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코이는 눈만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애슐리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서서 코이와의 거리를 유지한 채 말했다.
“날 좋아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질투도 한 거고.”
“아, 아니, 아니, 그런, 아니.”
코이는 다급하게 뒤늦은 부정을 했다. 고장 난 것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며 고개를 젓던 그의 모습에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 아는 사실인데 부정하지 마.”
“아, 아냐, 아니라고 했잖아! 어, 어떻게 알아? 네가 어떻게 아냐고!”
발칙하게 적반하장으로 소리치는 코이에게 애슐리는 폭탄선언을 했다.
“게시판에 글 쓴 거 너잖아.”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야말로 코이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까처럼 고개를 젓지도 손을 내밀지도 못한 채 경악한 듯 눈만 크게 뜨고 아무 말 못 하던 그가 한참 만에 겨우 입을 뗐다.
“무, 무, 무, 무슨 게, 게시판?”
간신히 더듬더듬 말만 주워섬기는 그를 보며 애슐리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이스하키 팀 주장에 AP 수업 듣고 대입 시험 만점인 친구를 좋아하게 됐다면서. 전교생이 다 알아, 속일 생각 마.”
코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요란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대변해 주고도 남았다. 저기, 하고 간신히 떨리는 음성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정말 다 알아……?”
기어들어 가는 음성에 애슐리는 선뜻 답을 내놓았다.
“일단 상대가 나라는 건 전부 알지.”
“내, 내가 쓴 거 아, 아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또다시 부정하는 코이의 반응에 애슐리는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코이,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조용한 음성으로 그가 물었다. 여전히 고개만 젓고 있는 코이를 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오래는 못 기다려.”
코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더없이 차분한 음성이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말보다도 더 강력하게 코이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코이를 마주 보며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곧 홈커밍 경기가 있을 거야.”
주변에는 지나가는 차조차 없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고요 속에서 애슐리의 조용한 음성이 유난히 선명하게 코이의 귀에 들어왔다.
“이번 경기에서 이기면 네 대답이 어느 쪽이든 난 결론을 내릴 거야.”
애슐리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코이를 내려다봤다.
“알겠어, 코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그리고 애슐리는 한 차례 더 지그시 코이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자신의 차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보고 있던 코이는 뒤늦게 소리를 내어 물었다.
“홈커밍, 파티는…….”
간신히 쥐어짜 낸 음성에 차의 문을 열었던 애슐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미간을 모으며 쓴웃음을 지었던 애슐리가 말했다.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아.”
코이는 그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뒤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애슐리의 차가 자리를 떠났다.
순식간에 코이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애슐리는 저택을 향해 차를 몰면서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후회는 전혀 없었다. 항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코이를 생각해 보면 차라리 이쪽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마지막이라는 말은 그의 진심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그는 실행할 것이다. 기필코.
*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된 차의 자취를 코이는 멍하니 좇고 있었다. 도로는 텅 비어 오가는 차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찬 바람이 한 차례 불고 지나가 뒤늦게 정신이 든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오기 전에 샤워를 끝내야 한다.
애슐리가 페로몬을 풀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설령 아버지가 두들겨 팬다고 해도 코이는 결코 애슐리와 떨어지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위험은 피하는 게 좋으니까.
혹시 몰라 모터홈의 창과 문을 모두 열어 놓고 재빨리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올 때까지 모든 걸 끝내야 한다. 입었던 옷을 빠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샤워기 밑에서 물을 맞으며 열심히 티셔츠와 바지를 손으로 문질러 빤 코이는 머리를 감고 몸에 비누칠을 두 번이나 더 한 뒤 새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모터홈 밖에 걸린 빨래줄에 티셔츠와 바지를 널어 놓은 뒤에야 비로소 안심이 됐다. 이제 아버지가 오기 전에 침대에 누워 숨기만 하면 된다.
급한 일을 마무리하고 눕자 뒤늦게 찾아온 고요에 숨이 막혔다. 코이는 눈을 감고 온몸을 웅크렸다. 머릿속은 이내 애슐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코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급하게 집에 오자마자 씻고 빨래를 하는 등 부산을 떤 것은 어떻게든 지금의 생각을 미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하지만 모든 일을 마치고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자 곧바로 머릿속은 애슐리가 점령해 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피하고 싶었던 질문을 마주했다.
