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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131/216)

131화

지금 내가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코이가 대체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건가. 멍하니 서서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애슐리의 귀에 코이의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코이.”

간신히 입을 열자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급하게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은 애슐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코이, 혹시 사고가 난 거야?”

-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코이는 다급하게 그의 말을 부정하더니 떨리는 숨을 뱉어 냈다. 건너편에서 들려온 과장된 숨소리에 애슐리는 무심코 긴장했다. 사이를 두고 마침내 코이가 고백했다.

- 아버지가, 아프셔.

떨리는 숨을 사이에 두고 그의 음성이 도막도막 끊어졌다.

- 암이래. ……길어야 6개월이라고, 손쓸 방법이 없대.

애슐리는 잠시 동안 눈만 깜박이며 서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래, 안됐네.”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대체 그게 코이가 여기에 못 오는 것과 무슨 상관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조바심이 나 다시 입을 여는데, 심호흡을 사이에 두고 코이가 말을 이었다.

- 아버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돌아가신단 말이야.

“그래, 알고 있어.”

애슐리는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그런데? 왜 못 온다는 거야? 너랑 상관없잖아.”

잠시 코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오는 휴대 전화를 귀에 딱 붙인 채 애슐리는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남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한참이 흐른 듯이 느껴진 다음에야 비로소 코이가 입을 열었다.

- 내 아버지잖아…….

애슐리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코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 반응이 없는 그에게 코이가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 내 아버지가 암에 걸리셔서 얼마 남지 않으셨다고, 기껏해야 반년이라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애슐리 역시 답답한 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지금 병원에 계시지 않아? 그럼 거기서 알아서 하겠지. 네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텐데 왜 못 온다는 거야?”

코이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머뭇거렸다.

- 없지……만…….

주저하며 꺼낸 말을 애슐리가 가로막았다.

“거기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거야? 널 그렇게 때려 놓고,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했어? 울면서 매달리기라도 해?”

다시 코이가 말이 없어졌다. 애슐리의 입에서 기가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래, 이제라도 사과했으면 됐네. 다 끝난 거지? 어서 역으로 와. 아니, 내가 갈게. 어느 병원이야? 막차는 못 탈 거 같으니까 다음 역으로 가서…….”

애슐리는 말을 하는 동안 트렁크의 손잡이를 잡고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차로 돌아가야 한다. 어서 코이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당장 그를 만나지 않으면.

건너편에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이 이어졌다.

- 미안해, 애쉬. 난 갈 수 없어.

서둘러 역을 빠져나가려던 애슐리가 걸음을 멈췄다.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린 그에게 코이가 계속해서 말했다.

- 아버지를 혼자 둘 순 없어…… 미안해, 미안해.

“코이.”

연거푸 반복되는 말을 애슐리는 가차 없이 잘라 버렸다. 그의 음성 또한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어? ……그 남자 때문에, 나랑 떠나는 걸 포기한다고?”

코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긍정의 의미라는 걸 애슐리는 알고 있었다. 무심코 거친 숨을 들이켠 그가 격정으로 떨리는 음성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널 짐승처럼 두들겨 패던 남자를 위해서 남겠다고? 진심이야? 너, 지금 날 버리겠다고 말하는 거야?”

- 미안…….

“헛소리 집어치워!”

급기야 애슐리는 날카롭게 내질렀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코이가 오지 않는다고? 그 남자 때문에 날 포기한다고? 이제 와서? 정말로?

“아직 막차까지는 시간이 남았어.”

애슐리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열차를 놓치더라도 상관없어. 다음 역으로 차를 타고 가서 아침 첫차를 타면 돼. 난 여기서 기다릴게,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괜찮으니까 지금 바로 출발해. 우버를 타는 게 좋겠다. 택시비는 걱정하지 마,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알겠지?”

- 애쉬…….

“난 네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거야.”

자신의 말만 한 뒤 애슐리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삽시간에 고요가 찾아왔다. 기차역 안에는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어 주변은 적막하기만 했다.

하아, 한숨을 내쉰 뒤 애슐리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마구 문질렀던 그는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들었다.

올 거야.

애슐리는 자신을 향해 다짐하듯 떠올렸다.

코이는 반드시 올 거야. 조금 늦는 것뿐이야.

