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216)

107화

속이 메스껍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그것이었다. 하나의 감각이 살아나자 이어서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혈관을 따라 뭔가가 기어 올라오면서 장기 곳곳을 물어뜯는 것 같다. 코 안쪽에서는 악취가 나고 머리는 쪼개질 듯이 아픈데 현기증까지 일어났다. 배 속이 요동치고 구역질이 올라와 자꾸만 끅끅대며 거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헐떡대며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제대로 뭔가가 보이질 않았다. 안간힘을 써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 나서야 비로소 초점이 맞아들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낯익은 방 안의 풍경이었다.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인식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이자 침대 한쪽에 매달린 수액이 보였다. 

줄을 따라 시선을 내린 그는 자신이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심코 다른 손을 들어 주사를 맞고 있는 팔을 만져 보려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냥 두어라. 팔을 자르고 싶지 않다면.”

그지없이 냉담한 음성이 아직 몽롱하던 의식을 일시에 일깨웠다. 

크게 뜬 눈으로 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본 애슐리가 그대로 굳었다. 얼마간 떨어진 거리의 의자에 앉은 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미니크 밀러.

아버지의 이름을 그는 머릿속으로만 되뇌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은발에 가까운 백금발과 2미터에 가까운 키, 언제나 빈틈없이 슈트를 갖추고 있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단단한 근육질의 몸은 틀림없는 그였다.

남자는 여러모로 애슐리와 닮았다. 아니, 애슐리가 그와 닮은 것이다. 어쨌든 애슐리의 근원은 그 남자이므로.

이제는 보라색 눈까지.

그것을 떠올리자 애슐리는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남자를 증오를 담아 노려보는데, 오히려 그는 입가를 비틀며 냉소를 지었다.

“더 해 보려무나. 너도 ‘애슐리’처럼 날 즐겁게 해 준다면 좋겠는데.”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수액을 맞고 있는 팔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 몇 번이고 그에게 날리고 싶은 걸 참고 참았다. 하지만 지금은 더더욱 안 된다. 하필 이런 때 이렇게 쇠약해지다니.

그동안 온갖 운동을 하며 키워 왔던 체력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걸 자각하자 자신에 대한 혐오감마저 일어났다. 애슐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누운 채 그를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애슐리’가 그렇듯이.

‘애슐리’ 또한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니까.

한동안 아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미니크가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애슐리는 그가 가끔 뱀처럼 느껴졌다. 특히 저렇게 눈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입꼬리만 올릴 때는 더더욱 그랬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소름이 등골을 내달리는 것을 느낀 애슐리가 멈칫하자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도미니크가 입을 열었다.

“참 보기 좋더구나, 네 몰골이.”

뒷말은 느리게 덧붙여졌다. 애슐리가 엉망이었단 사실을 일부러 강조하려는 것이다. 애슐리는 아버지가 얼마나 고상한 단어로 사람의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 욕설을 내뱉지 않았고 천박한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타인이 그런 거친 말을 하는 것도 불쾌해했다.

굳이 그런 언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상대를 바닥까지 깔아뭉갤 수 있는데 어째서 그런 말을 써야 하는가.

물론 그쪽이 더 상대를 화나게 한다는 걸 도미니크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주 즐겁게 그런 방법을 쓰는 거겠지.

그걸 숱하게 경험하고 눈앞에서 봤는데도 불구하고 애슐리는 화가 치밀었다. 그것이 도미니크가 바라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애슐리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으려 애쓰며 다시금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몸 상태는 여전히 엉망이었지만.

저 남자를 기어코 한 대 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지금껏 잘 참아 놓고 하필 이런 타이밍에, 하는 이성의 소리도 작게 들려오긴 했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껏 참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애슐리는 당장이라도 저 남자의 잘난 얼굴에 주먹을 꽂고 싶은 마음을 내리누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체, 나한테, 무슨.”

힘겹게 끊어져 나오는 단어에 도미니크가 흘긋 수액으로 시선을 향했다.

“페로몬을 빼고 있는 거란다, 내 아들아.”

다정한 말투는 정말로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저렇게 차가운 음성으로 아들을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극알파를 아버지로 둔 아들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할까?

애슐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의 아버지는 발현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마 저렇게 최악의 인간이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자신을 향한 경멸과 혐오감이 이미 익숙한 도미니크에게는 그런 애슐리의 시선이 전혀 새롭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런 아들의 반발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에게 반항하고 자신을 거부하는 이를 짓밟고 파멸시키는 게 그의 오락거리였으니까.

‘애슐리’를 그렇게 해서 손에 넣었듯이.

하지만 지금 애슐리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페로몬을 빼다니, 주사로? 그게 가능한 건가? 눈을 깜박거리는 그의 반응에 갑자기 도미니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뜻밖의 움직임에 자신도 모르게 애슐리는 움칠 놀랐으나 여전히 몸은 침대에 묶인 채였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그는 한 걸음씩 다가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저 속수무책으로 보기만 했다.

“페로몬을 빼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지.”

침대 옆에 멈춰 선 그가 수액으로 시선을 향했다. 한 방울씩 떨어지며 작은 기포를 일으키는 그것을 향해 조소를 짓는 아버지를 애슐리는 누운 채 지켜보았다.

“하지만 왜 주사로 빼려고 하지 않는지는 지금 네가 잘 알겠지.”

……뭐?

애슐리가 멈칫하고 눈을 깜박였다. 현기증과 두통이 뒤엉켜 머릿속은 엉망이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뚜렷하게 들려왔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아버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파티에서 제대로 페로몬을 뺐다면 이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애석해하거나 안타까워하는 말투는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소리 내어 웃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애슐리는 그런 그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에 앞서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껏 그에 맞서지 못했던 이유를 불현듯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주입되어 온 이 남자에 대한 공포가 반항이라는 건 꿈도 꿀 수 없게 했다. 어쩌면 자신도 ‘애슐리’처럼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 남자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예감. 그것이 지금 또다시 그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난 이 남자의 소유물일 뿐이야.

‘애슐리’가 그렇듯이. 마치 소유한 노예에게 낙인이라도 찍듯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아들에게 새겨 넣었다. 

여기까지는 이 남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만한 짓이었지만 퍼스트 네임이 아닌 미들 네임인 것만은 특이했다. 이토록 자기애가 넘치는 남자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을 앞에 넣은 건 놀라운 일이었다. 이 잔혹하고 매정한 남자가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

그것이 비록 지독하게 이기적인 자신만의 방식일지라도.

애슐리는 다시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훨씬 더 힘이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든 저 잘난 얼굴에 한 방을 날리고 말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뭐가 그렇게 싫었던 거냐? 그저 페로몬을 빼라고 한 것뿐인데.”

도미니크가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네게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닐 테고.”

정말로 납득이 안 간다는 듯 도미니크가 물었다. 역시나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아버지에게 그 행위란 그저 페로몬을 빼는 것뿐이니까. 그것을 섹스로 인식하는 극알파가 몇이나 될까? 어쩌면 알면서도 핑계를 대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애슐리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힘겹게 중얼거린 애슐리에게 도미니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아…….”

그가 알겠다는 듯 탄성을 뱉었으나 길게 늘어난 뒤끝이 오히려 불길하게 느껴졌다. 꼼짝 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는 애슐리를 내려다보며 도미니크가 싱긋 웃었다.

“그 잡종견을 말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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