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모두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친구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다가 애슐리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서로 마주 보기를 반복했다.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역시 빌이었다.
“……발현이라니? 네가?”
“그래.”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또다시 다른 녀석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건 전혀 상상도 못 했다는 듯이.
하긴 발현한다는 것 자체가 흔한 게 아니니까.
코이는 생각했다. 거기다 애슐리의 경우는 더욱 특별한 종이다. 만약 이게 알려지면 상당한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사실은 교장과 코이를 포함한 극소수만 알고 있었고, 애슐리 또한 그것에 관해서는 함구 할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친구들을 포함해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의 비밀을 일부만 공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대부분의 의문은 해결이 될 것이다.
“알파가 돼 버렸어. 그래서 경기에 뛰지 못했어, 미안.”
“어…….”
평소 소란한 녀석들이 조용해진 모습을 보는 것은 썩 달갑지 않았다. 코이는 내심 불안해하며 애쉬와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만약에 친구들하고 관계가 소원해지면 어쩌지.
〈그럼 어쩔 수 없지.〉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코이는 애가 탔다. 발현 전 그토록 친하게 지냈던 녀석들과 멀어진다면 코이가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애쉬는 나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지만…….
코이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것이 애슐리의 진심이라고 해도 코이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친구라고는 애슐리 하나뿐인 코이와는 다르다.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였고, 그 중심에 있었다. 코이는 그가 변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며 초조해하는데, 갑자기 빌이 그를 돌아보았다. 불시에 마주친 시선에 깜짝 놀란 코이를 보고 빌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코이, 넌 알고 있었어?”
“어?”
별안간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코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어, 어쩌지.
주저하다 애슐리를 보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 반응만으로 모두는 눈치를 챘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코이는 시선을 떨구고 작게 대답했다.
“……응.”
“하아…….”
빌이 이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녀석들 또한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야, 너 어떻게 우리한테만 얘기를 안 할 수가 있냐?”
한 녀석이 불평을 하자 이어서 여기저기서 동조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서운하다, 우리가 고작 그런 사이였다니.”
“코이한텐 얘기를 해 놓고서 우리한텐 비밀로 하다니, 이래도 되는 거야?”
“아무리 코이를 좋아해도 그렇지. 우린 버팔로라고, 아니, 였다고!”
아우성을 치는 녀석들의 반응에서 애슐리를 멀리하는 것 같은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친한 친구 사이에서나 나오는 야속한 감정에 코이는 조금씩 마음이 밝아졌다. 애슐리 또한 잠깐 당황하는 것 같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미안, 하고 사과했다.
“더 빨리 얘기하고 싶었는데, 돌아오질 못해서.”
“대체 동부에는 왜 그렇게 오래 있었던 거야? 그것도 발현 때문에?”
빌이 걱정과 호기심이 뒤섞인 얼굴로 물었다. 애슐리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도 알잖아. 발현 후 얼마간은 페로몬이 불안정하다는 거.”
“알지.”
“그렇다고 하더라.”
베타인 그들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친구를 위해 억지로 그 사실을 뇌에 욱여넣는 듯했다. 다행이다. 코이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편하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곧이어 다른 녀석이 물었다.
“그럼 이제 괜찮은 거야?”
“맞아, 몸은 어때? 좀 야윈 거 같아 보이는데.”
“왜 그런 거야? 발현하면 근 손실 오나?”
“야, 단백질 바 누구 가진 거 없어? 애쉬 좀 줘, 빨리.”
허둥지둥 애슐리에게 맞춰 화제를 이어 가는 녀석들을 보자 코이는 저절로 웃음이 났다. 애슐리 또한 마찬가지여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이어서 어마어마한 안정감이 그를 찾아왔다.
이거다, 내가 그리워했던 것.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이 드디어 그에게 되돌아왔다. 고개를 돌렸던 애슐리는 코이와 눈이 마주쳤다. 잘됐다는 듯이 환하게 웃는 코이의 얼굴을 보자 그는 더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잃고 싶지 않아.
그는 생각했다. 계속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걸까. 영원히, 동부로 떠나지 않고.
