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216)

117화

애슐리에게 끌려 식당을 빠져나온 코이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아 열심히 뛰다시피 걸어갔다. 애슐리는 식당 건물을 돌아 한적한 구석을 찾아 코이를 벽에 세웠다.

얼떨결에 벽에 기대선 코이가 고개를 들자 애슐리가 벽에 두 팔을 짚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애슐리의 몸이 자신보다 최소한 두 배는 크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코이는 다른 때와 다르게 그에게서 위압감을 느꼈다.

지금껏 이런 기분을 느꼈던 적은 없었는데.

왠지 불안해진 코이가 어깨를 움츠리자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코이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안 든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늘진 애슐리의 찌푸린 얼굴이 코이를 더욱 두렵게 했다.

“저, 저기…… 왜.”

어렵게 입을 열자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흘러나왔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이해를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코이의 반응이 애슐리의 기분을 더 나쁘게 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몰라? 전혀?”

애슐리가 물었다. 그의 음성은 평소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코이는 안심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무서워졌다.

“미, 미안…….”

작게 중얼거리자 애슐리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미안하다고? 뭐가?”

“그게…….”

코이는 말문이 막혀 더듬거리고 말았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괜히 입을 열었다가 오히려 애슐리를 더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웠다. “저기, 그게.” 하고 계속 말을 더듬으며 땀만 뻘뻘 흘리는 그의 모습에 결국 애슐리가 답을 내놓았다.

“너 방금 전 그게 뭐 하는 짓이야?”

“어? ……내가, 뭘?”

날이 선 음성에 코이가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박이자 애슐리는 화를 억지로 눌러 참으며 최대한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방금 전에, 빌한테 한 거 말이야.”

“어…….”

그제야 코이는 기억을 되살리고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뭔가 깨달은 것 같은 그의 반응에 애슐리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바로 내 눈앞에서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는 거냐고, 코이, 말을 해 봐, 어서.”

화가 치밀어 점차 말이 빨라졌다. 코이는 그가 안간힘을 써 화를 억눌러 참는 것을 눈치채고 더욱 말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저기, 그게…….”

마른침을 삼킨 뒤 그는 다시 미안, 하고 사과했다.

“별생각 없이 그런 건데…….”

“생각 없이 했다고?”

곧바로 애슐리가 코이의 말을 잡아챘다.

“왜 생각이 없어? 내가 옆에 있는데 그런 행동을 생각 없이 해? 어째서?”

“그, 그게, 저기.”

코이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냥…… 빌은, 친구잖아. 난 그저 도와준 것뿐인데…….”

“입술을 닦아 준 게 그냥 도와준 거라고?”

“입술이 아니라, 입꼬리를 조금…….”

코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것을 애슐리는 훤히 들여다보았다. 코이는 그보다 훨씬 경험이 적었고, 당연히 상상력이 부족할 것이다. 이렇게 화를 내며 몰아붙이면 안 된다.

……알고 있는데.

속이 타들어 가 미칠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그에게 이성적으로 설명을 하고 잘 타이른 뒤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를 주고 끝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그렇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는 자꾸만 빌의 입가를 닦아 주던 코이와 마주 웃던 둘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그것은 그의 이성을 앗아 가 버렸다.

“……애쉬?”

코이의 음성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창백한 얼굴을 확인하자 그를 안고 안심시켜 줘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끝까지 다그쳐 울려 버리고 싶은 난폭한 충동에 휩싸였다.

……만약에 내가.

코이가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동치는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애슐리는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지금, ……한다면.

“애쉬.”

코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놀란 듯 그의 눈동자가 점차 커졌다. 하지만 애슐리는 그것을 깨닫지도 못했다.

만약에 지금 내가, 널 강간하면.

“애쉬, 눈동자 색이 이상해.”

코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점차 어둡게 물들어 가 흡사 검은빛에 가깝게 변해 가던 애쉬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돌변했다. 현란하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를 보고 놀란 코이가 더더욱 바짝 벽에 몸을 붙이자, 애슐리가 벽을 짚고 있던 두 손을 움켜쥐고 그를 내려다봤다. 둔탁하게 뛰는 심장이 가슴은 물론 온몸을 두드려 대는 듯했다.

하아, 하아.

