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216)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에리얼의 음성에 코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찡그린 얼굴로 코이와 애슐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 뒤로 멀뚱히 서 있는 치어리딩 팀 아이들과 아이스하키 고릴라들을 본 코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코이의 표정에 멈칫한 에리얼이 뒤를 돌아보았다. 셋을 지켜보는 무수한 눈동자를 확인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모두 가서 옷 갈아입어, 뒤풀이 갈 거니까.”

에리얼의 지시에 부부장이 눈을 깜박이더니 아, 하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자, 어서 가자. 뒤풀이는 역시 그린 벨이지?”

“오늘은 레드 벨 어때?”

“레드 벨도 있어?”

“그냥 한 소리지, 바보야. 그냥 대충 말 맞춰.”

“무지개 벨은 어때? 하하하.”

“어머, 너무 웃긴다. 무지개 벨.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그들은 과장되게 웃고 떠들면서 탈의실로 향했다. 그런 와중에도 흘긋거리며 속닥대는 것은 숨기지 못했다. 치어리딩 팀이 부랴부랴 자리를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 에리얼이 다시 코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나랑 얘기 좀 해.”

“어, 어어?”

“잠깐, 기다려.”

코이의 팔을 잡고 끌고 가려는 에리얼을 애슐리가 제지했다. 에리얼이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양쪽에서 팔을 하나씩 잡고 대치하는 모습에 코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양쪽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애슐리가 에리얼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코이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여기서 해.”

“왜? 내가 코이를 때리기라도 할 것 같아?”

에리얼의 빈정거림에 애슐리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말보다 더 확실한 반응에 에리얼은 불쾌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내뱉었다.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 내가 먼저 코이와 말을 하는 게 나을 텐데? 아니면 30분 줄 테니까 얘기 끝낼래? 그럼 그다음에 내가 무제한으로 코이를 맡고.”

애슐리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다 코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겠냐는 듯이. 코이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애, 앨과 얘기를 하고 싶어.”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코이를 응시하더니 느리게 손의 힘을 뺐다. 애슐리가 완전히 팔을 놓아주자 에리얼은 기다렸다는 듯이 코이를 끌고 더그아웃을 빠져나갔다. 그들을 지켜보며 애슐리가 뒤에서 소리쳤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코이!”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애슐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에리얼을 따라 모퉁이를 돌아 버린 바람에 그의 표정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

에리얼이 코이를 끌고 간 곳은 탈의실과는 반대쪽 방향에 있는 복도 끝이었다. 비상구가 연결된 그곳은 인적이 드물어 이런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했다.

“자, 말해 봐.”

단둘이 남자 드디어 에리얼이 말문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코이는 당황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찌푸린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리얼의 모습은 화가 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코이는 그녀에게 끌려오면서 떠올렸던 말들을 간신히 더듬더듬 내놓기 시작했다.

“저기, 그러니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에리얼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코이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정말이야. 저기, 난 애쉬가 경기에서 이기면 다시 너랑 사귄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기면 나랑 다시 사귄다고? 애쉬가 그런 말을 했어?”

“어…….”

에리얼의 다그침에 코이는 눈만 깜박이다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그는 중얼거렸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그런데?”

에리얼이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왜 너는 그런 생각을 했던 건데?”

코이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에리얼은 한숨을 내쉬더니 거만하게 턱을 치켜 올렸다.

“대충이라도 말해 봐, 내가 듣고 판단할 테니.”

저기, 하고 코이는 다시금 말을 끌었다. 그에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애쉬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했었어.”

어렵게 말을 끄집어내자 에리얼이 멈칫했다. 코이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진짜일 리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착각하는 거라고, 얘기했어. 그리고…… 애쉬가, 이번 경기가 끝나면 결론을…… 내린……다고…….”

그의 음성이 점차 사그라들더니 종내에는 사라져 버렸다. 뒤늦게 그는 깨달았다. 애슐리는 단 한 번도 에리얼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코이가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애슐리가 착각에서 깨어나고 나면 당연히 에리얼에게로 돌아갈 거라고.

