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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91/216)

91화

지금껏 몰랐던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까도 좀처럼 죽지 않는 아나콘다 때문에 그는 퍽이나 애를 먹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태라면 정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이게 다 코이가 너무 귀여워서야.

애슐리는 이번엔 코이 탓을 했다. 자신의 이런 강렬한 욕망은 모두 코이의 잘못이라고. 즉시 동의하는 내면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그래, 코이의 죄야.

맞아, 괘씸한 건 코이라고. 아나콘다를 만져 주지도 않아 놓고 한 시간이나 자위를 하게 하다니.

또다시 그의 안에서 의견이 통일되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악마가 속삭였다.

그러니까 감금하자.

“그만, 그만.”

“어?”

갑자기 애슐리가 내뱉은 말에 눈치를 보며 걷고 있던 코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차. 당황한 애슐리는 그를 내려다봤다가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유니폼은 나중에 돌려줄게. ……좀, 젖어서.”

마지못해 덧붙이자 멍하니 그를 보던 코이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샤워실에 있었으니 당연히 젖었겠지.

코이는 대충 생각하고 넘겼다. 그는 설마 애슐리가 유니폼으로 뭘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애슐리의 몸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었으니까. 몸 상태가 얼마나 나쁜 건지 걷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어서 돌아가 쉬는 게 좋겠어.

코이는 생각하며 열심히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에도 애슐리의 머릿속은 온갖 더러운 상상으로 가득했다.

그런 그의 내면 상태를 여전히 모르는 코이는 주차해 놓은 차를 보자 드러내 놓고 안도했다. 뒷좌석에 들고 있던 가방 두 개를 대충 올려놓은 애슐리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네 자전거는 항상 두는 거기에 있지?”

“어? 아냐, 괜찮아!”

코이가 황급히 그를 말렸다.

“오늘은 그냥 가자. 자전거를 누가 가져갈 리도 없으니까.”

그보다 애슐리를 쉬게 하는 게 더 먼저였다. 하지만 카이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코이를 향해 미간을 찌푸려 보인 애슐리는 차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내일 등교는 어떻게 하려고? 걸어서?”

“어…….”

생각지 못한 문제에 코이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러게, 어떡하지? 걸으면 얼마나 걸릴까? 전에도 자전거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걸어서 등교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 30분, 아니 한 시간은 일찍 일어나야 돼.

오랜만에 일찍 일어날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긴장이 됐다. 그것을 깨닫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그새 새 자전거에 익숙해져서는.

에리얼이 준 자전거는 이전에 타던 자신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좋은 제품이었다. 그렇다 보니 성능도 좋아서, 등교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적게 들고 몸도 편했다.

어쩔 수 없지, 하루 정도야.

내심 각오를 하고 고개를 들자 그때까지 차에 기대어 자신을 보고 있던 애슐리와 눈이 마주쳤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코이는 아까 애슐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솔직하게 말했다.

“걸어도 돼, 예전에도 몇 번 그런 적 있으니까.”

결심을 굳힌 그의 표정에 애슐리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눈치만 보는데, 짧은 한숨을 내쉰 애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땐 코이, 남자 친구한테 데리러 오라고 해야지.”

“아…….”

그제야 깨달은 코이가 멍한 소리를 냈다. 애슐리는 그런 그가 귀여워 다시 웃고 말았다.

“그 거리를 걷겠다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버릴걸.”

왜 차가 있는 남자 친구를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할까?

애슐리는 답을 알고 있었다. 누구를 사귀는 게 처음이라 익숙지 않아서겠지. 그것이 정답이라 생각했으나 곧이어 나온 코이의 대답은 달랐다.

“하지만, 네가 더 소중하니까.”

멈칫한 애슐리에게 코이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널 더 빨리 쉬게 해 주고 싶었어.”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코이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애슐리는 잠시 동안 그런 그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코이는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들었다 놓는 말만 할 수 있을까.

그는 또다시 코이에게 반해 버렸다. 매순간 그는 이전보다 더 깊이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코이, 자꾸 그러면 난 정말 널 감금할지도 몰라.”

한숨과 함께 속삭인 말에 코이는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걸 본 애슐리는 이제 됐으니 차에 타라는 듯 손짓을 했다. 뒤늦게 민망해진 코이는 황급히 조수석으로 들어갔다. 선뜻 운전석에 앉은 애슐리가 시동을 걸며 물었다.

“저녁 먹으러 갈래? 많이 늦긴 했지만, 배고프지 않아?”