당장이라도 그가 저 입구에서 애슐리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품에 뛰어들겠지. 그러면 애슐리는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질 나쁜 장난을 하다니 코이답지 않다고,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겠지만 얼굴에는 가득히 미소가 떠오르겠지. 품에 안겨 있는 마른 몸을 힘껏 끌어안고 키스할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둘만의 세상으로 떠난다. 그래,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코이가 날 버릴 리가 없으니까.

애슐리는 생각하며 초조해하는 얼굴로 역의 입구를 연신 훔쳐보았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고, 밤이 되어 막차가 떠났다. 애슐리는 그때까지도 혼자 역의 대합실에 남아 있었다.

*

문이 열리는 소리에 코이는 고개를 돌렸다. 간단히 눈인사를 한 간호사가 병실을 가로질러 걸어와 수액을 확인하더니 아버지에게 연결되어 있는 기계로 눈을 돌렸다. 코이는 잠자코 앉아 그녀가 아버지의 상태를 점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곧 병실을 나가려는 그에게 코이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간호사를 보고 코이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괜찮으신 건가요? 그러니까, 너무 깊이 주무시는 거 같아서…….”

“수액에 약이 섞여 있어서 그래.”

간호사는 간단히 설명했다.

“상태는 변함이 없으시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렴. 금방 깨실 거야.”

그는 위로라도 하듯 미소를 지은 뒤 돌아서서 병실을 나갔다. 코이는 그 자리에 앉은 채 다시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문득 아버지가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코이는 그가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코이.”

고개를 돌려 아들을 확인한 아버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그의 메마른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드는 것을 코이는 보았다.

“……있어 줬구나, 내 곁에…….”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코이는 휴지를 꺼내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더 주무세요.”

코이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침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좀 더 쉬셔도 돼요. 저는…… 계속 여기 있을 테니까.”

말을 맺은 뒤 코이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듯 그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코이.”

잦아드는 음성으로 속삭인 그가 손을 내밀었다. 코이가 잠자코 그 손을 잡아 주자 아버지는 그제야 안도한 듯 눈을 감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곧 차분한 숨소리가 들리고 그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코이는 그 자리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아버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조금씩 창밖이 밝아지고 있었다. 해가 뜨는 것이다.

*

떠오르는 태양이 대합실을 환하게 비췄다. 수많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애슐리는 멍한 눈을 깜박이며 맥없이 앉아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각, 역의 대합실에는 가끔씩 오가는 역무원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서 몇 명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점차 다가오는 무리의 발소리에도 애슐리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였다. 마침내 그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선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애슐리 밀러 씨.”

애슐리가 반응을 보인 것은 몇 초 뒤였다. 천천히 시선을 향한 곳에는 아버지의 비서가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사무적인 음성으로 덧붙였다.

“알고 있죠? 코너 나일즈는 오지 않으리란 걸.”

애슐리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

허탈한 듯한 짧은 탄식이 마치 웃음처럼 입가로 새어 나왔다. 대합실에 넘치는 햇살의 양만큼 오가는 사람들도 점차 많아졌다. 하지만 그 안에 애슐리가 밤새워 기다린 얼굴은 없을 것이다. 이제 그도 알고 있었다.

애슐리는 잠자코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폈다. 먼저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비서가 눈짓을 하자 경호원 중 한 명이 재빨리 애슐리의 트렁크를 챙겼다.

그들이 대합실을 떠나 저택으로 돌아갈 때까지 애슐리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도미니크 밀러는 블랙퍼스트 눅(Breakfast Nook)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아담한 실내에 놓인 원목 테이블 앞의 다이닝 체어에 앉아 평화롭게 식사를 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이질적이었다.

포크를 내려놓은 그가 블랙커피를 입으로 가져갔을 때,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그와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섰다.

“주니어가 돌아왔습니다.”

“그렇군.”

도미니크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절도 있는 동작을 지켜보던 비서가 입을 열었다.

“……만약에 나일즈가 발현했다면 허락하셨겠죠?”

도미니크가 처음으로 비서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웃음기라고는 없는 차가운 얼굴로 그가 말했다.

“안 했잖아.”

비서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이런 질문을 하다니, 분명히 선을 넘었다. 조용해진 비서를 내버려 둔 채 도미니크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헤어질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군. 달아나는 것조차 못 할 줄이야.”

서늘한 조소를 지은 도미니크가 와인글라스를 건배하듯 들어 보였다.

“불쌍한 내 아들, 버림받다니.”

비서는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도미니크 밀러의 전용기가 동부로 떠난 것은 그날 늦은 오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저택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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