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냥 두셔도 되겠습니까?”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선 그의 비서가 물었다. 만약 도미니크가 명령한다면 당장이라도 애슐리의 뒤를 쫓았겠지만 그런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피우던 시가를 입으로 가져가 깊이 연기를 마시더니 천천히 입 밖으로 뱉어 냈다.
비서는 공기를 가르며 직선으로 흘러나오다 이내 허공을 부유하는 연기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미스 버니스, 나와 내기할까?”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도미니크가 말했다.
“내 아들이 얼마 만에 돌아올지.”
“……주니어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비서가 사이를 두고 묻자 도미니크가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모든 걸 다 해 줬다. 필요한 것, 원하는 것. 부족함이란 어떤 건지 깨닫지 못할 정도로. 과연 그런 빈털터리에 아무것도 없는 녀석과 달아나 봤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야.”
그는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는 듯했다. 비서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헉, 허억, 헉.
코이는 숨이 턱까지 닿은 채로 집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페달을 밟느라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였다. 그는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참으며 대충 자전거를 세워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 며칠 내내 그랬듯이 고요한 실내가 그를 맞이했다. 황급히 시간을 확인한 코이는 헐떡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아, 시간 안에 갈 수 있어.
기차역까지는 차로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자전거를 타면 최소 그 두 배 정도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여차 싶으면 우버를 탈 생각이었다. 괜찮다, 돈은 이럴 때 쓰려고 모으는 거니까.
코이는 황급히 가방을 내던지고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 올렸다. 그동안 모아 둔 돈을 테이프로 몇 장씩 묶어서 매트리스 반대쪽에 붙여 놨는데, 이렇게 급하게 쓸 줄 알았다면 그냥 고무줄로 묶어서 집 안 어디에 숨겨 둘 걸 그랬다.
물론 그럴 만한 장소가 없어서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게 된 거지만.
코이는 다급하게 손을 움직이면서도 지폐가 찢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섬세한 작업에 들어갔다.
간신히 마지막 지폐를 떼어 냈을 때에는 우버 외엔 선택지가 없게 됐다.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는 서둘러 가방을 비우고 지폐를 쑤셔 넣었다. 문득 애슐리가 사 줬던 옷이 떠올랐다.
아끼느라 몇 번 입지도 못한 걸 생각하자 당장 꺼내서 챙기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급하게 필요한 물건 몇 개만 챙겨 넣고 가방은 어깨에 멘 코이가 곧바로 몸을 돌렸다.
택시를 부르는 건 가면서 하자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끼이…….
깜박이는 전등만이 비추는 실내에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막 돌아섰던 코이는 놀라 그대로 굳었다. 이런 초라한 모터홈엔 도둑조차 들지 않는다. 이곳에 찾아올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코이 자신과, 또 한 명.
“……코이.”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코이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
애슐리는 벌써 몇 번이나 차선을 바꾸며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또다시 다른 차의 앞에 끼어든 그는 흘긋 차 안의 시계를 확인했다. 코이에게 말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시간보다 좀 더 일찍 도착할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사이드미러를 확인했지만 누군가 그의 뒤를 쫓아오는 것 같은 불길한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휴대 전화가 있었던 것부터가 이상했어.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미끼고 함정이었다는 걸.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대로 넋 놓고 앉아서 동부로 끌려가 영영 코이와 헤어지게 되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을 테니까.
혹시나 저택을 빠져나온 뒤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쫓아올까 봐 최대한 속도를 내어 달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쪽은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애슐리는 도미니크가 당장 그의 뒤를 쫓는 것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멀리 그 남자에게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만큼 코이와 가까워진다.
코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안도감이 찾아왔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코이를 떠올리자 무심코 입가에 미소가 떠올렸다.
같이 기차를 타고 이곳을 떠날 것이다. 다른 주로 가서 새롭게 시작해야지. 괜찮아, 뭐든 할 수 있어. 작은 방을 하나 얻어서 코이와 함께 사는 거야.
아무리 빈곤하고 부족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전부인 코이가 함께할 테니까.
애슐리는 그렇게 믿으며 또다시 차선을 바꿔 달려갔다.