하지만 애슐리 또한 현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달콤함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에게 ‘졸업할 때까지’라는 유예 기간을 줬을 뿐이다. 그리고 이게 그의 마지막 자유였다.
괜찮아.
애슐리는 친구들과 시답잖은 말들을 나누며 자신을 위로했다. 괜찮을 거야, 난 그들처럼 괴물이 되지 않을 테니까. 아버지와도 달라. 내게는 이렇게 친구들이 있고, 코이가 있어.
나는 그들하고 달라.
그는 강하게 확신했다. 눈앞에 줄곧 반복되던 난잡하고 기괴한 페로몬 파티가 조금씩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서서히 잊어 가게 될 거라고 애슐리는 생각했다. 모든 기억이 그러하듯이.
“아, 수업 시간이다.”
아쉽지만 재회의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누군가 한 말에 모두는 점심시간을 기약하며 남은 얘기를 미뤄 놓았다.
“그럼 이따 보자.”
“이따 봐.”
코이와 나란히 걸어가는 애슐리의 뒷모습을 본 남은 녀석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 애쉬가 코이를 좋아한다고 했던 것도 발현해서 그런 건가?”
“그럴 수 있어, 알파나 오메가는 동성에 대한 허들이 낮으니까.”
“코이는 발현 안 했지?”
“안 했지.”
모두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누군가 그것을 입에 담았다.
“코이가 애쉬를 받아 준 걸까? 둘이 같이 온 걸 보면.”
“발현한 걸 코이는 알고 있었다니까.”
빌이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모르지, 우리야. 애쉬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일단 입 다물어. 혹시 코이가 그냥 친구라서 넘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아무래도.”
다른 녀석이 동조했다.
“난 베타인데 동성인 알파나 오메가가 좋아한다고 하면 많이 곤란해지긴 할 거야.”
“모르는 척하자.”
“그래, 잊어버린 척해.”
그들은 서로의 우정을 재확인 한 뒤 각자의 교실로 향했다.
애슐리가 발현을 했든 안 했든 친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그가 어떤 생각으로 고백을 했든 그건 애슐리와 코이의 문제였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친구의 감정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옳았다.
*
“다행이다, 그렇지.”
같이 교실로 향하며 코이가 말했다. 애슐리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웃음을 지었다.
“말했잖아, 이렇게 될 거라고.”
미리 코이에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애슐리 역시 장담하지는 못했다.
사람의 속이란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비록 몇 년이나 함께 팀에서 구르며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이지만 다를 건 없었다. 단지 코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우정 이상의 호의를 보이자 애슐리 또한 기뻤다.
극알파로 발현했다는 걸 말해도 됐을 텐데.
어쩔 수 없다. 비서는 혹시 그것이 알려질 경우 그의 경호를 늘리겠다고 경고했으니까.
극알파들은 종의 특수함 때문에 불필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문란한 사생활이라거나 기타 이유로 그들을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보니 안전을 위해 경호원은 필수에 가까웠다. 물론 애슐리가 다니고 있는 보통의 고등학교에서 그런 유난을 떤다는 건 ‘모두 날 봐라.’ 하고 과시하는 멍청이들이나 할 짓이었다.
애슐리는 그런 멍청이가 아니었고, 최대한 조용히 예전처럼 학교를 다니다 졸업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 때문에 비밀은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졸업하면 얘기할 거지?”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자유니까.”
“그래.”
덩달아 고개를 끄덕인 코이에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졸업하면, 코이.”
“응.”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수업이 있는 건물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서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애슐리가 물었다.
“나와 함께 동부로 가지 않을래?”
“뭐?”
갑작스러운 질문에 덩달아 느려지던 발이 완전히 멈춰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그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같이 동부로 가자. 그곳에서의 생활은 내가 어떻게든 책임질게.”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는 코이를 보며 애슐리가 덧붙였다.
“대학 학비도 포함해서.”
“그건…….”
코이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애슐리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가 동부로 돌아갈 거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방학 때 만나는 걸 상상했을 뿐, 함께 동부로 간다는 건 선택지에 아예 없었던 것이다. 난데없는 소리에 그는 그저 멍하니 애슐리를 올려다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