을 담았던 봉지에 쓰레기를 모아 넣더니 뒷좌석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전벨트 매.”
애슐리의 말에 따라 코이는 서둘러 벨트를 맸다. 코이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길에도 애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 안에는 페로몬 향기가 가득 차 있었지만 지금 그가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지 코이는 전혀 알지 못했다.
*
“데려다줘서 고마워.”
항상 같은 장소에서 내린 코이가 인사를 하자 마주 선 애슐리가 옆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햄버거도 아주 잘 먹었어. 맛있었어.”
“그래.”
이번에도 짧은 대답을 반복한 애슐리가 고개를 숙였다. 엄지손가락으로 눈썹 위를 긁적이며 뭔가 할 말을 찾는 듯한 모습에 코이는 의아해하며 기다렸다.
“코이.”
“응.”
냉큼 대답하자 애슐리가 허리를 펴고 물었다.
“아까 너, 나와 앨의 사이를 질투했던 거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코이는 마땅한 대답을 하기는커녕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아, 아, 아니, 아니, 아.”
다급하게 고개만 가로저을 뿐 말을 하지 못하는 그의 얼굴은 또다시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애슐리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더없이 진지하게 그는 고백했다.
“난 했어.”
그저 부정하기에 급급했던 코이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다. 애슐리는 여전히 조용하게 덧붙였다.
“휘트니가 네 뺨에 키스한 줄 알고 머리끝까지 화가 났었어.”
“키스하지 않았…….”
“그래, 내가 잘못 본 게 맞겠지.”
서둘러 정정하는 코이를 가로막고 애슐리가 말했다. 할 말이 없어진 코이가 입을 다물자 애슐리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이.”
“……응.”
이번에는 조금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해하는데,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애슐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