*
“코이.”
아버지가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코이는 굳은 채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모습이 코이를 얼어붙게 했다. 또다시 그가 자신을 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저 흔들리는 눈동자만이 바쁘게 아버지의 손과 벨트를 오갈 뿐이었다.
“코이.”
한 번 더 그를 부른 아버지가 기침을 했다. 어둑한 실내등에 비친 아버지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했다. 마치 백지장 같다고 생각했을 때, 아버지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 움직임에 놀란 코이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버지는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괜, 찮으냐? 미안하다…… 내가, 그때…… 잠깐 어떻게 됐던 모양이야.”
힘들게 말을 이었던 아버지가 다시 기침을 했다. 그의 숨이 유난히 거칠다는 생각을 했을 때, 문득 코이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왠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그는 숨을 쌕쌕거리며 한 걸음씩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래 봤자 한두 걸음을 뗐다가 멈추고, 다시 한두 걸음을 떼는 게 전부였지만 그때마다 물러났던 코이는 이내 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
등 뒤에 벽이 닿아 그만 궁지에 몰리고 만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깨에 멘 가방의 끈을 힘주어 잡았다. 아버지가 그것을 발견한 건 다시 두어 걸음을 가까이 다가온 뒤였다.
“……코이, 그건 뭐냐? 수업은, 끝났을 텐데?”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그가 물었다. 코이는 순간 당황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치, 치…… 친구네서, 공부, 하려고요.”
더듬거리며 간신히 거짓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믿지 않는 듯했다. 당연하다. 반대의 경우라면 코이 역시 믿지 않았을 것이다.
“코이.”
아버지의 얼굴이 더더욱 하얗게 질려 갔다. 그의 마른 손이 코이를 향해 뻗어 오고, 그것을 본 코이가 히익, 숨을 삼키며 어깨를 움츠렸다. 겁에 질린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여길 떠나려고 하는 거냐……?”
*
저 멀리 기차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애슐리의 얼굴이 점차 환하게 밝아졌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이곳을 떠나는 거야.
그 남자로부터 벗어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애슐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더욱 속도를 올렸다. 다시금 차선을 바꾸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 거대한 트럭이 그를 덮쳐 왔다.
*
코이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벽에 바짝 달라붙어 있기만 했다. 아버지는 다가오는데 그는 갈 곳이 없었다.
애쉬가 기다리고 있어. 어서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몸은 굳어진 그대로였다. 온몸을 떨기만 하면서 코이는 가까워지는 아버지를 보기만 했다.
“코이.”
아버지가 또다시 그를 불렀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도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아니지……? 그런 건, 아니겠지? 너도…… 네 엄마처럼, 나를 떠나려 하는 건, 아니지?”
아버지의 말이 도막도막 끊겨서 흘러나왔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고 있었다. 이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나 코이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갈, 거예요.”
그는 자꾸만 사그라드는 음성을 억지로 쥐어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떠날 거예요. 보내, 주세요.”
앞이 아버지에게 가로막혀 코이에겐 달리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 애원하는 것 말고는. 순간 아버지의 눈빛이 번득이고, 이어서 손이 날아왔다.
“히익……!”
코이는 그만 질겁을 하며 비명과 함께 두 눈을 꼭 감았다. 잔뜩 온몸을 움츠리고 겁에 질렸으나 이어진 상황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코이…….”
갑자기 아버지가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코이가 숨을 삼키고 진저리를 치는데, 그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내, 내가 잘못했다…… 떠나지 말아 다오.”
주변은 고요했다. 그저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만이 약하게 귀를 때릴 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코이는 현실감이 없어져 버렸다.
그저 한껏 몸을 긴장시킨 채 눈만 질끈 감고 있던 그는 잠시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말을 알아들었다.
……어?
뒤늦게 코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주저하던 눈동자가 머뭇거리며 옆으로 움직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두침침한 전등이 코이의 등 뒤에서 깜박이며 어슴푸레 얼굴을 비췄다.
아버지는 창백한 얼굴을 울 것처럼 잔뜩 일그러뜨린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