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216)

103화

- 그렇지?

애슐리가 즉각 반응했다. 코이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어캣도 굉장히 크구나.”

그 말에 애슐리는 멈칫했다. 뭔가 생각했던 것과 반응이 달랐다.

- …귀엽지 않아?

사이를 두었다가 나온 물음에 코이가 대답했다.

“꼬리까지 50센티인걸.”

이번에는 애슐리가 말이 없어졌다. 이런 망할, 멍청한 놈! 미어캣한테는 꼬리가 있었어! 꼬리가 있었다고!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마구 때리고 싶은 걸 참고 그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 몸통만 계산하면 절반도 안 될 거야.

“꼬리까지 넣어야 할 거 같은데?”

- 코이.

고정 관념을 깨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자신이 코이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더 치밀한 작전이 필요하다. 애슐리는 일단 지금은 물러나기로 하고 급히 말을 바꿨다.

“크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렇지?”

그렇다고 해, 빨리.

속으로 다그치는 애슐리에게 코이가 어째선지 머뭇거렸다. 뭔가 이상한 낌새에 애슐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코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애쉬가 눈치챘어.

코이는 심상치 않은 그의 반응에 지레 겁을 먹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또 심장이 쿵쾅거렸다.

“저기, 그게.”

코이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어렵게 고백했다.

“나도, 사긴 했는데, 저기, 잘못 산 것, 같아서.”

- 뭐?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코이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억지로 소리를 내어 말했다.

“나, 나도 사, 샀다고, 콘돔.”

한동안 건너편에서는 말이 없었다. 코이는 어색한 침묵을 참지 못하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그런데 자, 잘못 산 거 같아. 환불하기는, 늦었고.”

여전히 애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이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애쉬……?”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 콘돔을 샀어? 네가?

목소리에 웃음이 가득했다. 평소 낮은 그의 음성이 다소 높게 느껴졌다. 애슐리가 기뻐한다는 걸 여실히 알 수 있어서, 코이는 민망하기도 하고 안도되기도 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응.”

- 아, 코이.

그가 뭔가를 중얼거렸다. 코이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애슐리는 욕설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난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 코이가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을 텐데.

- 코이, 네가 그걸 산 건…… 그런 뜻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어, 응.”

코이는 마른침을 삼킨 뒤 대답했다.

“준비, 했어.”

- 하아아…….

이번에는 한층 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애슐리는 당장 공항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러야 했다. 그가 심호흡을 반복하는데, 코이가 말을 이었다.

“저기, 그런데 난 팩 하나만 샀거든. 이렇게 많이 필요한 줄 몰랐지…….”

우물쭈물 사그라드는 목소리에 다시금 입가를 허물어뜨리며 웃었던 애슐리가 문득 깨달았다.

- 하나만 샀다고?

“어, 응.”

별생각 없이 대답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웃음이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 네 건 안 사고?

“어…….”

뒤늦게 코이는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 건 왜 안 샀지?

건너편에서 애슐리가 잔뜩 짓궂은 음성으로 야유했다.

- 코이, 너무 야해.

"아, 아니 나는, 그러니까 나는."

코이는 다급하게 부정하려 했으나 머릿속이 완전히 뒤엉켜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아나콘다를 만지는 것만 생각했지 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걸.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저기, 저기 말을 더듬기만 하는 코이의 반응에 애슐리는 또다시 소리 내어 웃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코이가 그를 위해 부끄러움을 참고 콘돔을 고르는 모습을 상상하자 그 사랑스러움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 뭐라고 그러면서 샀어?

애슐리의 물음에 코이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저기, 그냥…….”

- 얘기해 줘, 코이.

애슐리가 조르는 데에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코이는 띄엄띄엄 대답했다. 콘돔을 잘못 발음했던 대목에 이르렀을 때 애슐리는 간신히 참았으나 사이즈를 고르다 실수를 저지른 부분에서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코이는 얼굴이 새빨개져 발을 구르고 말았다.

“네가 자꾸 나한테 아나콘다라고 해서 실수해 버렸다고!”

세뇌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애슐리의 그것을 떠올리며 말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아나콘다라고 해 버리고 말았다. 그 뒤 찾아왔던 침묵의 무게를 떠올리면 지금도 도망가 버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코이는 내친김에 또 물었다.