애쉬가 한 말의 의미는 대체 뭘까.
코이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아까의 기억을 되새겼다. 애슐리는 지금껏 본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걸까.
사람은 누구나 지치게 되어 있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이제 날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일까?
반복되는 상황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코이는 믿어 주지 않았고, 관계에 진전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애슐리 밀러다. 상대가 얼마든지 널리고 널려서 발에 차일.
애쉬가 착각했다고 그를 거절했던 건 나잖아.
그렇다면 착각에서 깨어났을 때 애슐리가 에리얼에게 돌아가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다. 왜 나는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코이는 멍하니 떠올렸다. 너무나 친밀해 보이던 둘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그러자 앞뒤가 들어맞았다.
시합에서 이기면 애쉬는 날 보지 않을 생각인 거야.
〈이번 경기에서 이기면 네 대답이 어느 쪽이든 난 결론을 내릴 거야.〉
애쉬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알겠어, 코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그렇구나. 코이는 생각했다. 이제 너 같은 건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하자 가슴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틀림없다. 그러니까 홈커밍 파티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한 것이다. 코이와 함께 간다는 게 얼마나 미친 생각이었는지 이제 알았으니까.
코이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한껏 몸을 웅크렸다. 알고 있었잖아, 이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애쉬가 좋아한다고 말해도 믿지 않고 거절했던 거잖아. 코이는 혹시나 자신의 숨소리가 새어 나갈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꼭 감았다.
착각이라는 걸 알았으면서 나는 왜.
그제야 자신이 묻어 놓았던 진심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코이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계속 애쉬가 날 좋아할 거라고 믿었던 거지?
코끝이 달아오르고 눈물이 차올랐다. 코이는 숨을 꾹꾹 눌러 참으며 흐느낌을 삼켰다.
그 시각,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애슐리는 얼음을 가득 채운 컵에 망고 콜라를 따르며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코이를 어느 방에 감금해 두면 좋을까.
*
“요즘 너, 너무 기운이 없어.”
훈련 도중, 쉬는 시간에 갑자기 에리얼이 지적했다. 코이는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내가?”
“그래, 너.”
그녀는 두 눈을 치켜뜨고 주의를 줬다.
“치어리딩이 뭔지 몰라? 응원하는 사람이 이렇게 기운이 없으면 선수들이 어떻게 힘을 내니? 우린 선수들보다 더 에너지가 넘쳐야 한다고. 관중들을 압도할 만큼!”
손가락을 코이의 눈앞에까지 들이민 에리얼이 경고했다.
“네 파프리카가 쪼그라들어서 없어질 정도로 하란 말이야, 알겠어?”
“아, 알았어.”
코이의 대답을 확인한 뒤 그녀는 돌아서서 쉬고 있는 부주장에게로 향했다. 휴우, 코이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긴장을 풀었다.
훈련은 계속되고 있었고 에리얼이 그를 부르는 채소의 이름은 그때마다 바뀌었지만 결코 가지 같은 길쭉하고 든든한 야채는 고사하고 아스파라거스조차 아니었다.
오늘은 파프리카구나…….
코이는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그나마 브로콜리보다는 나았다. 처음 브로콜리라고 불렀을 때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혼란스러워 박자를 놓치기까지 했다. 당연하게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후우.
그날 이후 애슐리는 코이를 데리러 오지도 않았다. 문자로 간단히 [훈련 때문에 데리러 갈 수 없게 됐어. 미안. -애쉬] 이렇게 온 게 전부였다. 예전엔 당연히 자전거로 혼자 등하교를 했었는데 며칠이나 됐다고 그새 습관이 되어 버린 건지 코이는 학교로 가는 길이 너무나 쓸쓸해졌다.
물론 애슐리의 생각은 달랐다. 감금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마지막으로 코이를 자유롭게 놔주자는 속셈이었지만 코이는 완전히 오해해 버렸다.
이제 날 보기도 싫은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