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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127/216)

127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애슐리는 혼자 남은 걸 확인한 뒤 몸을 일으켰다. 일단 시간은 벌었다. 하지만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급히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향했다. 두꺼운 커튼을 슬쩍 열어 밖을 살피자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날 도미니크가 말한 대로 저택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몸이 안 좋다고 하면 하루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자신의 얄팍한 수에 넘어갈 도미니크가 아니었지만 아마도 그는 용인해 줄 것이다. 애슐리의 서툰 발악을 하루 정도 지켜보며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애슐리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미니크는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껏 애슐리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래서 일찌감치 자포자기한 채 그가 바라는 대로 묵묵히 꼭두각시처럼 살아갈 거라고 체념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애슐리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코이가 있다. 그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도미니크와 맞서 싸울 것이다.

잠시 뒤 비서가 돌아왔을 때, 애슐리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비서는 현재 마땅한 약을 구하기 어렵다는 말과 함께 출발을 저녁으로 미루기로 했다는 도미니크의 말을 전달했다.

거기까지도 예상한 그대로였다. 비서는 수프를 티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나중에 생각나면 들어요. 혹시 식으면 다시 갖다주겠습니다.”

애슐리는 누운 채 말했다.

“……짐을 싸야 하는데.”

“제가 대충 정리해 놨으니 걱정 마세요.”

이것도 예상했던 말이었다. 애슐리는 여전히 피곤한 음성을 꾸며 내 말했다.

“확인하고 싶으니까 갖다 놔.”

“……트렁크를요?”

비서가 이번엔 사이를 두고 물었다. 애슐리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내가 내 짐을 싸겠다는 건데도 안 되는 거야?”

잠깐 사이를 뒀던 비서가 입을 열었다.

“밀러 씨에게 확인해 보겠습니다.”

다시 나간 그녀는 이번엔 트렁크를 가지고 돌아왔다. 애슐리는 그 의미를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자신을 비웃는 보라색 눈동자를 떠올렸던 그는 곧 생각을 지우고 눈을 감았다.

“좀 더 자고 열어 볼게. 그동안 근처엔 아무도 오지 않게 해, 시끄러우니까.”

“알겠습니다. 모두에게 조용히 하도록 전하죠.”

곧 비서가 방에서 나가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애슐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봤지만 들리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그는 재빨리 침대에서 벗어나 문으로 향했다. 잔뜩 긴장한 채 드디어 문을 열었을 때, 예상했던 대로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비서가 애슐리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침실이 있는 층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명령을 내린 게 분명했다.

다시 문을 닫은 애슐리는 급히 트렁크를 열었다. 혹시 뭔가 쓸 만한 게 없을까 급히 안을 뒤적였던 그는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물건을 발견하고 순간 굳어졌다.

휴대 전화였다.

*

♬♪♪♬♩♪……

난데없이 울려 온 휴대 전화 벨 소리에 카페테리아에 앉아 과제를 하고 있던 코이는 화들짝 놀라 번호를 확인했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애, 애쉬?”

- 코이.

건너편에서 들려온 음성에 왈칵 눈물이 치솟았다.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나야. 애쉬, 나 코이야.”

- 알아.

건너편에서 애쉬가 웃음기 서린 음성으로 말했지만 실은 그도 가슴 한구석이 젖어 드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코이는 울지 않으려 애쓰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어, 어떻게 지내고 있어? 몸은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 난 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너는? 너는 어때?

“나도 괜찮아.”

코이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만나러 가진 않았어. 걱정하지 마, 또 맞거나 그러진 않았으니까.”

- 그래, 다행이다.

할 얘기는 많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남은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애슐리는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 코이, 잘 들어. 지금부터 중요한 얘기를 할 거야.

“으, 으응.”

코이는 바짝 긴장해 귀를 곤두세웠다. 애슐리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 앞으로 세 시간 뒤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어. 기차역에서 만나자. 그걸 타고 다른 주로 떠나는 거야.

“기, 기차?”