“어, 어?”

생각지 못한 제의에 더듬거렸던 코이는 잠깐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너희 집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뭐?”

이번엔 애슐리가 되물었다. 고개를 돌려 코이의 얼굴을 본 애슐리가 곧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내 집에 가고 싶어? 적극적이구나, 코이.”

“어?”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박였던 코이는 뒤늦게 의미를 깨닫고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런, 그런 뜻이 아니라!”

“내 남자 친구는 너무 밝힌다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고!”

코이는 당황해 소리가 높아졌다.

“아까도 말했잖아, 네가 피곤해하니까…….”

더 말을 하려던 것을 애슐리는 키스로 막아 버렸다. 갑자기 입술을 빼앗겨 다음 말을 잊어버리고 만 코이가 그저 눈만 깜박이자, 고개를 든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내 집에 가지 않는 게 좋겠어.”

곧 그는 이유를 설명했다.

“단둘이 있게 되면 정말 널 강제로라도 어떻게 해 버릴 것 같거든.”

다른 때라면 농담으로 받아넘겼겠지만 오늘은 절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샤워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그럴듯해, 코이는 잠깐 망설였다.

지금 내가 애쉬의 집으로 가자고 하면 그다음엔 분명히 그렇게 되겠지.

이번에는 그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애슐리는 코이의 의사를 존중했지만 코이로서도 연거푸 그를 거절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코이는 애슐리가 자신을 원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고 있는 것이다. 코이가 준비될 때까지. 코이는 괜한 호기심으로 그런 그를 부추기고 싶지 않았다. 코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그럼 아무 데나 가자. 난 뭐든 좋아.”

코이는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며 덧붙였다.

“네가 먹고 싶은 걸로 먹자.”

……그게 너라는 걸 알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텐데.

애슐리는 물끄러미 코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 코이는 독심술을 배운 게 아닐까?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흔드는 말만 하지?

그것은 당연했다. 애슐리의 머릿속에는 온통 코이와의 이런저런 행위만 가득했으니까. 코이가 만약 바다의 암초가 멋있다는 말을 했다면 애슐리는 거기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코이를 상상했을 것이다.

코이가 냄새를 맡지 못해서 다행이야.

지금 차 안이 애슐리의 페로몬 향으로 가득 찼다. 그만큼 그는 흥분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애슐리는 아버지가 점찍어 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가장 좋은 위치의 테이블을 1년 동안 예약해 두고서 그는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의 반려가 마음에 들어 한다고 판단하는 장소라면 어디에든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런 장소가 한둘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좋아하는지 어쩌는지도 모르면서.

이기적인 남자는 상대를 위하는 것도 아주 그답게 했다. 그가 그렇게 판단하면 그런 것이다. 애슐리 또한 몇 번이나 그런 오해를 받았기 때문에 조금은 상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가 옆에 없는 곳이라면 세상 어디라도 좋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애슐리는 곧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그런 곳은 세상에 없겠지만.

자신은 아버지에게서 벗어났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죽어서도 아버지는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도미니크 밀러의 냉혹한 얼굴을 떠올린 그는 썩 달갑지 않은 기분을 느끼며 지금껏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

“오늘 정말 고마웠어, 애쉬.”

식사를 마치고 항상 코이를 내려 주던 길가에 차를 세운 애슐리에게 코이가 감사의 말을 했다. 애슐리는 조수석에서 내리려는 그를 붙잡고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정말 바래다주면 안 돼? 우린 사귀는 사이잖아.”

“어…….”

그의 말은 너무나 타당했지만 코이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코이는 난처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돼.”

전에는 초라한 집을 보여 주기 싫어서였지만 지금은 또 하나의 이유가 추가되었다. 애슐리를 만나지 말라고 경고했던 아버지가 보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자신이 맞는 건 괜찮았지만 애슐리에게 피해가 가는 건 무서웠다.

“미안해, 애쉬. 하지만 혼자 가고 싶어.”

“하아…….”

거듭된 거절에 애슐리는 더 말하지 못하고 대신 한숨만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코이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기, 애쉬. 부탁이 있는데.”

“뭔데?”

지금이라면 뭐든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코이가 처음으로 자신의 입으로 ‘부탁’이라는 말을 꺼내다니. 즉시 청각을 곤두세운 애슐리에게 코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저, 우리, 사귀는 거…….”

“응.”

코이는 한 차례 마른침을 삼킨 뒤 간신히 말을 꺼냈다.

“당분간, 비밀로 하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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