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애쉬, 빌!”
코이는 하얗게 질려 비명을 질렀다. 덩치 큰 사내아이 둘이 볼품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코이는 그 순간 누구에게 달려가야 좋을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애슐리가 걱정됐지만 빌의 상태도 좋지 못했다. 자신의 마지막 힘을 다했는지 빌이 쿨럭거리며 바닥에 엎드려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정말로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코이는 겁에 질려 양쪽을 번갈아 보다 다급하게 생각을 떠올렸다. 911에 전화를 해야 하나? 아냐, 그랬다가는 애쉬가 극알파라는 게 알려질지도 몰라. 그러면 분명히 곤란해질 텐데. 그렇다고 그냥 둘 수도 없고. 빌, 빌을 도와줘야 해. 일단 여기서 몸을 피하게 해줘야…….
그때였다. 애슐리가 몸을 일으키더니 무서운 얼굴로 빌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코이는 자신이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애쉬, 안 돼!”
곧바로 빌에게 달려들려는 애쉬의 앞을 코이가 막아섰다. 이어서 처음 느껴 보는 이상한 감각이 온몸을 뒤덮었다.
약하게 전기가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한 생소한 감각에 코이는 잠시 멍해졌다. 대체 이게 뭔지 모르겠다. 아득해지는 정신에 그대로 굳어 버린 코이를 애슐리가 거칠게 밀어냈다.
“아!”
크게 휘청거린 코이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으나 애슐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빌에게 덤벼들었다. 잠시 머뭇거렸던 코이는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안 돼. 멈춰, 애쉬!”
“이거 놔!”
애슐리가 거칠게 내뱉으며 코이의 팔을 붙잡았다. 억지로 떼어 내려고 하는 그의 손에 온힘을 다해 버티며 코이가 소리쳤다.
“그러면 안 돼, 애쉬! 빌이잖아, 네 친구라고!”
“놓으라고 했잖아, 망할! 너 지금 내 앞에서 다른 놈을 감싸고 있는 거야? 감히?”
애슐리가 급기야 고함을 질렀다. 이토록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코이는 이미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거침없이 자신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을 휘두르던 남자.
아버지였다.
사색이 되어 얼어붙고 만 코이를 애슐리가 손쉽게 밀어내고, 그만 그는 맥없이 떨어져 나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그만둬! 안 돼!”
잠시 얼떨떨해졌으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빌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주먹을 날리려 하는 애슐리를 본 순간 코이는 하얗게 질려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하, 하지 마! 애쉬, 그만두라고!”
급기야 코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너까지 아버지처럼 그러지 마……!”
그 순간 애슐리가 멈칫했다. 등 뒤에서 훌쩍거리는 코이의 울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제야 조금씩 눈앞이 밝아지며 머리가 차가워졌다. 멱살을 거머쥐고 있던 손을 내려다봤다가 시선을 올리자 반쯤 의식을 잃은 빌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아, 하아.
정적 속에 거친 숨소리만이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애슐리는 그대로 멈춘 채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주먹을 쥔 손이 서서히 아래로 향하고, 곧이어 빌의 멱살을 잡았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맥없이 바닥에 쓰러진 빌의 모습을 본 애슐리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매달려 있는 코이의 모습을 그는 확인했다. 그제야 애슐리는 스스로가 한 짓을 깨닫고 그만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
애슐리가 의식을 잃은 것은 연락을 받고 달려온 여자와 몇 명 덩치가 큰 사내를 본 직후였다.
상황을 눈으로 확인한 그녀는 즉시 빌을 병원으로 데려갈 것을 지시하고 애슐리를 차에 태웠다. 그녀가 코이에게 말을 건 것은 그다음이었다.
“너도 어서 타렴, 학교에는 내가 말해 줄 테니.”
“저, 저도요?”
이런 제안을 받게 될 줄은 몰랐던 탓에 코이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싫다면 병원으로 데려가 줄게. 너도 괜찮은지 상태를 확인해 봐야 할 테니까…….”
“아, 아뇨, 저도 가고 싶어요. 가게 해 주세요.”
다급하게 끼어든 코이는 자신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는 걸 깨닫고 뒤늦게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애쉬와 같이 있고 싶어요…….”
더 정확하게는 애슐리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잠시 본가에 다녀온다고 했던 애슐리가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걸 떠올리자 내심 무서워졌다. 다신 그렇게 어이없이 헤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간절한 코이의 표정을 확인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차의 뒷문을 열고 뒤로 물러났다. 먼저 차에 오른 그녀를 뒤따라 탄 코이는 문이 닫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물었다.
“저,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죠……?”
정확하게는 애슐리와 무슨 관계냐고 묻고 싶었던 코이에게 그녀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 타기 전에 물어봤어야지.”
순간 코이는 무안해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밀러 씨의 비서야.”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데, 그녀가 덧붙였다.
“도미니크 밀러, 애슐리의 아버지지.”
“아…….”
문득 그 이름이 귀에 익는다는 사실에 이어 ‘도미니크’가 애슐리의 중간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차가 출발했다.
