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216)

101화

“동부라고?”

‘그럼 시차가 얼마나 되지?’ 하고 기억을 더듬는데, 그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애슐리가 말했다.

- 3시간 빨라, 그쪽이.

“……그렇구나.”

그럼 전화 통화를 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시차가 생겨 버리면 상대의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저절로 침울해지는데, 불쑥 애슐리가 물었다.

- 코이,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제안? 코이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뭔데?”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가 주저 없이 말을 이었다.

-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앞으로 쭉 내 집에서 하면 어때?

“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되묻자 애슐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 주말마다 너 아르바이트한다고 못 만나는 것도 그렇고…… 우리 학교에선 제대로 붙어 있지도 못하잖아. 주말에 종일 보고 싶은데, 네가 아르바이트를 하니까 그것도 못 하고.

애슐리의 한숨 소리가 휴대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코이는 미안하기도 하고 그가 안쓰럽기도 해 안절부절못하며 웅얼거렸다.

“그렇긴 한데…… 너랑 있으면서 돈을 받으면, 내가 꼭 그거 때문에 널 만나는 거 같잖아.”

- 물론이지, 난 화대를 지불하겠다는 게 아니니까.

애슐리가 다소 불쾌해하는 어조로 내뱉었다. 순간 당황한 코이에게 그가 말투를 누그러뜨리고 덧붙였다.

- 와서 넌 네 일을 해. 끝날 때까지 난 방해하지 않을게. 대신 끝나고 나면 바로 나랑 놀 수 있잖아. 어때?

그런 거라면 말이 된다. 사실 지금 아르바이트는 끝나고 나서 애슐리를 만나려면 너무 시간이 촉박했다. 고작해야 2, 3시간이 전부니 애슐리가 불만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저기, 그럼…… 일단 이번에 해 보고…….”

어떤 일을 하는 건지도 모르고, 자신이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덥석 하겠다고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코이가 조심스레 말하자 애슐리는 즉시 수용했다.

- 좋아, 그럼 이번 휴일부터 와. 괜찮지?

“어? 어.”

코이는 얼떨결에 대답해 버렸다. 이번 주라고? 그럼 일단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는 당장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다시 일을 구하려면 힘들 텐데…….

그는 잠시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든 이 일을 해 보고 그 뒤에 생각하자.

“응, 그렇게 할게.”

코이가 대답하자 곧 애슐리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 다행이다.

정말로 안도한 것 같은 음성에 코이의 마음도 따뜻해졌다. 무심코 미소를 지으며 그가 물었다.

“내가 너네 집에서 일하는 게 좋아?”

- 물론.

애슐리가 곧 덧붙였다.

- 내가 돌아왔을 때 네가 날 집에서 기다려 줬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자 코이의 심장이 덜컹거리며 바쁘게 뛰기 시작했다. ‘그건 꼭 결혼한 것 같잖아……?’ 하고 내심 생각했을 때, 애슐리가 웃으며 말했다.

- 신혼 같다, 그렇지?

코이는 대답도 못 하고 숨만 거칠게 들이켰다. 애슐리가 또다시 웃음소리를 냈다.

- 좋아해, 코이.

“으, 으응.”

코이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백했다.

“나도, 네가 좋아.”

애쉬가 한층 달콤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 키스하고 싶다.

이러다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다. 코이는 위기감을 느끼며 가슴 한쪽을 부여잡았다.

“나, 나나 나도.”

애슐리가 또 웃더니 “사랑해.”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코이는 이번엔 심호흡을 한 뒤 똑똑하게 말했다.

“나도, 사랑해.”

평소에도 헤어지기 싫어서 몇 번이나 왔던 길을 되돌아갔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전화를 끊기가 싫었다. 코이는 차마 인사를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것은 애슐리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현실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 이제 가야겠어.

한숨과 함께 애슐리가 말했다. 코이는 멍하니 듣고 있다가 뒤늦게 눈을 크게 떴다.

“가다니, 벌써?”

애슐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래, 하고 말했다.

- 바로 3시간 전에 호출을 받아서 지금 공항이야. 곧 비행기가 이륙할 거야. 어서 전화를 끊으라고 하네.

복도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좌석에 앉은 비서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전용기 안에서 마지막 전화를 한 애슐리는 한 번 더 코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뒤 통화를 끝냈다.

코이는 휴대 전화를 잠시 내려다보다 그것을 가슴에 꼭 갖다 댔다. 애슐리의 숨결이 거기에 남아 있기라도 한 듯이.

애슐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화를 끊고도 계속해서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당장 이 모든 짓거리를 때려치우고 달려가고 싶은 것을 애써 참고 있는데, 그가 전화를 끊기만 기다렸던 스튜어디스가 말을 걸었다.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밀러 씨?”

그의 앞에 서있는 스튜어디스에게 애슐리는 감자 칩을 달라고 한 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행기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구분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잘 처리하겠습니다.”

비서의 목소리에 애슐리는 흘긋 그녀를 보고 말했다.

“임금은 제대로 치러 줘. 알고 있겠지만.”