“대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하나 사는 것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대체 애슐리는 어떻게 이렇게 많이 사서 쟁여 놨을까.

코이의 궁금증에 애슐리는 질문으로 답했다.

- 왜일 거 같아?

여전히 웃음이 가득한 음성에 코이는 멈칫했다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여자 친구가 그렇게 많았어……?”

- 바보야.

풀이 잔뜩 죽어 자신감 없이 묻자 곧바로 애슐리가 핀잔을 줬다.

- 너랑 쓰려고 산 거잖아.

코이는 눈이 휘둥그레져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 이렇게나 많이?”

다시금 웃음소리를 흘린 애슐리가 말했다.

- 그래, 내가 얼마나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제 알겠어?

너와 자고 싶을 때마다 샀어. 그는 마지막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코이를 이 이상 놀라게 했다가는 기절해 버릴지도 모른다. 애슐리는 남자 친구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코이를 데리고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다.

- 하아.

다시금 끓어오르는 속을 참지 못하고 애슐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칼을 이마 뒤로 쓸어 넘기며 그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 바깥이었으면 이것저것 해 보라고 시켰을 텐데, 아쉽다.

“뭐, 뭘?”

코이가 황급히 묻자 애슐리는 글쎄, 하고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 다음엔 나랑 같이 사러 가, 코이.

그는 코이가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대답했다.

- 네 마음에 드는 게 중요하니까.

사실 시판하는 콘돔 중에서 그의 사이즈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애슐리는 코이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많은 콘돔 중에서 하나를 어렵게 고르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코이는 애슐리가 사용할 건데 왜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틈이 없었다. 애슐리의 주변에서 말소리가 들리고, 어딘지 분주한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어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럼 코이, 또 전화할게.

“애, 애쉬, 애쉬!”

코이는 끊어지려는 전화를 다급하게 소리쳐 붙잡았다. 건너편에서 애슐리가 그래, 하고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코이는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 와……?”

전화만으로는 부족했다. 너무나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기껏 용기 내서 콘돔까지 사 왔는데 아무 쓸모도 없게 되다니. 속상해하는 코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 나도 보고 싶어, 코이.

‘후’ 한숨을 내쉰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 아직은 모르겠어. 아무튼 최대한 빨리 갈게.

“으응…….”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코이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애슐리가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이번엔 화제를 돌려 말을 꺼냈다.

- 코이, 할 일은 다 끝났어?

“응, 거의 다.”

이번엔 빠르게 대답했던 코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넌 지금 뭐 해?”

애슐리는 당연한 듯이 대답했다.

- 선물 사고 있지.

“선물?”

가족들에게 줄 연말 선물일까? 지레짐작하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덧붙였다.

-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어…….”

뜻밖의 대답에 코이는 말을 더듬거렸다.

“나, 나를 위한 선물을 사고 있다고?”

- 그래.

애슐리는 웃음이 서린 음성으로 코이를 달랬다.

- 그러니까 외로워도 조금만 참아. 알겠지?

그는 더없이 다정했으나 그래서 코이는 더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선물은 없어도 돼, 난 너만 있으면 충분해.

코이는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참고 대신 무난한 인사로 대신했다.

“응, ……기다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애슐리는 다정하게 말했다.

- 걱정 마, 빨리 갈 거야.

그리고 그는 전화를 끊기 직전에 덧붙였다.

- 바람피우지 마, 감금해 버릴 테니까.

“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말문이 막혀 버렸지만 굳이 대꾸 할 필요는 없었다. 코이는 웃음소리를 남기고 끊어져 버린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다 허전함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저, 밀러 씨.”

화면이 꺼진 휴대 전화를 보고만 있는 애슐리에게 매니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VIP 룸에 혼자 앉아 전화를 하고 있던 손님이 통화를 끝내기만 기다린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하신 물건이 전부 준비가 되었는데, 지금 보여 드려도 될까요?”

그 말에 애슐리는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들이 보석이 가득 담긴 벨벳 상자를 줄을 지어 들고 왔다. 테이블 위에 상자를 늘어놓은 매니저가 확인하듯 물었다.

“결혼반지를 보겠다고 하셨죠?”

애슐리는 상자 안에 놓인 수많은 반지를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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