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코이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반응을 본 빌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너도 몰랐구나.”
코이는 여전히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계속 못 만났어…….”
그렇게 눈앞에서 끌려가는 애슐리를 본 이후로 소식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소문을 무릅쓰고 학교에 온 것이었는데. 코이가 꽉 잠긴 음성으로 더듬거리며 이 같은 상황을 말하자 빌이 거칠게 숨을 들이켜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난데없이 애쉬가 널 왜 납치한 거냐고. 애들이 뭐라 하는지 알아? 애쉬가 너한테 미쳐서, 네가 계속 마음을 안 받아 주니까 납치한 거래. 그게 말이 돼?”
“그럴 리가 없잖아!”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생각도 못 한 말에 코이가 사색이 되어 소리치자 빌은 여전히 찡그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애쉬는 그렇게 질척거리는 애가 아니라고. 내가 그 녀석과 친구로 지낸 게 몇 년인데, 애쉬가 여자 친구랑 헤어질 때 얼마나 깔끔하게 끝냈는지 다 봤다고. 사귀던 애랑 마주치면 웃으면서 인사하고 그 애가 새로 사귀는 남자 친구랑도 친구가 되는 녀석이야, 애쉬는! 오죽하면 질투도 안 하고 너무 쿨하다고 여자애들이 불평하기까지 했는데 마음을 안 받아 줬다고 납치를 해? 지들이 뭘 안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빌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가 애슐리를 얼마나 아끼고 찬양하는지 코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긴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은 전부 그랬다. 주장이자 친구인 애슐리에 대한 마음은 우정 그 이상이었다. 한데 이런 일이 터졌으니 그들 모두가 패닉에 빠지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숨겨선 안 돼.
애슐리는 진작 둘의 관계를 공개하고 싶어 했다. 코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비밀로 한 건데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코이는 그가 자신 때문에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고 있는 걸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괜찮을 거야, 이젠.
코이는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에 억지로 침을 만들어 삼킨 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애쉬는 날 납치한 게 아냐. 나는, 우리는…….”
코이는 심호흡을 한 뒤 마침내 고백했다.
“서로 좋아하고 있어.”
그 말을 들은 빌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코이를 내려다봤다. 완전히 굳어 버린 그의 반응에, 코이는 빌이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대체 빌은 그럼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답이 나오지 않으니까 나를 이렇게 끌고 와서 물어본 거겠지.
코이는 스스로를 납득시킨 뒤 좀 더 명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한테 사정이 있어서 애쉬한테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어. 애쉬는 내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야. 그동안 감춰서 미안해.”
진지하게 사과까지 덧붙였으나 빌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 정도로 큰 충격인 걸까. 내심 씁쓸해졌으나 사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하자 수긍이 됐다. 하긴, 애슐리 밀러와 코너 나일즈가 서로 좋아하고 사귄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까. 코이 혼자 애슐리를 짝사랑한다면 몰라도.
그것은 빌의 표정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애슐리는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을까? 코이는 민망함과 함께 코이를 위해 모든 걸 감수하려 했던 애슐리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거듭 주장했다.
“우린 사귀고 있고, 졸업하면 겨, 결혼하기로 했어. 그리고 난.”
코이는 말을 하다 말고 깨달았다. 자신의 진심을. 지금 다시 네가 물어봐 준다면 난 주저 없이 대답할 텐데. 눈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코이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애쉬와 함께 동부로 갈 거야.”
이어진 폭탄선언에 빌은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그저 멍하니 코이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정보에 그의 뇌는 폭발해 그만 텅 비어 버렸다.
*
해가 지기 시작해 주변이 어두워질 무렵 코이는 귀가했다. 형편없이 낡고 좁은 모터홈에는 혼자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병원에 입원했고,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자전거를 언제나 그렇듯 모터홈 한쪽에 기대어 놓은 뒤 문을 열자 고요한 침묵이 그를 맞이했다. 코이는 일부러 소리 내어 한숨을 내쉬고 나서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모터홈은 쭉 그대로였다. 경찰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엉망이 된 채였던 실내를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창가에 일렬로 세워 두었던 종이컵이 사방으로 흩어져 그 안에 담긴 민들레가 흙과 함께 널브러져 있던 걸 떠올리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충 집 안을 치웠지만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다시 애슐리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자 미칠 것 같았다.
