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216)

130화

*

기차가 곧 도착함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애슐리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같은 자리를 서성거렸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코이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 시간으로는 촉박했던 걸까.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아버지의 고용인들이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름대로는 길을 돌아오느라 역에서 만나기로 했던 건데, 그냥 데리러 갈 걸 그랬다. 코이가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달려오는 건 역시 무리였던 게 아닐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르고 그는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여전히 그에게 걸려 온 전화는 없었다.

“코…….”

언뜻 비슷한 키의 소년이 시야에 들어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부를 뻔했으나 다른 사람이었다. 애슐리는 이내 실망해 다시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번호를 눌렀다.

건조한 신호음을 듣는 동안에도 그는 연신 사람들이 오가는 역 안을 훔쳐보았다. 초조함에 저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

코이는 잠자코 앉아 잠들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병실에는 이따금씩 기계음이 들릴 뿐 고요하기만 했다. 모터홈의 어두운 전등과는 다른 병실의 환한 불빛 아래서 코이는 정말로 오랜만에 아버지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거기엔 너무나 초췌하고 메마른, 앙상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핏기라고는 없는 안색에 입술은 부르트고 몸에는 뼈마디가 드러나 얇은 살가죽이 그 위에 얹혀 있는 듯한 생소한 모습이었다.

지금껏 그토록 크고 강하게 느껴졌던 남자가 이렇게 볼품없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자 코이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모르고 있었구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이 병원에서 이미 진단을 받아 결과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전신으로 암이 퍼져 손을 쓸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코이의 머릿속에 아버지가 몇 번이나 그에게 뭔가를 말하려다 말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었다는 것도.

혹시, 그건 그래서.

〈길어야 6개월 정도일 거다.〉

의사는 그렇게 말한 후 동정 어린 시선으로 코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코이는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암이라니. ……6개월밖에 안 남았다니.

그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분명히 눈앞에서 보았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아버지의 모습을. 무엇보다 이렇게 겨울 잎사귀처럼 바짝 마른 남자를 보면 누구라도 중병에 걸렸음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말도 안 돼…….

코이는 눈을 감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뜻밖의 상황에 혼란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문득 가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묻고 있던 얼굴을 슬그머니 들자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간신히 그가 눈을 뜨고 초점을 맞추는 것을 코이는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얕은 숨을 몰아쉬며 천장을 응시하던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고, 그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버지는 처음엔 코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멍하니 몇 차례 눈을 깜박이던 그가 뒤늦게 놀란 듯 몸을 일으키려다 곧 다시 눕고 말았다. 코이는 화들짝 놀라 굳어졌다가 숨을 몰아쉬며 늘어지는 아버지를 보고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코이…….”

겨우 숨을 가다듬은 아버지가 잔뜩 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코이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금세 아버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있어, 줬구나. 떠나지 않고…….”

눈앞에서 피를 쏟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을 뿐이다. 게다가 모르는 타인도 아닌 아버지였으니까. 하지만 정작 코이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많이 아프시다는 거, 들었어요.”

작게 우물거리듯 한 말에 아버지가 멈칫했다. 잠시 반응이 없던 그가 이윽고 천천히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너한테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건 사실일 것이다. 몇 번이나 주저하며 코이에게 뭔가 말을 건네려 했던 그를 코이 또한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용기가 없어서 말할 수 없었어……. 입 밖으로 내면, 정말로 내가 곧 죽으리란 걸 인정하는 것 같았거든.”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됐다. 이제 그도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둘 사이에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액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기운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날, 그 여자한테서 네가 그 녀석과 함께 있다는 말을 듣고…… 내가 이성이 날아가 버렸었다. 너한테 어떻게 된 일인지 먼저 들었어야 했는데, 하필 그날 일당도 못 받고 운이 안 좋아서 홧김에 술을 먹는 바람에…….”

거기까지 말했던 그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이건 그냥 변명이야. 무슨 말을 해도 널 그렇게 때린 걸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겠니.”

코이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아버지의 고백은 계속되었다.