“물론이죠. 밀러 씨는 고용인에 대해서는 금액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비서는 똑바로 그를 응시하며 덧붙였다.

“알고 있겠지만요.”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스튜어디스가 볼에 담긴 감자 칩을 그의 앞에 놓아준 뒤 자리로 돌아갔다. 그대로 대화가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비서가 말을 꺼냈다.

“확실히 밀러 씨의 핏줄이긴 하네요. 대가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니.”

어차피 아버지에게는 거역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냥은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와 작은 반항을 덧붙여 하찮은 거래를 제안한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는 받아들였다. 애슐리는 아버지의 의중이 궁금했으나 어쨌든 자신의 뜻을 관철했으니 상관없다고 넘겨 버렸다.

“배운 게 그것뿐이거든.”

애슐리의 대답에 비서는 피식 웃었다. 곧이어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간 그녀를 무시한 채 애슐리는 계속해서 창밖만 바라보았다.

곧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세 우울해진 기분과 함께 벌써부터 코이가 그리워졌다.

“후아아.”

뜰채로 수영장 수면의 이물질을 모두 걷어 낸 코이는 깊은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체감상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은 이게 다였다. 코이는 일부러 여유 있게 수영장 둘레를 천천히 걸어 다니며 아주 작은 먼지 한 톨이라도 눈에 띄면 뜰채를 밀어 넣었다. 물론 그래 봤자 끝나고 나니 1시간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고작 이걸 하고 그렇게 많은 돈을 받다니.

코이는 새삼 죄책감이 들었다. 처음 일을 하고 돈을 받았을 때, 그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일을 한 시간은 기존의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간의 절반도 되지 않는데 일당은 3배를 받았다. 이렇게 많은 돈을 주다니, 분명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 아니, 제대로 된 금액이란다.

애슐리가 알려 준 대로 자신의 일당을 지급하는 직원에게 전화를 해 물어보자 그는 무심히 대답했다.

- 금액이 적은 건 알겠지만 네가 하는 일이 얼마 안 되어서 어쩔 수 없어. 다음에 밀러 씨가 오면 일을 좀 늘려 달라고 하렴.

“금액이 적다고요? 아, 죄송합니다.”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가 황급히 사과했다. 잘못된 지급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 게다가 그가 애슐리의 친구라서도 아니었다. 담당자의 태도로 보아 이 정도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 누구나 받은 금액인 듯했다. 그나마 많이 받는 것도 아니라니 믿을 수 없었다.

애쉬가 일부러 나한테 많이 준 게 아니구나.

어쨌든 그도 코이가 일하는 만큼 정당하게 값을 지불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무엇보다 애슐리에게 감사해 어서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빨리 보고 싶어.

이 돈이면 대입 재시험은 물론 독립에도 아주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코이는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며 시키지 않은 일도 먼저 나서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애슐리의 방을 청소하는 것만은 매일 빠뜨리지 않고 꼭 했다.

돌아오면 제일 먼저 방에서 쉬고 싶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코이는 수영장 청소를 끝낸 뒤 저택 안으로 들어가 간단히 손발을 씻고 애슐리의 침실로 향했다.

먼저 침대의 먼지를 떨어낸 후 가지런히 정돈을 한 뒤 타조 털로 된 먼지떨이를 들고 가구 여기저기를 털어 내기 시작했다. 애슐리가 쓰는 공간이라고 생각하자 더욱 애착이 가, 그는 평소보다 더 힘을 내서 청소를 했다. 의욕이 과해 사이드 테이블 뒤의 먼지도 없애려고 막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아, 으앗!”

순간 균형을 잃고 테이블이 휘청거렸다. 코이는 다급하게 그것을 붙잡아 쓰러지는 것을 면했으나 그만 헐거워진 서랍이 쑥 밀려 나오고 말았다. 놀라 고개를 돌렸던 코이는 그대로 시선을 멈추고 말았다. 서랍 안에는 한 무더기의 콘돔이 쌓여 있었다.

“어…….”

잠시 동안 그의 뇌가 그대로 정지했다. 내가 뭘 본 거지. 코이는 눈만 크게 뜬 채 굳어 버렸다. 누군가 이렇게 많은 콘돔을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애슐리에겐 콘돔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누군가가 애슐리일 줄은. 최소 몇 박스는 될 것 같은 양에 고작해야 한 팩을 사 온 게 전부였던 코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 많이 뭐에 쓰려고.

용도야 뻔했다. 거기다 사이드 테이블 서랍에 이런 걸 놔두는 이유는 간단하고도 당연했다. 그래야 그런 분위기가 됐을 때 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거야 그렇겠지만.

떨리는 손으로 콘돔을 집어 든 코이는 무심코 다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사이즈였다. 이렇게 큰 콘돔은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산 최대 사이즈 콘돔은 이것에 비하면 아기나 다름없었다.

“히익…….”

사색이 되어 숨을 삼켰을 때였다. 갑자기 휴대 전화의 벨 소리가 울려 퍼져 코이는 황급히 꺼내 들었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다.

애슐리로부터 온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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