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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106/216)

106화

애슐리는 잠시 동안 자신이 뭘 들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허억, 허억, 거친 숨만 들썩이던 그가 간신히 고개를 들자 곧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서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피검사를 했던 거 기억하시죠?”

애슐리는 그저 헐떡이며 듣기만 했다. 비서가 말을 이었다.

“페로몬이 위험 수치만큼 쌓였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처리한 적이 없었던 거겠죠. 러트가 오는 게 당연해요.”

“그럼, 이건…… 대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것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페로몬과 생소한 향기가 뒤엉켜 주변을 온통 떠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생소한 향기는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게 했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고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연거푸 숨만 몰아쉬며 간신히 소리를 낸 애슐리에게 비서가 말했다.

“페로몬 파티입니다, 극알파들의.”

그게 뭔지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보기만 하는 애슐리에게 비서가 입을 열었다.

“밀러 씨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애슐리는 천천히 움직이는 붉은 입술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마치 느린 화면처럼 천천히 입술이 달싹거렸다.

“주니어.”

〈주니어.〉

남자의 서늘한 음성이 귓가에 되살아났다. 비서가 계속해서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쌓인 페로몬을 모두 빼고 오렴.”

그가 애슐리를 향해 웃었다. 매캐한 시가 향기와 함께 죽도록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되살아났다.

〈새해 선물이란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애슐리는 욕설을 내뱉으며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나 온 힘을 다해 일어난 순간 다시 휘청거리며 무너지고 말았다. 복도를 지키고 있던 가드가 두 명 다가와 그의 양옆에 섰다. 여차하면 바로 제지를 하려고 대기하는 가드 사이에서 비서가 입을 열었다.

“극알파들의 페로몬이 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고 있죠? 그게 쌓이면 어떻게 되는지도요. 그러니까 그 페로몬을 미리 빼 주기 위해서 자리를 마련하는 거예요, 정기적으로.”

분명히 그녀가 말을 하고 있는데 애슐리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페로몬이, 뭐라고? 여전히 멍한 얼굴에 비서 역시 그의 상태를 눈치챘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할 얘기만 계속했다.

“페로몬을 빼기 위해선 여러 방법이 있긴 하지만 이보다 더 확실하고 효율적인 게 없죠. 바로 섹스 말이에요.”

비서가 일부러 보란 듯이 한 차례 홀을 둘러보았다. 애슐리 또한 홀린 것처럼 그녀의 행동을 따라 했다. 비서는 엉망으로 뒤엉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메가는 얼마든지 있으니 가서 해결하도록 하세요. 그러라고 모인 자리니까. 괜찮아요, 밀러 씨. 어차피 곧 페로몬 때문에 완전히 의식이 없어질 거예요. 그러면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일 겁니다.”

하아, 하아. 애슐리는 계속해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아까부터 그녀가 계속 말을 하고 있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를 가득 채우는 이 지독한 향기가 그를 점점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본 비서가 가볍게 충고했다.

“이 자리엔 극오메가도 하나 있다더군요. 극오메가가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지 당신도 아시죠? 기회를 잘 활용하도록 하세요.”

“잠깐, 만…….”

애슐리는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온몸의 힘이 풀려 도저히 손을 내밀 수조차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성을 잃지 않도록 애쓰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본 비서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그녀가 등을 돌려 걸어가고, 마치 그것이 사인이라도 된 듯 가드들이 애슐리를 양쪽에서 붙잡아 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 돼……!”

애슐리가 소리쳤으나 문은 굳건히 닫혀 버렸다. 그리고 그는 실내를 가득 채운 페로몬 향기 속에 그대로 남겨지고 말았다.

“음음음, 음음음음.”

코이는 열심히 청소를 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곧 새해가 된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르바이트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해 두었다. 물론 아버지는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였으나 굳이 듣기 싫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요즘 같기만 하면 모두 좋겠어.

코이는 생각하며 쿠션을 탕탕 두드려 먼지를 떨어냈다. 모두가 평화로웠다. 아르바이트 수입도 늘었고 대입 시험 준비도 순조롭다. 코이는 지금껏 살아온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단 하나만 빼고.

애쉬가 없어.

그를 떠올리자 지금껏 들떴던 기분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혹시 오늘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아버지에게 거짓말까지 하고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역시나 허튼 기대였다.

설날 지나서 온다고 했었잖아, 바보같이.