그 뒤는 정신없이 진행됐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가 그들을 맞이했고, 애슐리의 피를 뽑아 가더니 곧바로 주사를 연결했다. 피가 뽑힌 것은 코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잃는 애슐리를 그의 방으로 옮겨 가 침대에 눕히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의료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갔다. 남은 것은 코이와 애슐리, 비서뿐이었다.
“하아.”
지쳤다는 듯이 내쉰 한숨 소리에 코이가 멈칫하자 비서는 팔짱을 끼고 애슐리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코이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고, 결국 코이는 참다못해 묻고 말았다.
“저…… 어떻게 된 건가요? 애쉬는, 괜찮은 거죠?”
떨리는 음성에 비서는 여전히 애슐리만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괜찮아, 일단은.”
뒷말은 어딘지 불길하게 들렸다. 다시 물으려 했지만 다행히 그보다 먼저 비서가 말을 이었다.
“페로몬 불안정이야. 아직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서 그래. 감정 조절이 안되는 것도 원인일 테고…….”
“애쉬의 눈 색깔이 변한 것도 그래서인가요?”
궁금했던 것을 묻자 그녀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극알파들은 페로몬의 발산이 많아지면 눈동자 색이 변해. 러트일 때나 인위적으로 쏟아 낼 때나…… 이번엔 밀러 씨도 의도한 바는 아니었던 것 같으니 아마 조절을 못해서 과하게 쏟아져 나온 경우겠지.”
“네…….”
어느 정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인 코이에게 불현듯 비서가 질문을 되돌렸다.
“이번엔 내가 물어볼게, 도대체 셋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무나 당연한 의문에 코이는 쭈뼛대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설명을 하는 동안 그녀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이윽고 입을 다물자 비서는 심각한 얼굴로 잠시 말이 없더니 또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너 때문이구나, 그렇지?”
“……네.”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실수를 한 탓에 애슐리가 이렇게 된 것이다. 자책과 속상함에 그저 고개만 숙이는데, 마침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비서는 휴대 전화의 발신인을 확인하더니 곧 전화를 받았다. 짧은 몇 마디를 하고 통화를 끝낸 그녀가 코이를 바라보았다.
“병원에서 온 전화야. 네 친구는 무사하대.”
“빌이요?”
코이가 반가워하며 묻자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러 씨의 페로몬 때문에 영향이 있긴 했지만 주사로 빼내는 중이고 크게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해. 다행이지?”
“네, 정말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에게 비서가 불현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넌 왜 아무렇지 않니?”
“네?”
뜻밖의 물음에 코이가 당황해 눈을 깜박거렸다. 비서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지난번 밀러 씨가 발현을 했을 때도 넌 옆에 있었지? 그런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어. 이번에도 그래, 같은 베타인 네 친구는 구토를 하고 의식을 잃을 정도로 부작용이 왔는데 넌, 봐.”
한 차례 코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그녀가 다시 얼굴로 시선을 고정하고 물었다.
“너무 멀쩡하지 않니?”
“어…….”
그것은 코이 또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은 애슐리의 페로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걸까. 그때 갑자기 코이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피를 뽑혔던 기억을 떠올렸다.
“저, 제 검사는…… 어떻게 나왔나요? 피를 뽑은 건, 그래서죠?”
“그래.”
그녀가 입가를 비뚤어뜨리며 짧게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냈다.
“넌 여전히 베타야. 전혀 발현할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는다고. 대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코이로서도 답을 알 수 없었다. 당황해 고개만 젓는 그를 보고 비서가 물었다.
“넌 사실은 애슐리 밀러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니?”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코이는 그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서는 팔짱을 끼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는 거야, 정말은 애슐리 밀러를 원하는 게 아니니까.”
“무슨, 그렇지 않아요.”
“거짓말하지 마, 넌 애슐리 밀러를 좋아하지 않아.”
코이가 부정했으나 비서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수시로 널 때리지? 어머니는 이혼하고 나서 한 번도 널 찾지 않았고, 지금까지 넌 친구도 없이 혼자 지냈어. 내 말이 틀려?”
순간 코이는 굳어 버렸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자신에 대한 뒷조사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두려움에 찬 코이를 바라보며 그녀가 피식 웃었다.
“착각하고 있는 거야. 널 좋아해 주는 사람은 애슐리 밀러뿐이니까 잃고 싶지 않은 거지.”
“아니에요, 전 정말로 애쉬를…….”
“네가 정말로 애슐리 밀러를 좋아했다면 진작에 발현했을 거야.”
코이가 다시금 자신의 진심을 주장했으나 그녀는 매섭게 그를 몰아붙였다.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과 닮기를 바라. 같은 취미를 공유하려고 하고 좋아하는 걸 따라 하는데, 거기다 발현이라고? 상대가 발현하면 누구나 자신도 발현하기를 원해. 함께 있고 싶으니까. 거기다 넌 몇 번이나 그럴 기회가 있었는데 하지 않았어. 대체 이유가 뭐겠어?”
코이는 처음으로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애슐리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렇게 부정당해야 한다니. 단지 발현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의지력만으로 발현을 멈출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연구 대상이겠네요!”
“그래, 그렇지.”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항의한 코이에게 그녀가 냉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네가 정말 특이한 거 아니겠니?”
코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눈물만 그렁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