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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4/216)

104화

“감사합니다, 또 와 주십시오.”

거리까지 나와 인사를 하는 매니저와 직원들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돌아섰다. 대기하고 있던 운전사가 즉시 주차해 둔 차의 뒷문을 열었으나 애슐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입을 열었다.

“먼저 가세요. 좀 걷고 싶으니까.”

나이가 지긋한 운전사는 당황해 눈을 깜박이며 옆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줄곧 애슐리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두 경호원이 서로 눈짓을 했다.

“연락드릴 테니 주변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한 명이 말하자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로 돌아갔다. 애슐리는 그런 그들을 내버려 두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애슐리 못지않은 덩치의 사내 둘이 얼마간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따라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는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이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동부에 온 이후 그의 생활은 감옥 그 자체였다.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원하는 삶을 살고 있던 애슐리에게는 지옥 같은 매일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고, 아버지와 아침식사를 하고, 점심이 되면 혼자 힘으로 침대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그’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저녁쯤 되면 어딘가의 파티나 모임에 참석했다.

종일 애슐리는 파티나 모임에 갈 준비를 했는데, 파티의 호스트가 어떤 사람들인지, 직업이 뭔지, 사업을 한다면 그 회사에 대한 것까지 모두 숙지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드러내 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일부러 아버지의 비위를 거스를 만큼 애슐리는 멍청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코이에게 돌아가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했다. 아무 말 없이 순종하며 지시하는 일은 모두 해냈다. 밤을 새워서라도.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애슐리는 여기서 대입 준비까지 시작했다. 어차피 12학년이 되면 모두가 입시 준비로 바쁘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두와 같은’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남들보다 몇 배로 뛰어나야 했다. 그리고 애슐리는 불행히도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바대로 아버지는 애슐리가 자신과 같은 대학에 가기를 원했다. 따라서 애슐리는 동문이라는 사람들을 벌써부터 만나 수시로 대학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쁜데 프랑스어 공부까지 시작했다. 이미 탁월한 스페인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물론 아버지를 만족시키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아마 프랑스어가 웬만큼 갖춰지면 그때는 독일어를 배워야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을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가는 데다, 서부보다 3시간이나 빠르다 보니 코이에게 전화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짬을 내 보면 코이가 잘 시간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오늘처럼 작정을 하지 않으면 도무지 자신의 시간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애슐리는 오늘 하루를 비우기 위해 며칠 전부터 죽을힘을 다했다. 자신에게도 휴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필하고, 프랑스어는 밤을 새워 진도를 따라잡고 미리 예습까지 마쳤다. 그리고 그렇게 간신히 단 하루의 휴가를 얻게 된 것이다.

아.

문득 뺨에 닿은 차가운 감각에 애슐리는 고개를 들었다가 곧 이유를 깨달았다. 한두 송이 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몇 년째 서부에 머물다 온 터라 수시로 내리는 눈이 아직은 생소했다.

애슐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잠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회색 구름이 꾸물거리는 흐린 겨울하늘은 이곳에 온 뒤 수시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아…….

일부러 길게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는 애슐리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겨울에도 티 없이 맑았던 서부의 하늘이 떠올랐다. 뒤이어 언제나 자신의 품에 뛰어들던 코이에 대한 그리움이 되살아나 애슐리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일은 크리스마스였다. 추수감사절만 끝나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기대는 이미 깨어진 지 오래였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곧 신년이다. 아마 애슐리는 새해도 코이와 함께 보낼 수 없을 것이다.

설마 이대로 영원히 날 보내 주지 않을 생각인 건 아니겠지.

애슐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면 아직 1년이 남았다. 그는 어떻게든 뜻을 관철해서 코이에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꼭 기다려 줘, 코이.

내심 그에게 당부했던 애슐리는 자신이 예약을 하고 온 반지를 떠올리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플래티나로 만들어진 링은 중앙에 제법 큰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고 양쪽으로 작은 다이아몬드가 일렬로 줄을 지어 있었다. 

단순한 디자인의 반지를 두 개 산 그는 각각의 반지 안쪽에 코이와 자신의 이름을 새겨 달라고 주문했다.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 사이즈에 맞춘 반지에는 코이 이름을, 대강 코이의 치수라고 짐작해 만든 반지에는 애슐리의 이름을 넣기로 했다. 이로써 둘은 완전히 서로의 것이 되는 것이다.

