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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111/216)

111화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뒤,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애슐리는 한 팔로 그의 허리를 안아 코이를 바짝 몸에 밀착하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늘어뜨린 한 손을 남은 손으로 잡아 쉴 새 없이 만지작거렸다. 

코이는 애슐리에게 완전히 몸을 기댄 채 그런 애슐리의 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침묵은 처음이었다. 애슐리와의 시간이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하게 느껴지다니. 코이는 긴장한 자신의 상태를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열심히 머리를 쥐어짰다. 간신히 그는 무난한 화제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학교는, 어떻게 됐어? 수업 너무 오래 빠졌잖아.”

지난 학기 애슐리의 출석 일수는 거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혹시 교장은 어떻게 된 일인지 사정을 알고 있을까?

겨우 침묵을 깼으나 코이는 서운함을 느꼈다. 침울해져 고개를 숙이는데, 그의 정수리에 키스를 한 애슐리가 대답했다.

“알파나 오메가들은 발현하면 1, 2년은 편의를 많이 봐줘. 페로몬이 불안정한 경우가 많거든.”

“아…….”

그제야 코이는 납득했다. 그럼 애슐리도 페로몬 때문에 돌아오지 못했던 걸까?

“많이, 힘들었어?”

조심스러운 물음에 애슐리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만지작거리던 코이의 손을 슬그머니 움켜쥐고 힘을 주었다. 뭔가 심각한 분위기에 코이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윽고 손의 힘을 다시 풀며 애슐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페로몬도 이유이긴 해.”

다른 것도 있었구나.

코이는 다시 불안해졌다. 애슐리는 아직도 분명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어지지 않겠다고도, 만약 코이가 떠나면 자신은 죽고 말 거라고까지 했는데.

왜 말을 해 주지 않는 걸까.

코이는 다시금 마음이 허전해졌다.

사귀는 사이에는 솔직해야 한다고 했으면서.

그가 했던 말을 언급하며 애슐리를 다그치는 방법도 있었으나 코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다. 상대를 속이는 것과는 다르다. 그도 지금까지 창피하다는 이유로 한 번도 애슐리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

그것만이 아니었다. 코이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만약에 지금 전부 고백한다면.

강렬한 충동을 느꼈으나 그는 입에 힘을 줘 그것을 참아 냈다. 지금껏 절대 말하지 않고 버텼으면서 애슐리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비밀을 털어놓는 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건 애슐리와 상관없이 스스로 원해서, 준비가 되었을 때 해야 한다. 지금은 아니었다.

코이는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내쉬었다. 어쨌든 지금 애슐리는 자신과 함께 있다. 연락조차 되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가. 모두 다 필요 없다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그가 돌아오게만 해 달라고.

그걸로 충분해.

코이는 눈을 꼭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아직 애슐리는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코이는 잡혀 있는 손을 슬그머니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애슐리의 긴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깍지 낀 코이가 그의 손등에 뺨을 댔다.

“……보고 싶었어.”

스스로의 귀에도 목소리가 흔들리는 게 명확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코이는 그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그때까지도 애슐리는 수없이 코이를 만지고 끌어안았으나 정작 키스는 하려고 하지 않았다. 타이밍을 못 찾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껏 언제 키스를 해야 좋을지 몰라 눈치를 보던 건 코이였지 애슐리가 아니었다. 수시로 코이의 얼굴 곳곳에 키스하고 웃음을 터뜨리던 그를 떠올리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애쉬.”

코이가 목이 메어 잠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넌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그럴 리가 없잖아.”

애슐리는 즉각 부정했다. 눈물이 괴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코이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애슐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키스를 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코이는 먼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았다.

어서 애슐리와 닿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간절히 원한 것은 처음이었다.

키스해 줘, 애쉬. 어서.

눈을 감고 고개를 든 코이를 바짝 끌어안은 애슐리가 입술을 가까이했다. 그답지 않게 긴장해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떨리는 숨결이 코이의 입술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10대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죠.〉

갑자기 비서의 음성이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그 순간 애슐리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의 조롱 섞인 냉담한 음성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베타가 알파나 오메가를 상대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상대를 위해서도 포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몸을 가늘게 떨면서 키스를 기다리던 코이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애슐리의 표정에 그는 당황해하며 눈을 깜박였다.

“애쉬…… 왜 그래?”

코이가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애슐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넋을 잃고 코이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정도 페로몬이었다면 진작 발현을 하든 변이를 하든 했을 텐데 그 아이는 전혀 변화가 없잖아요?〉

게다가 지금도 애슐리의 주변에는 그가 흘린 페로몬 향이 가득 차 있었다. 

스스로의 정신을 어지럽힐 정도로 진한 향기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코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본인이 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설마, 코이.

잠깐 머리를 들었던 의구심을 그는 즉시 떨쳐 버렸다. 그러나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코이의 어깨를 잡아 밀어낸 애슐리의 행동에 코이는 그만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애슐리는 긴 팔을 뻗어 최대한 코이를 멀찍이 떼어놓은 채 고개를 숙이고 숨만 몰아쉬었다.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실내에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한동안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만 보던 코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애쉬?”

코이의 음성에 급기야 울음이 가득 섞였다.

“나 무서워, 왜 그러는 거야…….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훌쩍거리며 코이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애슐리는 한동안 그대로 숨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그의 숨죽인 울음소리를 듣기만 했다.

“……미안해.”

한참 만에 비로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코이는 자꾸만 나오는 눈물을 한사코 억눌러 참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애슐리가 꽉 막힌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대로 얘기하면 넌 날 경멸할지도 몰라.”

“절대 그럴 일은 없어.”

코이는 즉각 부정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애슐리의 시니컬한 웃음뿐이었다. 어딘지 허망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얼굴에 코이는 또다시 불안해졌다.

내심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애슐리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며 하, 짧은 탄식을 뱉어 냈다.

“동부에서 뭘 했냐고 물었지?”

코이는 무심코 긴장해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까지 코이의 양 어깨를 붙잡고 있던 애슐리 또한 눈치챌 정도로.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애슐리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파티에 끌려갔었어.”

“어?”

뜻밖의 말에 코이는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마주 보았다. 

애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토록 황폐하게 웃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하물며 애슐리가 저런 얼굴로 웃다니. 또다시 충격을 받고 만 코이에게 애슐리가 물었다.

“넌 파티가 뭔지 모르지?”

코이는 즉시 대꾸했다. 아무리 자신조차 스스로를 찐따에 외톨이라고 생각해 왔다 해도 파티를 모를 거라고 말하다니 너무한다.

“알아.”

코이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애슐리의 표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웃으며 그는 말했다.

“넌 몰라.”

하하, 애슐리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마치 속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괴로워하는 웃음소리에 코이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런 반응은 상상조차 못 했다. 이것은 그가 알던 애슐리 밀러가 아니었다. 햇살 아래서 유쾌하게 웃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한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코이.”

아무 말 못 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데, 이윽고 웃음을 멈춘 애슐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응.”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코이에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만약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도무지 짐작조차 못 하는 코이에게 마침내 그가 물었다. 떨리는 음성으로.

“내가 너 말고 다른 사람과 섹스했다고 하면 넌 어떻게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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