뻔히 애쉬와 통화를 해 놓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다니 자신이 한심해졌다. 움직임을 멈추자 거대한 저택은 일시에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이런 시간에 혼자 여기에 남아 있는 건 처음이라 코이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렇게나 조용한 곳이구나.

항상 애슐리를 혼자 두고 돌아갔던 걸 떠올리자 마음이 아파졌다. 애쉬는 항상 여기서 혼자 지냈던 거구나.

얼마나 외로웠을까…….

새삼 마음이 아파져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거기에는 가족들과 함께일 테니까. 애슐리는 가족에 대해서 썩 좋은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여기서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물론 여기 있었다면 코이와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함께 보냈겠지만 다른 날은 줄곧 혼자 지내지 않는가.

거긴 그래도 매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니까…….

반대로 코이는 그가 없는 내내 혼자였다.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이나 치어리딩 팀 아이들과 계속해서 우정을 이어 나가고는 있었지만 그들도 휴일에는 항상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그 때문에 코이는 혼자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애쉬와 난 같구나…….

새삼 깨닫고 나니 더욱 외로워졌다. 결국 그는 작은 소리를 내어 속삭이고 말았다.

“보고 싶어, 애쉬.”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황급히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갑자기 요란하게 휴대 전화의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라 다급하게 전화를 꺼내 든 코이의 눈이 커졌다.

“애쉬?”

*

반갑게 소리치는 그리운 목소리에 애슐리는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가쁜 숨결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정신이 없는 이유는 그게 아니다. 

가뜩이나 쌓여 있던 페로몬이 오메가의 향을 맡고 그대로 폭주해 러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배 속이 뜨겁고 숨이 가빠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좁은 실내에 구겨지다시피 주저앉아서 숨을 몰아쉬며 말을 꺼냈다.

“코이.”

간신히 이름만 중얼거리자 건너편에서 코이가 기뻐하며 말했다.

- 애쉬, 어떻게 된 거야? 새해 인사하려고 전화했어?

……뭐?

애슐리는 사이를 뒀다가 휴대 전화에서 귀를 떼고 시간을 확인했다. 곧이어 코이가 물었다.

- 많이 피곤할 텐데, 여기 시간에 맞춘 거야? 그쪽은 지금 새벽 3시잖아.

아아……. 그제야 납득한 애슐리는 잠시 숨을 가다듬은 뒤 대답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애슐리는 잦아드는 숨결 사이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해피 뉴 이어, 코이.”

- 해피 뉴 이어.

코이의 음성에 기쁨이 가득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애슐리 또한 행복해지는 듯했다. 머릿속은 페로몬에 절어 어딘가에 이걸 쏟아 내고 싶다는 생각뿐인데, 코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열망이 그것을 억눌렀다.

“……지금 네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야.”

- 뭐?

코이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애슐리는 웃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이 없었다.

“반지를, 샀어, 코이.”

헐떡이는 숨결 사이로 흘러나온 음성에 코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반지?

“그래.”

후우우, 떨리는 숨소리가 휴대 전화의 송화구를 떨게 했다.

“지난번 청혼이, 정말 엉망진창이었지?”

몽롱한 의식 사이로 애슐리는 떠올렸다. 그때가 언젠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그렇게 오래됐었나?

“이번에 널 만나면, 무릎 꿇고 정식으로 청혼하려고, 했는데.”

- 애쉬……?

코이가 머뭇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 정도 되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코이 또한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은데, 애슐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코이.”

- 응.

황급히 돌아온 대답에 애슐리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결혼해 줘, 코이.”

그의 음성이 제어되지 않아 계속해서 흔들렸다. 자꾸만 부서지는 숨소리에 코이는 마른침을 삼킨 뒤 대답했다.

- 응.

“……좋아, 해, 코이.”

- 나도 좋아해.

코이는 힘을 주어 말했다.

- 아니, 사랑해, 애슐리 밀러.

애슐리는 그제야 힘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코이는 참지 못하고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막 입을 열었으나 그 전에 애슐리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그는 휘청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간신히 손을 뻗어 주변을 더듬거리자 변기가 만져졌다. 애슐리는 고개를 기울여 그 안에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외딴 곳에 홀로 위치한 버려진 주유소의 더러운 화장실 개인 칸에서 엉망으로 구겨진 채 의식을 잃은 그를 비서가 발견한 것은 대략 30분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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