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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133/216)

133화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심장은 점차 빨라졌다. 애슐리가 자신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발은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점점 더 빨라지기만 했다. 어서 애슐리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다른 건 떠올릴 여유도 없었다.

마침내 애슐리가 있는 2층 방의 문 앞에 섰을 때는 들뜬 심장과 가쁜 호흡 때문에 잠깐 현기증마저 느꼈다. 코이는 심호흡을 한 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떨리는 손을 움직여 마침내 문을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하고. 곧이어 활짝 열린 문 너머로 평범한 방 안의 정경이 펼쳐졌다. 한쪽에 보이는 킹사이즈 베드와 건너편에 벽난로가 있는 실내에는 그를 향해 등을 돌리고 선 남자가 있었다. 훤칠한 키와 넓은 어깨는 분명 코이가 알고 있던 그였다.

코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등 뒤로 문을 닫자 아래층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베란다로 이동했다. 떨리는 발을 몇 걸음 간신히 떼었을 때, 뒤늦게 인기척을 눈치챈 듯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

코이는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물끄러미 코이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다소 헝클어진 백금발도, 훌쩍 큰 키도, 코이를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도 전부 그대로였다.

애쉬다.

코이는 그만 눈앞이 흐려져 급히 코를 훌쩍거렸다. 애슐리는 그대로인 듯하면서도 달랐다. 화이트셔츠에 넥타이, 슈트를 깔끔하게 갖춰 입은 그는 어딘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당연할 거리감에 머뭇거리는데, 애슐리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래 봤자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린 게 전부였다.

어.

코이는 또다시 멈칫했다. 그제야 알았다. 가장 큰 이질감이 뭐였는지를. 애슐리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끝이 빨갛게 피어오르는 담배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연기를 들이마신 애슐리가 천천히 숨과 함께 그것을 뱉어 냈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에 코이는 말문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느새 두 눈에 괴었던 눈물이 사라져 뒤늦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오랜만이야.”

“……그래.”

애슐리가 대답했다. 그가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데에 코이는 그나마 안도했다.

“다, 담배 피우네.”

그나마 무난한 화제를 골라 말하자 애슐리는 보란 듯이 담배를 입에 가져가며 대답했다.

“이제 운동선수가 아니니까.”

“그래…….”

그래도 아직 그들은 담배나 술을 살 나이는 되지 않았다. 확실히 애슐리는 변했다. 코이를 바라보는 서늘한 얼굴이 특히 그랬다. 그 때문에 코이는 더 이상 애슐리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애슐리의 등 뒤로 남빛의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애슐리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함께 날아와 코이는 작게 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애슐리가 한 번 더 연기를 빨아들이더니 곧 그것을 베란다 울타리에 비벼 껐다.

한 손을 들어 자기가 뱉어낸 연기를 휘휘 저어 흐트러뜨리는 모습을 본 코이는 다시 마음이 따뜻해졌다. 역시 애슐리는 애슐리였다. 여전히 자신을 배려해 주는 모습에 작은 자신감을 얻어 입을 열었다.

“저기, 대학은…… 어떻게 됐어? 붙었지?”

“그래.”

애슐리의 대답은 그게 끝이었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코이는 다시금 머리를 쥐어짜 다음 말을 꺼냈다.

“아, 아버지랑 같은 대학?”

애슐리는 이번엔 대답조차 하지 않고 대신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코이는 난감해져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애슐리와의 사이에서 이런 서먹한 분위기는 처음이라 코이는 어떻게 이 상황을 무마해야 좋을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막막해하며 괜히 주변만 두리번거리는데, 애슐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어, 응.”

황급히 대답하며 시선을 고정하자 애슐리가 코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날, 왜 오지 않았어?”

코이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런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상 직접 듣게 되자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코이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곁을 떠날 수가 없었어.”

“……전화는?”

잠시 말이 없던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전화는 왜 안 했어?”

코이는 솔직히 대답했다.

“아버지가 응급실에 가시고…… 갑자기 돌아가신다는 얘길 듣고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미안해.”

이 부분은 진심이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미처 전화를 할 정신이 나질 않았다. 겨우 이성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은 아버지가 병실로 옮겨지고 단둘이 남겨진 다음이었다.