점차 숨결이 가빠지고 전신에 열기가 피어올랐다. 애슐리의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과 불규칙한 호흡에 코이는 덜컥 겁이 났다.

“애쉬, 괜찮아? 몸이 안 좋은 거야?”

다급하게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을 때, 갑자기 애슐리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

어마어마한 악력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대로 벽에 몸이 부딪히고, 애슐리가 그에게로 몸을 겹쳤다. 저절로 두 발이 떠올라 발끝을 세운 채 그를 올려다보는 코이의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 찼다. 그도 역시 눈치챘다. 

지금 애슐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혹시, 설마.

코이는 알 수 없는 위기감에 몸을 바르작거리며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애슐리의 힘을 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애슐리는 그의 두 손목을 간단히 한 손으로 낚아채 고정하고, 남은 팔로 코이의 허리를 붙잡았다. 코이는 완전히 그에게 붙잡혀 달아날 구석이 없어져 버렸다.

화려하게 빛을 내는 금빛 눈동자와 그는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코이는 빠져나가려 애썼지만 그래 봤자 어깨를 조금 비트는 게 전부였다. 

그 모습을 보며 애슐리는 피식 웃더니 코이를 잡았던 손을 놔주었다. 코이의 두 손이 자유로워져 봤자 아무 쓸모 없다는 듯이.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코이는 그의 어깨를 짚고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으나 애슐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간단히 두 팔로 코이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짝 몸을 붙인 애슐리가 그를 내려다봤다. 코이의 창백한 얼굴이 어째선지 마음에 들었다. 하아, 탄식과 같은 한숨이 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애쉬!”

애슐리가 고개를 기울여 코이에게 키스를 하려던 찰나, 난데없이 빌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순간 애슐리와 코이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

코이가 고개를 돌리자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선 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채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어째서 빌이 여기에?

반가운 한편 의문을 가졌을 때, 빌이 당황해 하며 입을 열었다.

“애쉬, 코이를 데리고 지금 뭘 하는 거야……? 이 향은 또 뭐고?”

페로몬 향기를 맡은 빌이 소매로 코를 누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걱정돼서 쫓아왔구나.

코이는 곧 상황을 눈치챘다. 빌은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아마 그들을 찾아온 게 분명했다. 

물론 애슐리와 코이 둘 다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장애가 있는 코이와 달리 빌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애슐리의 주변에 퍼진 진한 페로몬 향기에 그는 즉시 반응했다.

“우욱…….”

“빌!”

갑자기 빌이 몸을 웅크리더니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먹은 점식 식사를 모두 게워 내는 그의 모습에 코이는 사색이 되어 소리치고 말았다.

“애쉬, 잠깐만! 놔줘, 빌이…….”

“빌이, 뭐?”

애슐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든 코이는 자신을 노려보는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하얗게 질렸다. 곧이어 지금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를 그는 떠올렸다. 내가 식당에서 괜한 짓을 했기 때문에.

“애, 애쉬,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신 그런 짓 안 할게…….”

코이는 다급하게 사과했다. 빌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구, 구급차를 부르자. 아니, 의무실이라도…… 빌이 아프잖아, 지금 빨리 도와줘야지. 응? 친구잖아…….”

어느새 코이의 음성은 애원조로 변해 있었다. 빌만이 아니었다. 애슐리의 상태도 이상했다. 이렇게 눈동자 색이 변하다니, 어떻게 된 걸까.

하지만 애슐리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더욱 세게 코이를 끌어안고 거친 음성으로 내뱉었다.

“신경 쓰지 마, 넌 나만 보고 있으면 돼.”

“애쉬…!”

다시금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또다시 빌이 구토를 했다. 이번에는 경련까지 일으키며 쓰러지는 모습에 코이는 다급해지고 말았다.

“애쉬, 정말이야. 이러다 정말 큰일나겠어, 빌을 도와줘야…….”

안달을 내며 소리쳤을 때, 갑자기 애슐리가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순간 겁에 질린 코이에게 애슐리가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시끄러워, 내 앞에서 다른 녀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마.”

거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코이는 그를 밀어내려 애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슐리는 전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 버린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해야 돼, 어떻게든…….

간신히 떠올렸을 때, 흐릿한 시야에 빌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별안간 전속력을 다해 애슐리를 몸으로 들이받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