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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85/216)

85화

“……어?”

분명히 영어인데 코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몰라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데, 애슐리가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더욱 코이를 혼란스럽게 했다.

〈샤워할래?〉

〈‘같이’ 샤워할래?〉

“……뭐, 뭐, 뭐?”

뒤늦게 코이가 반응했다. 당황해 말을 더듬는 그를 내려다보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샤워하자고.”

그리고 그가 몸을 숙여 코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같이.”

더운 입김이 귓바퀴를 스쳤다. 동시에 등골이 오싹하고, 온몸에 기분 좋은 소름이 달려갔다. 코이는 익숙지 않은 감각에 당황해 자신도 모르게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곧바로 애슐리가 그의 손을 꽉 붙잡아, 그는 기껏해야 한 발을 뒤로 뺀 게 고작이었다. 코이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무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신이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말았다는 사실에 더 패닉에 빠졌지만 정작 애슐리는 태연했다.

“무슨 소리냐니?”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샤워 정도는 같이할 수 있잖아, 뭐가 문제야?”

이어서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우리, 이제 사귀는 사이 아냐?”

“어…….”

코이는 말문이 막혀 또다시 더듬거렸다. 애슐리가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몰아세웠다.

“왜 대답을 못 해? 나랑 키스했잖아. 날 좋아한다고 해 놓고, 이젠 사귀지 않는다고 말할 거야? 코이, 정말 진심이야?”

“아니, 아니, 아니.”

거침없이 쏟아지는 말에 코이는 패닉에 빠져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마마 맞아, 우리 사귀는 거 맞아!”

“그렇지?”

그제야 애슐리가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보고 휴, 안도한 코이에게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럼 같이 샤워하는 거지?”

“어, 응.”

서둘러 고개를 끄덕인 코이는 멈칫했다. 뭔가 두리뭉실하게 넘어가 버린 것 같은데…….

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곧바로 애슐리가 고개를 숙여 키스하고, 얼이 빠진 코이를 그대로 끌고 갔다.

*

“……어?”

애슐리가 향한 곳은 아이스하키 팀 로커룸이었다. 여전히 머릿속이 멍한 채로 끌려왔던 코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박였다. 그사이 애슐리는 거침없이 로커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짧은 순간 눈앞에 스쳐 가는 아이스하키 팀 아이들의 얼굴을 본 코이는 그러나 뜻밖에도 고요한 실내에 곧 어리둥절해졌다. 두리번거리며 텅 빈 로커룸을 둘러보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모두 뒤풀이에 갔을 거야. 지금 사용이 가능한 곳은 여기뿐일 텐데, 너도 치어리딩 애들이 쓰던 여자 탈의실에서 씻고 옷 갈아입는 건 별로잖아.”

“……어?”

애슐리의 말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타당했다. 앞뒤가 딱 들어맞는데 뭔가 이상했다.

……뭐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애슐리의 말을 하나씩 되새겼던 코이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

화들짝 놀란 코이가 물었다.

“그러니까, 아이스하키 팀 로커룸 안에 있는 샤워 부스에서 씻고 가자고.”

“그래.”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이의 머릿속이 점차 맑아졌다.

“그, 여긴 칸막이가 되어 있지? 각자?”

한 번 더 물은 코이에게 이번에도 애슐리가 그래,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제야 코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주 웃어 보였다. 이런 얘기였구나.

“그렇구나. 응, 그럼 되겠네.”

지금껏 당황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작은 기대도 역시 사라졌지만 코이는 모르는 체했다.

“코이.”

머리 위에서 애슐리가 그를 불렀다.

“응?”

안도한 코이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애슐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생각 한 거야? 설마 다른 이상한 상상 한 건 아니지?”

“어? 어어?”

순간 허를 찔려 화들짝 놀라는 그의 반응에 애슐리가 다 알겠다는 듯이 야유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응큼하구나, 코이.”

뒤늦게 놀란 코이는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아, 아냐, 아니라고! 그런 생각 아, 안 했어! 정말이야!”

그는 있는 힘껏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애슐리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한껏 배려심 넘치는 남자 친구의 얼굴을 하며 다정하게 코이를 위로했다.

“괜찮아, 코이. 난 네가 야할수록 좋아.”

“아니라니까아!”