하지만 그때 역시 계속해서 벨 소리가 울리는 걸 알면서도 차마 그것을 받을 수 없었다. 이유는 역에 가지 못했던 것과 같았다. 그리고 애슐리 또한 어느 정도 그것을 짐작한 듯했다.

“코이, 내가 궁금한 건 말이지.”

그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가 한숨을 내쉬고 대신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넌 그때 잠깐이라도 역에 올 수 있었을 거야.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아버지가 아프다곤 해도 위기는 넘겼으니까 잠깐 비우는 정도도 못 했다는 건 말이 안 돼.”

애슐리는 아주 오랫동안 그날의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동부에 가서도, 대학 진학을 위해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그 일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마침내 애슐리는 답을 찾을 기회를 얻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누르며 평소보다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넌, 나한테 올 생각이 없었던 거야?”

코이는 즉시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흔들리는 눈동자로 애슐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말이 맞는다. 잠깐이라도 역에 갈 수는 있었을 것이다. 직접 얼굴을 보고 설명을 하고, 그랬으면 애슐리도 좀 더 이해해 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코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를 그는 부정할 수 없었다.

“……미안해.”

코이는 더 이상 애슐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여 버렸다.

“네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거 같았어. 역에 갔다면, 난 아버지를 버리고 너와 함께 떠났을지도 몰라.”

애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자코 코이를 응시할 뿐이었다. 염치가 없어 그저 발끝만 보고 있는데, 애슐리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넌 나를 버린 거구나.”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때 애슐리의 표정을 코이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애슐리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허탈한 듯, 포기한 듯,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기대했던 마음이 무참히 짓밟힌, 참담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애쉬.”

코이가 어렵게 입을 열었으나 애슐리는 한 손을 들었다. 이제 됐다는 듯이.

“넌 대학 포기했다면서?”

코이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아버지 때문에?”

코이는 이번에도 수긍해야 했다.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나밖에 없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애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숨이 꽉 막힌 듯한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코이는 어렵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 목에 걸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애쉬, 넌…… 파티가 끝나면 동부로 돌아갈 거지?”

“그래. 여긴 널 만나러 온 거니까.”

너무나 선뜻 덧붙인 말에 코이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당황해하는 그를 보며 애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내 생각이 틀렸을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 역시 그렇구나.”

어딘지 해탈해하는 듯한 그의 말에 코이는 위기감을 느꼈다.

“애, 애쉬.”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 코이가 말을 이었다.

“저기, 전화는 해도 되지?”

애슐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코이는 사그라드는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이렇게 헤어지지 않아도 되잖아. 방학 때 만난다든가…….”

“넌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아.”

애슐리가 말했다. 내용에 비해 가벼운 말투에 코이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졌다.

“……협박하는 건 아니지?”

“글쎄.”

애매한 대답에 코이는 긴장해 어깨를 움츠렸다.

“날 때릴 거야……?”

애슐리가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곧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때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지.”

당황한 코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런 코이를 본 애슐리는 시선을 거두더니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코이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애슐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마침내 바로 앞까지 왔을 때, 코이는 무심코 긴장해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대로 코이의 옆을 스쳐 갈 것 같던 애슐리가 갑자기 코이의 허리를 안아 끌어당겼다.

코이는 놀라 숨을 삼키며 그대로 끌려갔다. 그대로 입술이 겹쳐졌다. 부드럽게 맞닿았나 싶었던 입술은 세게 맞물리고, 곧바로 혀가 뒤섞였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굳었던 코이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빈틈없이 몸을 밀착하자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

이대로 영원히 이 키스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코이는 자신의 온 마음을 담아 애슐리의 키스에 응했다. 혀를 감아올렸던 애슐리가 코이의 입술을 깨물고 빨아들였다. 가쁜 숨결이 타액에 젖은 입술에 차가운 냉기로 와닿았다.

간신히 키스를 멈췄을 때, 둘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잠시 코이를 내려다보던 애슐리가 짧게 웃었다.

“취했어.”

담배만이 아니라 술도 마시는 걸까? 코이는 문득 생각했다. 하지만 키스를 멈춘 다음에도 여전히 애슐리는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준 채로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같이 동부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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