친구의 아버지가 경찰이라 제법 자세한 얘기를 전해 들었다던 빌의 말에 따르면 애슐리는 어쨌든 풀려나긴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엄청 유명한 변호사라면서?>
빌은 한숨을 사이에 두고 말을 이었다. 애슐리의 아버지가 아들을 풀어 주는 조건으로 코이 아버지의 병원비와 그 외 위로금을 지불하려고 했다는 얘기에 코이는 내심 씁쓸해졌다. 아버지가 당연히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어진 말은 의외였다.
〈네 아버지가 엄청나게 화를 내면서 거절했다는 거야. 다 필요 없고 자기 아들이나 내놓으라면서.>
예상치 못한 말에 코이는 당황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지 그는 평생을 거쳐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날도 얼마나 코이를 저주하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했던가.
그런데 왜 갑자기.
어쨌든 좋은 뜻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코이는 한 번도 병원에 찾아가지 않았고, 아버지를 만날 생각 또한 없었다. 지금 그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건 애슐리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애슐리 때문에 아버지가 여기로 왔다던데. 그래서 곧바로 동부로 데려갈 거라고 들었어.>
빌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코이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설마, 애쉬.
이대로 떠나는 건 아니지……?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산으로 돌아가 봐도 예전과는 달리 우락부락한 경호원들이 진을 치고 있어 저택 근처엔 다가가지도 못했다. 물론 만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단 한 번, 애슐리 아버지의 비서라는 여자가 나와 그에게 간단히 경고를 한 것이 전부였다.
〈도미니크 밀러 씨가 올 거야. 널 보면 좋아하지 않겠지?〉
그 말을 듣자 혹시나 애슐리에게 피해가 갈까 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줄곧 이런 상태였다.
보고 싶어, 애쉬.
코이는 또다시 울고 싶어지는 것을 참고 깊게 심호흡을 반복했다.
*
문의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에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애슐리가 흠칫 놀랐다. 캄캄한 어둠을 가로지르고 한 줄기 빛이 비쳐 들었다. 동시에 두 눈이 아프도록 시려 와 그는 손으로 눈을 덮고 말았다. 곧이어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붙잡았다.
“눈이 빛에 익숙해질 때까지 이걸 쓰고 있어요.”
냉정하고도 사무적인 음성은 비서의 것이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안대를 하자 곧이어 손에 페트병이 들렸다.
“마셔요, 물이에요.”
뚜껑이 열려 있는 페트병을 입으로 가져가 한 번에 비워 버린 그를 비서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빈 병을 가져간 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어나요. 걸을 수 있겠어요?”
부축을 하려는 손을 뿌리쳐 거절한 애슐리는 엉거주춤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안대 밑으로 새어들어 오는 불빛에도 눈이 시려 그는 눈꺼풀을 닫은 채 벽을 더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는 동안 감각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그동안 단절되어 있던 모든 소리와 빛이 일시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지금, 며칠이나 지났지?”
다소 쉰 목소리로 묻자 비서가 대답했다.
“사흘입니다.”
애슐리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사흘이나 빛이라곤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 갇혀 있었다니. 뒤따라 코이의 얼굴이 떠올라 그는 그만 끓어오르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애슐리가 저택에 돌아온 것은 경찰에게 체포된 후 일주일 만이었다. 마중을 나온 비서를 따라 차에 타고 돌아와 보니 언제나 적막하던 저택은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파티가 열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저택 안이 온통 환해진 채 수십 명의 경호원과 고용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걸 본 애슐리는 직감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온 거라고.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다만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지하실에 처박혔다. 동부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지는 벌을 받았으나 그것도 각오한 바였다.
다만 사흘이라는 시간은 그가 ‘애슐리’를 죽이려 했을 때와 같은 것으로, 도미니크가 판단한 아들의 죄질이 그만큼 심각한 것이라는 방증이었다.
애슐리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비서의 안내에 따라 발을 옮겼다. 아마 이 끝에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증거로 희미하게 느껴지던 타인의 페로몬 향이 점차 진해지고 있었다.
“멈추십시오.”
비서의 지시에 맞춰 애슐리는 멈춰 섰다. 곧이어 비서가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은 없었으나 그녀는 몇 초의 공백을 두고 문을 열었다.
“오른쪽으로 두 걸음, 그 뒤로 열 걸음 직진하세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비서가 방향을 알려 주었다. 애슐리가 느리게 발을 옮겼고, 귓가에는 자신의 발소리만이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아홉, 열.
숫자를 세던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자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애슐리는 진한 페로몬 향기에 뒤섞인 매캐한 시가의 향기를 맡았다. 익숙한 그 남자의 향기였다.
자신도 모르게 굳었을 때, 불현듯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꼴이 아주 보기 좋구나, 주니어.”
도미니크 밀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