코이는 참지 못하고 애슐리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애슐리는 소리 내어 웃더니 곧바로 그를 끌어안았다. 이어서 정수리, 귀, 뺨으로 쏟아지는 키스에 코이는 그대로 멈춰 버렸다.

이번엔 입이겠지…….

코이는 확신하고 두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코까지 내려온 키스는 그 뒤로 도무지 이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기다리던 코이는 계속된 침묵에 결국 불안해져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고 말았다. 그러자 곧 자신을 내려다보는 애슐리와 눈이 마주치고,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또……!

자신이 이번에도 당했다는 생각에 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순간 갑자기 애슐리가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곧바로 코이의 머릿속은 텅 비고,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애슐리는 키스를 계속하며 코이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그 팔에 몸을 맡기고 코이는 열심히 애슐리의 키스에 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래 봤자 입술을 조금 내민 게 전부였지만.

오늘 키스를 가르칠까.

애슐리는 코이의 입술을 슬쩍 핥으며 생각했다. 동시에 팔 안에 있는 몸이 바르르 떨었다. 귀 또한 짧게 까딱이는 것을 확인한 애슐리는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만져도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렇게 예민한 몸을 자신밖에 모른다는 사실에 그는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하나씩 가르쳐 줄 때마다 얼마나 즐거울까.

당장 쓰러뜨려 뼈까지 발라먹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그는 몇 차례 심호흡을 해야 했다. 지금은 아냐. 그는 자신을 타일렀다. 그랬다가는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맛있는 건 아껴 두고 천천히 음미해야지.

혀를 사용하는 법이라든지, 몸의 어디를 만지면 흥분하는지 하나하나 일깨우며 가르칠 생각을 하자 뇌가 저려 왔다. 코이는 우수한 학생이 될 자질이 넘치니까 과정은 더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즐거움은 아껴 두기로 마음먹고 대신 코이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화들짝 놀라는 반응이 품 안에서 역력하게 전해졌다. 문득 애슐리는 코이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한 것이 아쉬워졌다.

감금할 수 있었는데.

슬며시 고개를 든 애슐리는 그때까지 눈을 꼭 감고 있는 코이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키스가 언제 끝나는지도 모른다. 만약 다시 키스를 시작하면 코이는 또 그런 줄 알 것이다.

참지 못하고 코이의 입술에 다시 키스하려던 순간, 그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가 머릿속으로 한참 타이밍을 계산하고 있었을 걸 상상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환하게 웃는 애슐리의 얼굴을 문득 코이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내 남자 친구가 또 나한테 반한 걸까.

기분 좋게 떠올린 애슐리에게 코이가 물었다.

“오늘은 렌즈 안 했어?”

생각지 못한 질문에 애슐리는 멈칫하고 그를 내려다봤다. 코이는 여전히 그의 눈동자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까 처음으로 키스할 때 보긴 했는데 설마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확실했다. 괜찮은 걸까? 혹시 발현한 걸 들키면 곤란해지는 게 아닐까?

“아…….”

애슐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안 했어. 어차피 아무도 신경 안 쓸 테고.”

헬맷을 쓰니까 눈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경기 중의 난투극도 쉽게 벌어지는 스포츠이다 보니 렌즈를 넣지 않는 쪽이 더 나았다. 실제로 오늘 그의 눈동자 색이 변했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아본 건 너뿐이야.”

애슐리의 말에 코이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확 달아오르는 얼굴에 의아해하자 코이가 시선을 내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나랑만, 키스했으니까.”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팔 안에 있던 코이의 몸이 움칠 놀랐다. 애슐리는 그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맞아, 코이.”

코이의 귓가에서 애슐리가 속삭였다.

“내 남자 친구.”

코이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대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

귀에 맥박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지고 손끝이 저릿저릿해졌다. 눈앞에 별이 뜬 것처럼 온통 세상이 반짝이고 머릿속엔 폭죽이 터져 나갔다.

“나, 남자 친구?”

“그래.”

더듬거리는 코이의 말에 애슐리는 선뜻 대답했다.

“난 네 남자 친구고.”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을 코이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같은 단어가 맴돌았다. 남자 친구. 남자 친구. 남자 친구.

“……맞아.”

코이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넌 내 거야.”

말을 뱉은 순간 온몸이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런 코이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은 애슐리가 속삭였다.

“그리고 넌 내 거지.”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이번엔 코이도 타이밍 맞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번 키스에서 코이는 키스를 할 때 애슐리의 목에 팔을 두르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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