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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123/216)

123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뿐이었다. 코이는 멍하니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뒤늦게 화들짝 놀라 물었다.

“나, 납치?”

저절로 높아진 음성에 애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멕시코로 떠나자. 둘이 사는 거야.”

“자, 잠깐, 잠깐만.”

코이는 다급하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대체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애슐리가 모터홈 안으로 뛰어들어 왔던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아버지를 때려눕히고 몇 번이나 발길질까지 하며 거칠게 구타를 하던 모습까지 떠올랐다. 아버지가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었는데…….

“아, 아버지는?”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그만 사색이 되어 묻자 애슐리는 거칠게 내뱉었다.

“내버려 둬, 그런 개자식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욕설을 듣고 코이는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곧 입을 열었다.

“안 돼, 그건. 저기, 전화…… 내 휴대 전화는 안 가져왔지?”

습관적으로 주머니 위를 더듬거리며 묻자 애슐리가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흘긋 그를 보았다.

“그런 남자를 걱정하는 거야, 지금?”

울화통을 터뜨리는 애슐리에게 코이는 한탄하듯 대답했다.

“당연하잖아…… 혹시나 아버지가 죽기라도 하면…….”

그러면 애슐리는 살인을 한 게 되어 버린다. 폭행과 살인은 엄연히 다르다. 만약의 경우 재판을 받게 되면 아무리 애슐리의 아버지가 돈 많고 유능한 로펌 소유자에 변호사라고 해도 변호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애슐리가 감옥에 간다고 생각하자 코이는 침착해질 수가 없었다.

“애쉬, 휴대 전화 있지? 빌려줘. 어서, 911에 전화를 해야 돼.”

“그냥 둬, 그런 인간 죽든가 말든가.”

“애쉬.”

코이는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고백했다.

“네가 살인자가 되면 난 어떡해, 멕시코에 간다고 다가 아니잖아…….”

이번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애슐리가 한숨을 내쉬더니 핸들을 바꿔 쥐고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코이 쪽으로 가볍게 던졌다. 두 손으로 휴대 전화를 받아 든 코이는 황급히 번호를 눌러 911에 신고를 했다.

“……네, 네. 저…… 저기, 잘 모르겠어요. 네, 취하셔서 넘어지셨는데 많이 다치신 거 같으니까…… 네, 네.”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은 코이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걸로 아버지는 병원에 가게 될 것이다. 제대로 상태를 살피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래도 아버지가 죽지만 않는다면 정상 참작이 될 것이다. 애슐리가 그런 폭력을 쓴 건 코이를 구하기 위해서였으니까.

후우, 다시금 심호흡을 한 코이가 애슐리를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정면을 보며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조금은 침착해졌을까? 코이는 주저하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고마워, 전화하게 해 줘서.”

코이가 감사의 말을 하자 그때까지 아무 말 없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경찰한테 증언할 때 얘기 잘해 줘, 나만큼 친절한 납치범은 처음이라고.”

무심한 말투였으나 코이는 웃고 말았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평소처럼 농담을 하는 애슐리를 보자 마음이 놓였다.

“나 납치당한 거 처음인데?”

슬쩍 지적하자 애슐리는 선뜻 말을 받았다.

“공범 중에선 내가 제일 친절하니까.”

“공범? 어디?”

설마 빌이나 다른 친구들도 합세한 걸까?

당황해 뒷좌석을 흘긋거린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애슐리 밀러, 애쉬 밀러, A.D. 밀러….”

“그게 뭐야.”

그만 웃음을 터뜨렸던 코이는 얼굴의 통증을 느끼고 곧 입을 다물었다. 애슐리가 즉시 그의 쪽을 돌아봤으나 코이는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들고 고개를 저으며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애슐리의 표정이 잠시 차가워졌으나 곧 그는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이어 갔다.

“그중에서 애슐리 밀러가 제일 친절했다고 꼭 증언해 줘.”

애슐리가 자신을 안심시키려 당치도 않은 소리를 계속한다는 사실에 코이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애슐리 밀러라고 말할게.”

“그건 안 돼.”

뜻밖에도 애슐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코이가 놀라 눈을 깜박이자 그는 여전히 정면을 보며 말했다.

“그건 스톡홀름 신드롬이잖아. 증언에 전혀 도움이 안 될걸.”

코이는 즉시 억울해하며 항변했다.

“정말이야, 스톡홀름 신드롬이 아니라 난 정말로 애슐리 밀러를 좋아한다고.”

