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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105/216)

105화

파티가 있는 날은 평소보다 더 하늘이 흐렸다. 잔뜩 눈이 퍼부어질 것처럼 먹구름이 일렁이는 하늘에 애슐리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커프링크스를 달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고정하자 옆에 서서 시중을 들던 집사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지긋한 여성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애슐리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하던 일을 마저 끝낸 뒤 집사가 준비해 둔 재킷을 입자 곧바로 고용인들이 그의 앞에 전신 거울을 가져왔다. 애슐리는 거울 안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마지막 마무리를 한 후 고개를 돌렸다.

이제 준비는 모두 끝났다. 방 안을 가득 채웠던 물건들을 재빨리 들고 나가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집사가 물었다.

“아직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는데요. 차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덧붙이자 그녀는 미소를 지은 뒤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드디어 혼자가 된 애슐리는 막혔던 숨을 내쉰 뒤 털썩 의자에 앉았다. 대체 무슨 파티이길래 이렇게 요란을 떨까. 두통이 밀려와 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지금껏 참석한 파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루 종일 준비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피를 뽑는 것부터 시작해 온갖 광대 짓은 다했다.

〈여기 온 뒤 건강검진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대체 이건 뭐냐고 물은 애슐리에게 아버지의 비서는 간단히 말한 뒤 피를 채취한 의사와 함께 나가 버렸다. 그 뒤엔 바로 아침 식사를 하고, 전신 마사지를 받고, 점심 식사를 한 뒤 헤어 스타일링과 손톱 정리를 끝내고 면도까지 다시 했다. 

정신없이 끌려 다닌 다음 방으로 돌아오자 몇 벌의 정장과 액세서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렇게까지 준비하는 건 처음이야.

애슐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혔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천둥소리가 들린 듯했다.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였던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휴대 전화를 찾았다. 다행히 코이가 있는 쪽은 아직 낮이었다.

- 애쉬.

벨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건너편에서 반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신만큼이나 기쁨이 가득한 음성에 애슐리는 입가가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 코이. 잘 지냈어?”

- 으, 으응.

코이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 별로, 못 지냈어.

“왜?”

답을 알면서도 애슐리는 물었다. 역시나 코이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 네가 없잖아…….

아, 코이.

애슐리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심호흡을 했다.

“미안해, 크리스마스에도 혼자 있게 해서.”

- 응…….

코이는 조심스레 물었다.

- 많이 바빴어……?

“응.”

정말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바빴지. 애슐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오늘 파티를 마지막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자신은 할 만큼 했다.

거듭 다짐하며 애슐리는 입을 열었다.

“미안, 선물은 못 가져갈 것 같아. 연말이라 주문이 밀렸대.”

최대한 빨리 해 달라고는 했지만 굳이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해방되는 즉시 코이에게 달려갈 것이다. 반지는 서부의 지점으로 보내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완성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코이를 만나는 게 먼저였다.

하루라도 빨리 너에게 돌아가고 싶어.

- 괜찮아.

코이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 뭘 샀는지 모르지만 없어도 돼. 나는…….

잠깐 사이를 뒀다가 코이가 조그만 소리로 고백했다.

- 네가 가장 큰 선물이야.

“나도 그래.”

애슐리는 넘치는 애정을 참지 못하고 즉시 말을 받았다.

“내 인생에서 너만큼 큰 선물은 없어.”

희미하게 떨리는 자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후, 흔들리는 숨을 뱉어 내자 건너편에서 코이가 물었다.

- 정말?

두 눈을 반짝이며 빨갛게 물든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코이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애슐리는 만면에 가득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

- 다행이다.

코이의 음성을 듣자 애슐리는 계획을 수정했다. 오늘 파티가 끝나고 바로 공항으로 가자. 아버지에게는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사고 난 뒤에 전화를 하면 된다. 애슐리는 더 이상 코이를 보지 못하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코이.”

- 응.

즉시 돌아온 대답에 애슐리는 빠르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줘. 곧 돌아갈게.”

- 알았어.

코이는 언제나처럼 순순히 대답했다.

- 걱정하지 마, 난 항상 널 기다릴 테니까.

어째선지 애슐리는 코끝이 찡해졌다. 황급히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는데, 문득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갈 때가 된 모양이었다. 애슐리는 당장 달아나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자신을 타일렀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한 번만 더 참으면 돼.

“코이, 이제 그만 끊어야겠어.”

- 응…….

코이 역시 아쉬운지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당장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참고 애슐리는 다정하게 그를 위로했다.

“곧 만날 수 있어, 코이.”

