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에필로그
“끝났습니다.”
단조로운 음성을 듣고 애슐리는 눈을 떴다. 팔의 주사를 제거한 의료진이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소매를 내리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문득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퀭한 눈동자와 눈 밑의 그늘이 창백한 얼굴에서 유독 도드라졌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 그는 머리칼을 쓸어 넘긴 후 돌아섰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대신 단추를 두어 개 푼 화이트 셔츠에 슈트를 걸친 애슐리가 밖으로 나가자 복도에 서 있던 여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애슐리는 그가 주사를 맞는 동안 몇 시간에 걸쳐 기다린 아버지의 비서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지나쳐 걸어갔다. 그런 그의 반응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비서는 선뜻 뒤를 따라나서며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스튜어드의 말로는 페로몬이 많이 쌓여 있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없어.”
당연하다. 페로몬을 빼는 주사를 맞았으니까. 그녀는 허락도 없이 애슐리를 따라 걸으며 말을 이었다.
“도미니크 밀러 씨가 상태를 알아보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약으로 페로몬을 빼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애슐리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 신경질적인 웃음소리에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걱정이라고? 그 남자가? 나를?”
여전히 웃음이 섞인 음성으로 애슐리는 물었다. 여지없이 돌아온 빈정거리는 말투는 이제 일상적인 것이나 다름없다. 비서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페로몬을 빼지 못하는 건 혹시 그 아이 때문인 건지 궁금해하시더군요.”
처음으로 애슐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하지만 동요는 길지 않았다. 그는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정상적인 방법이라니, 수십 명이 나체로 뒤엉켜서 섹스하는 게?”
“극알파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니까요.”
비서의 대답에 애슐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냉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다수가 하면 정상인 건가?”
“……그래서, 나일즈 씨 때문인가요?”
비서는 놀랍게도 대답을 회피했다. 애슐리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앞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코이 때문이라고 하면 그 남자는 이제 그렇게 하라고 할지도 모른다. 주사로 빼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지만 이젠 애슐리가 거절이었다.
다시 만나면 그를 죽일지도 몰라.
건물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며 비서가 말문을 열었다.
“파티에서 페로몬을 빼는 게 싫다면 정기적인 상대를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몇 명 후보를 골라 봤으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어느새 그들은 애슐리가 세워 둔 차 앞까지 왔다. 벤테이가에 올라탄 애슐리가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먼저 비서가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내리고 서류철을 받아 둔 애슐리에게 비서는 말했다.
“가능하면 모두 만나 보시는 쪽을 권합니다만 내키지 않으면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분을 몇 분 추려서 알려 주십시오. 날짜와 장소는 이쪽에서 정하겠습니다.”
애슐리는 대답 대신 서류철을 아무렇게나 조수석에 던져 버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비서는 그 자리에 선 채 멀어지는 차를 바라볼 뿐이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로 들어서자 그의 차는 곧 번잡한 차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사방에서 울려 대는 클랙슨 소리도 이제는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았다. 애슐리는 아직 따끔거리는 통증이 남아 있는 팔을 문지르며 정면을 응시했다.
지금껏 말이 없던 도미니크가 이런 제안을 한 것은 곧 그의 졸업이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졸업과 함께 결혼이라니, 식상하면서도 지루한 패턴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안전하기도 하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그는 한 번도 누굴 사귀지 않았다. 굳이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고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뿐이다. 페로몬을 빼는 파티에도 몇 번 갔었다. 하지만 오메가의 페로몬 향기가 역겨워 몇 번이나 구역질을 하고 실신하다시피 하는 일을 반복하자 남은 방법은 주사로 페로몬을 빼는 것밖에는 없었다.
스스로가 실험체가 된 덕에 약은 조금씩 좋아져서 처음처럼 심하게 속이 뒤집히거나 무기력감으로 며칠을 고생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를 담당하고 있는 스튜어드 박사는 애슐리를 안타까워하면서도 흔치 않게 극알파의 샘플이 생겼다는 걸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극알파에 대한 연구를 하는 기관도 제대로 없는 판에 실험 대상이 되기를 자청하다니, 이런 일은 결코 흔치 않으니까.
물론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이런 방식도 슬슬 질려 가고 있었다.
도미니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차피 지속적으로 페로몬을 빼야 한다면 결혼하는 게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누가 되든 상관없다.
마침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선 사이 애슐리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깊이 니코틴을 들이마시자 안정감이 찾아왔다.
처음 담배를 피우게 된 계기는 파티에서 온통 뒤섞인 페로몬 향기를 견딜 수가 없어 시작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피우고 있다. 술과 약물도 해 봤지만 극알파는 취하거나 중독이 되는 일도 없었다. 참으로 지루한 인생이 되어 버렸다.
다시 신호가 바뀌고, 애슐리가 차를 출발시켰다. 아직 열려 있던 창으로 매연과 함께 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그는 버튼을 눌러 차창을 닫아 버렸다.
*
그녀의 이름은 멜라니였다. 애슐리와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니냐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이미 여섯 명의 상대를 만난 다음이었다.
애슐리의 종을 고려해 도미니크는 모든 상대를 오메가로 정해 놓았다. 그들이 모두 여자인 이유는 애슐리가 이전에 사귀었던 상대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오직 코이만이 예외적으로 남자였는데, 그걸 근거로 도미니크는 애슐리가 남자보다 여자에게 흥미를 보일 거라고 단정했다.
애슐리의 경우에는 사실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고 남자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그는 무엇에도 흥미가 없어졌다. 인생은 지루하고, 지루하고, 또 지루할 뿐이었다. 정해진 삶을 살다 보면 그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때문에 약속 시간에 맞춰 장소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그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전의 상대들을 퇴짜 놓은 것은 단지 그들의 향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어 명은 페로몬 향이 너무 강해 구토를 일으켰다. 그런 점에서 이번 상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 페로몬 향기가 거의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저, 제가 히트사이클 때가 아니면 향이 별로 나질 않아서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애슐리에게는 오히려 그쪽이 좋았다. 무난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함께 길을 걷다가 애슐리의 차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저.”
현관 앞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해 준 후 돌아서는 애슐리를 멜라니가 불러 세웠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그를 향해 멜라니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게 분명한 그녀의 모습에 애슐리는 그러나 아무 감흥도 받지 못했다. 어차피 결혼은 리스트에 있는 사람 중 한 명과 해야 한다.
한 번 더 만나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곧바로 멜라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뺨이 붉게 물들었다. 애슐리는 그 자리에 서서 멜라니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주말에 함께 영화를 볼까요?”
“조, 좋아요!”
멜라니는 즉시 응했다. 애슐리가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순간 멍해진 멜라니의 얼굴에 애슐리는 한층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토요일 4시에 데리러 오죠. 괜찮습니까?”
“네, 물론이죠. 괜찮아요, 아주 좋아요.”
그녀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겁지겁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애슐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 돌아서서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여러모로 이전의 상대와는 달랐다. 그냥 대충 아무하고나 결혼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좀 더 그녀를 만나 보고 싶었다. 그리고 주말마다 이어지던 데이트는 사흘에 한 번꼴로 주기가 빨라졌고, 둘은 곧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두 집안에서 본격적으로 결혼 이야기가 나온 것은 졸업을 한 달여 남긴 어느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