코이에게 이 의미를 알려 주면 뭐라고 할까.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할 그를 떠올리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아쉬운 것은 연말인 데다 주문이 밀려 있어 최대한 서둘러도 한 달여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안달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은 점차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코이는 이렇게 많은 눈을 본 적이 없겠지. 연말이면 항상 요란한 행사를 하는 교차로를 떠올리며 그는 언젠가 코이를 데리고 이곳에 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에는 겨우살이 밑에서 키스를 해야지. 연말이 되면 카운트다운을 함께 외치고, 새해가 되면 곧바로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출 거야. 그리고 속삭여야지.

해피 뉴이어, 코이.

코끝이 빨개져 자신을 향해 웃는 코이를 떠올리자 그의 기분은 한결 좋아졌다. 후우, 깊은 숨을 뱉어 낸 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신호등 앞에 선 애슐리의 뒤에서 경호원들 또한 멈춰 섰다. 애슐리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들을 돌아봤다.

“차를 불러요.”

경호원들은 재빨리 운전사에게 연락을 했다. 주변에서 떠돌고 있을 차를 기다리며 애슐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 하얀 눈은 계속해서 떨어졌지만 사람들은 그저 지나칠 뿐이었다. 어느새 그의 머리와 어깨에 수북이 눈이 쌓여 갔다.

“또 파티라고?”

애슐리가 묻자 아버지의 비서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어쩌지 못하고 깊이 내쉬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연말이니 모임이 많습니다.”

“그렇겠지.”

애슐리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그 말에 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어서 돌아가고 싶은 이유라도 있는 모양이죠?”

그녀의 일은 애슐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버지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분명 코이에 대해서도 알 텐데 시치미를 떼는 건지 뭔지 알 수 없는 물음에 애슐리는 그저 미간만 찌푸려 보였다. 비서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걸 알고 있는 건 밀러 씨뿐이겠죠. 전 전달할 뿐이니.”

애슐리는 그녀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대신 사과했다.

“……당신한테 짜증을 낼 생각은 없었어.”

“괜찮습니다. 밀러 씨가 제게 높은 급여를 제공하는 건 근거 없는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것도 포함되어서니까요.”

비꼬는 건가, 싶었지만 말투가 너무 사무적이라 진실을 말하는 듯도 했다.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애슐리는 떠올렸다.

하긴, 내가 굳이 저 사람의 생각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거지.

어차피 비서는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애슐리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면 된다.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다만 어서 놔주기만 바라면서.

“1월 첫날 파티가 있을 거예요. 정확하게는 12월 마지막 날이지만.”

비서의 말에 애슐리는 자동적으로 떠올렸다. 새해를 맞이하는 파티겠군, 하는 것과 역시 그때까지도 코이에게 돌아가지 못하는구나, 라는 것을.

비서는 테이블 위에 한 주의 스케줄이 적힌 종이를 올려놓고 말했다.

“아주 중요한 파티니까 특히 신경을 써야 할 거예요. 그 날은 밀러 씨는 가지 않아요, 당신만 참가합니다.”

“나만? 어째서?”

애슐리가 찌푸린 얼굴로 묻자 비서는 여전히 사무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만 참석하면 되는 파티이니까요.”

“……하.”

내가 뭐 하러 물었을까. 약간의 후회를 떠올리며 그는 잠자코 스케줄 표를 집어 들었다. 매일 비슷한 낯익은 스케줄이었으나 12월 31일은 파티 외에는 텅 비어 있었다.

“……많이 중요한 자리야?”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막 나가려던 비서가 문의 손잡이를 잡고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극알파로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자리죠.”

그리고 그녀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애슐리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스케줄 표를 들여다보다 이내 그것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는 생각했다. 어서 빨리 코이에게 돌아갈 수 있게만 해 줘.

이 정도면 오래 버텼다. 저 파티만 끝나면 돌아갈 것이다.

이제 일주일만 더 참으면 돼.

그는 스스로를 위안하며 눈을 감았다.

“보고 싶다, 코이.”

자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맥없이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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