“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잖아.”

코이는 다급하게 말했다.

“너하고 사귀고 있었으니까, 왜 헤어진 건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거든.〉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

코이는 말을 멈추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다. 그렇다면 에리얼은 아니었다는 얘기잖아. 나는 왜 에리얼이라고 착각했던 거지?

에리얼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라는 얘기야?

에리얼과 코이 사이에 어마어마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리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코이는 가슴을 졸이며 말문을 열지 못했다. 설마, 설마, 설마.

마침내 에리얼이 속삭였다.

“너였구나.”

그 순간 잊고 있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좋아해.〉

그날 식당에서.

〈좋아해, 코이.〉

그날 풀장에서.

〈코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말했던 애슐리의 표정과 눈빛이 떠오른 순간, 코이는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설마, 말도 안 돼.

애쉬는 나를 동정하고 있을 뿐이야.

작게 올라오는 기대를 현실이 가로막았다. 코이는 한사코 그의 마음을 부정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왜?”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 버린 모양이었다. 에리얼의 음성에 코이는 정신이 들었다. 당황해 눈을 깜박이자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코이를 보고 있었다.

“왜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조용한 음성에 코이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건, 왜냐면…….”

내가 코너 나일즈니까.

애슐리는 절대 자신을 비하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코너 나일즈가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는지 애슐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에 비하면 애슐리는 너무나 완벽하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코이, 애쉬의 감정은 애쉬만 아는 거야.”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너도, 나도, 아무도 몰라. 애쉬가 그렇다고 하면 그게 그 애의 감정인 거야.”

“…….”

“그걸 네가 부정하면 안 돼.”

에리얼의 차분한 음성이 이어졌다.

“넌 네 기분에만 충실하면 돼. 다른 사람의 감정을 부정하지는 마, 그건 그 사람을 무시하는 거야.”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코이가 황급히 고개를 젓자 다 안다는 듯 에리얼이 물었다.

“그래서, 네 감정은 뭐야?”

“…….”

“애쉬가 널 좋아하건 안 좋아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네 감정만 말해 보라고. 넌 애쉬를 좋아해? 아니면 싫어해?”

여전히 코이가 대답하지 못하자 에리얼이 덧붙였다.

“넌 가서 네 감정에만 솔직해지면 돼. 애쉬가 널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는 판단하지 마. 그건 네 몫이 아니니까.”

“알겠어?” 하고 에리얼이 물었다. 그녀의 단정한 얼굴을 보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코이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네가 있잖아.”

“뭐?”

에리얼이 또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코이가 차마 다음 말을 못 하고 있는데, 그녀가 또박또박 명쾌한 발음으로 물었다.

“애쉬가 나하고 사귈 때 너한테 고백했니?”

“아, 아냐…… 아마도.”

황급히 고개를 젓자 에리얼이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하고 헤어진 다음에 고백한 거지? 그럼 뭐가 문제야?”

코이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왠지 그녀를 배신하는 기분이 들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우물쭈물하는 코이에게 에리얼은 한숨을 사이에 두고 입을 열었다.

“코이, 내가 예전에 들었던 말이 있어.”

너무나 평온한 음성으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대. 하나는 흘러가 버린 강물이고.”

검지를 폈던 그녀가 이어서 중지를 펼쳤다.

“또 하나는 돌아선 사람의 마음이야.”

코이는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에리얼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게 태도를 정리했다.

“애쉬와 나는 끝났어. 너와 내 자매들이 왜 못 받아들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린 완전히 끝냈고, 서로 아무런 감정도 없어.”

코이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간단히 결론을 냈다.

“그러니까 네가 날 신경 써서 솔직해지지 못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오히려 민폐니까.”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에리얼은 뒤로 물러났다.

“난 자매들이랑 같이 뒤풀이에 갈 거야. 넌 애쉬와 같이 오든지 말든지, 네가 좋을 대로 해.”

마지막으로 덧붙인 그녀가 돌아섰다. 코이는 산뜻하게 걸어가 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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