- 응.

코이는 이번엔 힘을 주어 대답했다.

- 기다릴게.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 더 이상 애슐리는 시간을 끌지 못하게 됐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집사가 들어왔다.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이에요.”

애슐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 전화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집사의 뒤를 따라 복도를 지나 홀에 들어서자 아버지의 비서와 고용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차례 애슐리의 정장을 훑어본 비서가 얼굴로 시선을 고정하더니 입을 열었다.

“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가죠.”

“잠깐만.”

출발하기 전 애슐리는 먼저 조건을 내걸었다. 협상이란 일을 하기 전에 끝내야 하는 것이다. 굳이 파티가 끝난 후 도망칠 필요가 없었다. 지금 비서를 통해 아버지에게 답을 얻어 내면 되지 않는가?

“파티가 끝나면 즉시 돌아가겠어.”

비서가 입을 열기 전에 애슐리가 먼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 했어, 충분히, 넘칠 만큼. 이제 나도 지쳤어, 돌아가겠어.”

그는 최후통첩을 했다.

“그걸 약속하지 않으면 파티에 가지 않겠다고 전해.”

비서는 물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그녀는 한동안 애슐리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휴대 전화를 꺼냈다. 

애슐리가 보는 앞에서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렸던 그녀가 곧 입을 열었다. 애슐리는 자신이 꺼낸 제안을 그대로 읊는 그녀의 입을 내심 긴장하며 지켜보았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을 한 비서가 전화를 끊고 애슐리를 올려다보았다.

“가도 좋다, 라고 하셨습니다. 단.”

애슐리가 미처 기뻐하기도 전에 먼저 그녀가 조건을 내밀었다.

“이번 파티를 제대로 치러 낸다면.”

“……물론이지.”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스쳐 갔으나 애슐리는 깊이 생각 할 여유가 없었다. 코이를 곧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 다른 건 떠올리지도 못했다. 비서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더니 먼저 몸을 돌려 현관으로 걸어갔다. 애슐리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뒤를 따랐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제 돌아가는 거야.

코이.

차를 타고 파티가 있는 외곽의 저택으로 달려가는 동안에도 애슐리는 내내 마음이 들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서는 그런 그를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

파티가 있는 저택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가 좀 넘어서였다. 저녁때가 다 되었기 때문에 배가 고팠지만 애슐리는 일단 참기로 했다.

비행기에서 먹으면 돼.

하다못해 이륙 준비를 하는 동안 VIP 대기실에 준비된 다과를 먹어도 된다. 아마 아버지는 파티가 끝난 뒤 상황을 확인한 후 그에게 전용기를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을 해 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먹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파티를 완벽하게 치르는 것만 생각하자. 자신에게 다짐한 뒤 애슐리는 차에서 내렸다. 먼저 온 손님들의 경호원과 비서들이 넓은 정원 여기저기에 주변을 살피며 서있었다.

……뭐지?

애슐리는 뒤늦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저택이나 주차돼 있는 고가의 자동차들이나 곳곳에 보이는 손님들의 모습은 지금까지 파티에서 본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어째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그는 걸음을 옮겨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수없이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가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는 홀에서 저택의 집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애슐리 밀러 씨, 오늘 파티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도 있게 인사를 한 그가 앞장서서 안내를 했다. 애슐리는 뒤따라 걸음을 옮기며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음에 집중했다.

……이상해.

위화감은 점점 더 커졌다. 심장이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대체 이건 뭘까. ……왜 자꾸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이곳입니다.”

집사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애슐리가 고개를 들자 마침 그가 문의 손잡이를 잡고 끌어당겼다. 

이음새가 맞지 않는 경첩의 불쾌한 소음이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가 싶더니 이어서 요란한 신음과 게걸스러운 웃음소리가 뒤엉켜 귀를 멍하게 만들었다. 잠시 애슐리는 넋을 잃은 채 눈을 크게 떴다. 벌어진 시야에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이게 뭔지 떠올릴 틈도 없이 무심코 숨을 들이켠 순간 처음 맡아 본 향기가 먼저 그를 사로잡았다.

“헉…….”

애슐리는 그만 숨을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온몸에 힘이 풀리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고 맥박이 소용돌이친다. 숨이 가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패닉에 빠진 머릿속으로 그는 간신히 기억을 더듬었다. 이게 뭔지 애슐리는 알고 있었다. 단 한 번 경험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발현은 평생에 한 번뿐이다. 그렇다면 이건.

“러트예요.”

아버지의 비서가 머리 위에서 말했다. 언제나처럼 냉정한 음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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