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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84/216)

84화

날벼락 같은 소리에 애슐리는 처음으로 말문을 잃어버렸다.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돼 버렸다.

“……누가 그래?”

설마.

간신히 애슐리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코이가 지금까지 날 거부했던 건, 그래서.

애슐리는 그만 무참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정말이었구나.

코이는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애슐리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명확했다. 그 표정을 본 코이는 잠시나마 품었던 기대를 완전히 접어 버렸다. 그래도 조금은 아니지 않을까 기대했던 자신이 역시나 바보였다. 코이는 에리얼의 추측 또한 틀렸다고 단정했다.

“그, 그리고 넌,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

흐느낌이 올라와 저절로 말이 토막 났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면서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눈물이 가득 차오른 코이에게 애슐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너야.”

코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애슐리는 보다 더 진지하게, 절박한 마음으로 고백했다.

“너라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코너 나일즈.”

코이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다 자업자득이다. 애슐리는 과거의 스스로를 걷어차고 싶어지는 것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널 동정했던 게 맞아.”

이걸 어떻게 해명하면 좋을까. 애슐리는 암담해졌다. 이렇게 자신의 어휘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던 그는 다시 코이를 내려다봤다. 코이는 여전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코이, 동정하는 것과 좋아하는 게 어떻게 다른지 알아?”

코이는 잠자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슐리가 말했다.

“난 알아.”

곧이어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유니폼이 이렇게 바보같이 두껍지만 않았다면 넌 내 심장이 지금 얼마나 빨리 뛰고 있는지 알았을 거야.”

답답함에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애슐리는 이마를 짚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뭘 어떻게 해야 코이가 내 진심을 믿어 주는 거지?

역시 이대로 끌고 가서 감금해 버리는 수밖에 없는 걸까.

코이는 괴로워하는 애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런 애슐리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초조해 보였고, 당혹스러워하는 듯했으며, 죄책감과 또 다른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킨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든 애쉬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이득이 뭐야?〉

불현듯 에리얼의 말이 떠올랐다.

〈넌 네 기분에만 충실하면 돼. 다른 사람의 감정을 부정하지는 마, 그건 그 사람을 무시하는 거야.〉

에리얼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래서, 네 감정은 뭐야?〉

나는.

내 감정은.

코이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내 심장은.

“알아.”

한참 만에 코이가 입을 열었다. 애슐리는 이마를 짚었던 손을 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코이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다 그의 손을 잡아 조심스레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애슐리는 느낄 수 있었다. 얇은 치어리딩 유니폼 천을 사이에 두고 미친 듯이 뛰어 대는 그의 작은 심장을.

애슐리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주변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귓속은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서로의 심장이 질세라 미친 듯이 뛰며 관자놀이를 꽝꽝 울려 대고 있었다. 코이가 입을 열었다.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좋아해, 애쉬.”

왠지 눈물이 나왔다. 코이는 코를 훌쩍이며 마침내 고백했다.

“좋아해, 애쉬.”

거듭 말했지만 그래도 모자랐다. 꾹꾹 눌러 놨던 감정이 일시에 터져 나와 자꾸만 입 밖으로 흘러넘쳤다. 에리얼의 말이 맞다. 중요한 건 코이가 애슐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애쉬의 감정 또한 그렇겠지.

“코이.”

애슐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속삭였다.

“미안해, 상처 줘서.”

애슐리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코이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불쌍해서 같이 다니다니, 게다가 그걸 다른 애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기까지.

나는 얼마나 오만했던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동정을 베풀고, 불쌍하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코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눈으로 봤으면서. 정작 자신은 아버지의 돈으로, 그토록 경멸하는 남자의 부를 마음껏 누리는 주제에.

“내가 잘못했어.”

애슐리가 다시 사과했다. 코이는 그저 눈만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문득 눈앞에 보이는 애슐리의 눈동자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이토록 짙고 이토록 깊은……

보라색 눈동자.

이렇게나 어두운데 이렇게 맑은 보라색이 있을 수 있다니. 더없이 신비로운 눈동자에 코이는 잠시 넋을 잃었다. 만약 그가 비행사가 되어 우주로 나간다면 그때 보이는 빛이 이런 색일까. 수없이 많은 별이 그 안에서 반짝이고, 끝없이 멀고 깊은 우주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다면 나는……

그때도 혹시 이런 기분을 느낄까.

“좋아해, 코이.”

애슐리가 고백했다.

“너뿐이야.”

열정적인 속삭임과는 달리 입가에 닿는 숨결은 서늘했다. 코이는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져 살며시 눈을 감았다. 조금씩 내려온 눈꺼풀이 완전히 닫혔을 때,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아…….

코이는 숨을 멈춘 채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펜스를 꼭 움켜쥐고 한껏 목을 빼자 애슐리가 입술을 뗐다가 곧바로 다시 맞붙였다. 반대로 맞물린 입술에 코이는 온몸을 떨었다. 닿은 건 입술뿐인데 전신이 떨리고 맥박은 휘몰아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애슐리가 키스를 멈추더니 혀로 코이의 꽉 다문 입술을 핥았다. 젖은 타액이 슬그머니 입술을 적시는 감각에 코이는 그야말로 기절할 뻔했다.

애슐리가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때까지 펜스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 코이의 허리를 안아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코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응, 으응…….”

저절로 입가로 소리가 새어 나갔다. 코이는 부끄러워 어떻게든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허리를 안고 있는 애슐리의 팔에 온몸을 맡긴 채로 그는 애슐리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열심히 키스에 반응했다. 두 눈을 꼭 감고 애슐리가 입술을 맞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발끝을 오므리는데, 별안간 키스를 멈춘 애슐리가 속삭였다.

“코이, 입술을 열어야지.”

어……?

코이는 간신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말인지 몰라 그저 눈만 깜박이고 있는데, 잠시 동안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애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감금해 버릴까.”

“어……?”

당연하지만 코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눈만 깜박이는 그를 보고 애슐리는 모르는 척 그의 귀를 깨물었다. 코이가 놀라 어깨를 움츠리자 그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첫 키스지? 코이.”

“어…… 응.”

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슐리로서는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기분이 묘해졌다. 코이의 모든 처음이 자신이라는 만족감과 함께 또다시 인내가 필요한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자 그저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천천히 가자, 천천히.

애슐리는 자신을 다독이며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코이.”

“응.”

여전히 코이는 들뜬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먹어 버리고 싶다.”

“어?”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자신이 그만 마음의 소리를 입 밖에 내고 말았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말을 돌렸다.

“우리도 이만 갈까, 코이? 배고프지 않아?”

“아, 응.”

코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슐리는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그를 꼭 끌어안았다. 입술을 혀로 핥고 꾹 눌러 키스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코이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애슐리는 이번에는 자신의 마음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코이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렇다고 그를 놓아준 것은 아니었다. 대신 손을 붙잡은 애슐리는 그 상태로 펜스를 돌아 나왔다.

“코이.”

“응.”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든 코이의 얼굴이 여전히 빨갰다. 활짝 미소 짓고 있는 그는 그토록 애슐리가 원했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따금씩 쫑긋거리는 귀도 마찬가지였다. 애슐리는 그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같이 샤워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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