“네가 그 녀석과 집을 나갔다는 걸 알고, 정신이 번쩍 들더구나.”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널 영원히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몰라. 진작 너한테 말했어야 했는데. 너한테…… 사과를, 했어야 해.”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속죄의 말을 코이는 망연히 듣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 전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안 순간부터…… 네게 사과하고 싶었다. 너를…… 네게, 내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는지. 너도 네 엄마를 잃고 힘들었을 텐데, 넌 정말 작은 아이에 불과했는데…….”

아버지의 음성에 흐느낌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는 누운 채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말을 이었다.

“네겐 잘못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저 내가, 우리 모두가 운이 나빴던 거지. ……하지만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단다. ……그걸 모두 너한테 쏟아부었다니, 난 정말 쓰레기야.”

흐으으,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가에 굵은 눈물이 연신 흘러내리는 것을 코이는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흐느껴 울며 속죄했다.

“미안하다, 코이. 미안하다……. 내게 한 번만,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순 없겠니? 미안하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만, 단 몇 달만 내 곁에 있어 다오……. 네가, 너마저 날 떠나면 나는, 나는…….”

채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아버지는 아이처럼 온몸을 떨며 울음을 터뜨렸다. 코이는 그 자리에 앉은 채 그런 그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불현듯 그의 시야에 아주 오래전 기억이 겹쳐졌다. 세차를 하던 아버지와, 물이 쏟아지는 호스를 들고 코이에게 휘둘러 대던 형과, 비명을 지르며 어머니에게 달아났던 자신과, 그런 그들을 보며 소리 내어 웃음을 짓던 어머니까지.

어째서 그날의 기억이 이렇게 생생하게 눈앞에 되살아날까.

행복했던 나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저 깊은 곳 어딘가 깊이 잠들어 있다가 이렇게 불시에 깨어나 온통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그때의 공기도, 뺨을 스치던 바람도, 온몸에 튀어 오르던 물방울도, 그때의 웃음소리도.

지금 이렇게 생생하게 눈앞에 되살아나지 않는가.

〈코이, 내 작은 완두콩.〉

하하하, 유쾌하게 웃으며 자신을 들어 올리던 아버지가 지금의 그와 겹쳐지고, 코이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굵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흐르고, 아버지의 흐느낌 소리가 조용히 병실 안에 울려 퍼졌다.

*

♬♪♪♫♬♪…….

“코이?”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애슐리는 다급하게 전화를 받으며 소리쳤다. 건너편에서 잠깐 멈칫하는 듯하더니 대답이 흘러나왔다.

- 응, 애쉬. 나야. 늦게 연락해서 미안해.

“하아…….”

애슐리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기차가 떠난 지는 이미 한참 지났다. 그동안 애슐리는 코이를 기다리며 혹시나 무슨 큰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미칠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연락이 닿지 않고 기차는 하나둘 계속 플랫폼을 떠나는데, 점점 줄어드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가장 기다리는 사람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이게 얼마나 피를 말리는 일인지, 그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아졌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 생겼어? 다친 건 아니지?”

빠르게 묻자 코이가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 괜찮아…… 미안해, 연락할 상황이 아니었어.

목소리를 들으니 상상했던 끔찍한 일들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애슐리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으나 곧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코이,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어디 있어? 빨리 와, 내가 데리러 갈까?”

지금 코이를 데리고 역으로 오면 막차는 아슬아슬하게 탈 수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그대로 다음 역까지 차로 달려가 첫차를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계획은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 코이만 있다면.

코이만 있다면.

-애쉬.

건너편에서 떨리는 음성으로 코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 미안, 해. 나…… 갈 수 없어.

처음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애슐리는 눈을 깜박거리며 다시 물었다.

“아, 미안. 잘 못 들었는데, 지금 뭐라고 했어?”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믿고 있었다. 코이가 그를 배신할 리는 절대 없다고.

- 미안해.

또다시 코이가 그에게 사과했다. 흐트러진 숨결 사이로 그는 쥐어짜듯 말을 이었다.

- 너와 함께 갈 수 없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애슐리는 멍하니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선 채 굳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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