난데없는 말에 코이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가 황급히 입을 막고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수업이 끝난 시간이라 남아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카페테리아에 있는 것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코이는 다시 휴대 전화에 귀를 바짝 붙였다. 애슐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 같이 달아나자. 이번엔 꼭 성공할 거야, 날 믿어.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이번엔 다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난번엔 앞뒤 없이 충동적으로 저질렀지만 이번엔 다르다. 무엇보다 어서 애슐리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당장 그러겠다고 말할 뻔한 것을 참고 코이가 물었다.

“저, 정말 그래도 돼? 저기, 너한테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지? 체포됐었잖아…….”

애슐리가 어떤 조건으로 풀려났는지 코이는 전혀 알지 못했다. 혹시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릴까 봐 두려웠다.

지금의 선택으로 애슐리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결말을 맞이한다면 어쩌지.

겁에 질린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 지금 달아나지 않으면 정말로 우린 헤어지게 될 거야.

순간 코이는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만 사색이 되고 만 그에게 애슐리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 아버지가 와 있어, 날 동부로 데려가려고. 지금 다들 준비 중이야.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 만난다고.

도미니크가 코이를 경멸하고 반대한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애슐리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 아버지가 따로 생각해 둔 내 상대가 있는 모양이야. 물론 난 그 여자들 중에서 누구랑도 결혼하지 않을 거야.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니까.

그 말에 코이는 그만 숨을 멈추고 말았다. 애슐리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그대로 굳어 버린 코이에게 애슐리가 덧붙였다.

- 기회는 지금뿐이야. 같이 달아나자, 코이. 단둘이서 결혼해서 사는 거야.

그의 말은 너무나 달콤했다. 코이는 어릴 적 다녔던 교회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인류 최초의 여자를 꾀었던 뱀의 목소리가 이보다 더 달콤했을까?

“……갈게.”

마침내 코이가 떨리는 음성으로 내뱉었다.

“갈게, 너랑 같이 어디든 갈 거야.”

- 좋아, 코이.

애슐리 또한 기쁨을 참지 못하고 들뜬 음성으로 대답했다.

- 기차역에서 만나자.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갈 테니까 거기로 와.

“응, 알았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던 코이는 전화를 끊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사랑해, 애쉬.”

- 사랑해, 코이.

애슐리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코이는 통화를 끝냈다. 더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제 곧 질리도록 들을 수 있어.

애쉬의 목소리가 질릴 리가 없지만, 하고 생각하며 코이는 황급히 짐을 챙겨 자전거를 세워 둔 방향으로 달려갔다. 세 시간 뒤라면 빠듯하다.

그는 기차역으로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었다. 지난번에는 미처 경황이 없어 챙기지 못했지만 이번엔 다르다.

그동안 모은 돈을 전부 가져가야 돼.

자전거에 올라타 힘껏 페달을 밟으며 코이는 정신없이 모터홈을 향해 달려갔다. 어딜 가든 가장 필요한 건 돈이다. 거기다 둘은 아직 미성년이었다. 애슐리는 몰래 도망을 나오는 것이니 가져올 수 있는 돈도 얼마 없을 것이다.

돈이 필요해.

코이는 이를 악물고 전속력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 달려갔다.

*

조금씩 밀어낸 문이 귀에 거슬리는 불길한 소리를 내며 빠끔히 열렸다. 여전히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애슐리는 주변을 살핀 뒤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고맙게도 비서가 싼 짐은 부족한 게 없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기내용 사이즈의 작은 트렁크를 그는 한 손에 들고 재빨리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때마침 직원들은 정원과 집 안을 오가느라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경호원들 또한 어느새 상당수가 모습을 감춘 것을 보니 아마 출발 준비 때문에 공항에 간 모양이었다.

아마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지 미리 확인하려는 거겠지.

남은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고맙게도 차고가 있는 쪽은 텅 비어 있어서, 애슐리는 손쉽게 자신의 카이엔을 손에 넣었다. 항상 그랬듯이 차 키는 보란 듯이 대시보드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애슐리는 운전석의 문을 열어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차의 시동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차를 밀어 이동시켰다. 아련하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탈출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차를 얼마간 밀고 갔던 애슐리가 황급히 운전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킬 때까지 누구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창을 통해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도미니크 밀러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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