그러자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곤란한데.”

“왜?”

이번엔 또 뭘까. 코이가 불안해하며 묻자 애슐리는 보란 듯이 흘긋 뒷좌석 쪽을 보더니 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애쉬 밀러가 질투하거든.”

“하하하, 아야.”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던 코이가 이내 신음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애슐리는 더 이상 농담하는 것을 그만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 약국이 보이면 바로 들어가자.”

“아, 아냐. 걱정하지 마.”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냐. 정말이야. 더 심하게 맞은 적도 많은걸……. 고마워, 애쉬. 도와줘서.”

그나마 더 맞기 전에 애슐리가 와 줘서 다행이었다. 코이가 뒤늦게 감사의 말을 하자 애슐리는 잠시 말이 없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멍청하게 정신을 잃어서.”

“아, 아냐, 그렇지 않아!”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정말 최선을 다해 줬어. 몸이 안 좋은 건 네 탓이 아니잖아…… 괜찮아, 정말이야. 보기만 이런 거지 심각한 상태는 아냐.”

정말 걱정이 되는 건 아버지였다. 애슐리가 그를 얼마나 두들겨 팬 건지 제대로 확인도 못 했다. 혹시 신고가 늦은 건 아니겠지……?

코이는 다시 불안해졌으나 이제 와서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그저 아버지에게 별일이 없기만 바라는데, 문득 시야에 애슐리의 팔이 들어왔다. 건너편 팔 안쪽에 남아 있는 주사 자국을 본 그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자 곧바로 안색이 창백해졌다.

“왜 그래?”

코이의 변화를 눈치챈 애슐리가 즉시 물었다. 코이는 그의 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저기, 너야말로…… 몸은 어때? 괜찮아? 페로몬은, 다 뺀 거야?”

“뭐? 아…….”

코이의 시선을 따라 내려갔던 애슐리의 눈이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괜찮아, 그냥 주사를 맞은 게 단데 뭐.”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사실 후유증은 심각했다. 그는 아까부터 좋지 못했던 속이 일시에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누르며 최대한 무심한 음성을 꾸며 내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별거 아니니까.”

자신의 이상을 눈치채면 코이는 다시 불안해할 것이다. 지금 코이가 의지할 사람은 애슐리뿐이었다. 그는 절대로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이런 노력에도 코이는 여전히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뭔가 안심이 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건지 입을 열었다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가 애슐리 쪽을 훔쳐보는 불안한 움직임을 계속하자 애슐리가 물었다.

“왜 그래? 할 얘기 있으면 해, 괜찮으니까.”

최대한 가볍게 꺼낸 말에 코이는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저기, 아버지 비서가 그랬는데…… 네가 페로몬 조절을 잘 못해서 쓰러진 거라고.”

“이제 주사 맞았으니까 괜찮아.”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넘기려 했으나 코이는 넘어가지 않았다.

“저기, 내가 찾아봤는데…… 극알파에 대한 건 자료가 별로 없긴 했지만, 저기, 페로몬에 대한 건 조금 있더라고…….”

자꾸만 말을 끄는 게 왠지 불길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애슐리에게 코이는 마른침을 삼킨 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극알파들이 페로몬을 빼는 방법에 대해서, 저, 그러니까…… 무슨, 파티 같은 걸 한다고.”

순간적으로 애슐리는 눈을 감을 뻔했다. 그가 운전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행히 위기는 넘겼으나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잠자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에게 코이는 결국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저기, 너도 가는 거야? 그…… 페로몬을 빼는.”

“코이.”

애슐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코이를 바라보았다.

“난 아직 미성년이야. 술도 못 마시는데 그런 파티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저, 정말?”

코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애슐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소리를 냈다.

“당연하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거기다 나한텐 남자 친구가 있잖아.”

의미심장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코이는 반신반의하던 마음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대신 그 자리에 신뢰가 자리해 점차 안도하는 표정으로 변해 가는 그를 보며 애슐리 또한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다.

애슐리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코이가 소심한 성격인 탓에 질문을 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고 덕분에 애슐리는 그동안 평정을 가장해 말을 꾸며 낼 수 있었다.

이걸로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으나 틀렸다. 코이는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럼…….”

“응?”

별생각 없이 되물었던 애슐리는 다음 질문에 또다시 허가 찔리고 말았다.

"페로몬이 쌓인 건 어떻게 해결하는 거야? 넌 나랑 자는 것도 아니잖아 ……"

예상치 못한 말에 애슐리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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