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주변은 고요했다. 코이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넬슨을 바라볼 뿐이었다. 갑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했던 그때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를 보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고 겁에 질렸던 아직 어린 코이가 불시에 되살아났다. 이제 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입 안은 바짝 마르고 목은 타들어 가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코이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서 있기만 했다. 시간이 하염없이 길게 흘러가는 듯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넬슨이었다. 벌써 저녁이 다 된 시간인데도 그는 마치 지금 막 잠에서 깬 듯 푸석푸석한 얼굴로 늘어져라 하품을 하더니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쇼.”
껄렁거리는 말투로 내뱉고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하품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코이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자 호화로운 실내가 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저택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밖에서 이미 봤지만 역시나 감탄할 만큼 넓은 내부에 잠시 멈칫했던 코이는 급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저, 고장이 난 곳은 어디입니까?”
혹시나 목소리가 떨릴까 봐 두려워 한껏 낮은 소리로 묻자 넬슨은 별다른 반응 없이 허우적거리며 한쪽으로 걸어갔다.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 계단은 중앙에서 하나로 합해졌다가 다시 둘로 나뉘었다. 코이는 넬슨의 뒤를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기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넬슨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그는 문제를 일으켜 학교를 떠났고, 그 이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동부에 와 있었다니. 게다가 굉장한 부자가 된 듯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저택은 온통 대리석이 깔려 있는 데다 곳곳에 금칠이 되어 있어 화려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그의 성공을 말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코이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따로 있었다.
날 알아보지는 못한 모양이야.
넬슨의 반응은 너무나 평범했다. 그냥 집수리를 하러 온 방문객을 맞이한 주인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긴 앨도 내가 많이 변했다고 했으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시선이 넬슨의 머리에 닿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릴 때는 넬슨이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코이보다 작았다. 사실 그는 보통 키거나 그보다 좀 작았을 것이다. 코이는 그보다 더 작았고, 훨씬 더 약자였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탈모가 시작되고 있구나.
그의 정수리 쪽이 벌써부터 휑하다는 걸 눈치챘을 때, 넬슨이 어느 방의 문을 열었다.
“여기야.”
넬슨이 멈춘 곳은 2층의 라운지였다. 전날까지 파티를 했는지 실내는 빈 술병과 온갖 쓰레기로 엉망진창이었는데, 그 안에 몇 명의 남녀가 이리저리 뒤엉켜 술을 마시거나 곯아떨어진 게 보였다. 아마 밤새워 놀다 지쳐 쓰러졌는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했다. 코이는 그들을 못 본 체하고 서둘러 라운지 한쪽에 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간단히 술과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작은 주방에는 그가 고쳐야 할 싱크대가 있었다. 물론 그곳도 엉망진창이었다.
수리를 하기 전 먼저 아무렇게나 내버린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데, 뒤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또 누가 왔어?”
역시나 잔뜩 취해 발음이 명확하지 않은 물음에 넬슨이 별반 다르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수도 고치러. 그냥 내버려 둬.”
“난 또, 누가 우리 천국에 찾아왔나 했지이.”
다른 목소리가 키득거리며 끼어들었다. 마침 쓰레기를 한쪽에 모으던 코이는 얼떨결에 보고 말았다. 그들이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하얀 가루를 코로 들이켜는 것을. 순간 굳고 만 코이의 머릿속으로 사장의 경고가 떠올랐고, 동시에 그는 눈치챘다. 넬슨이 어떻게 해서 이런 부를 손에 넣은 건지.
“크으, 역시 네 물건은 최고야. 어디서 이렇게 질 좋은 걸 구하는 거야?”
코를 훌쩍거리며 감탄하는 말에 코이는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는 걸 확신했다. 더 이상 지체할 틈이 없었다. 그는 전보다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일을 끝내고 여길 떠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뒤에서 넬슨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이건 나만 구할 수 있다고. 괜히 허튼 생각 하지 마, 날 건드리면 너희들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엉망으로 뭉개진 발음과는 달리 꽤 섬뜩한 경고였다. 물론 코이는 이런 유의 약물을 다루는 사람들과 연관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다급하게 수도를 열어 문제를 확인했다. 뒤에서 다른 남자가 말했다.
“하아아…… 좋겠다, 극알파들은. 평생 이런 걸 넘치도록 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거잖아? 그 자식들은 술에도 취하지 않고 약에도 중독되지 않으니까. 씨발, 거기다 돈은 썩어나지.”
곧 매캐한 연기가 퍼졌다. 코이는 담배인가, 생각했지만 언뜻 시야에 들어온 그것은 담배와는 생김새가 달랐다. 다른 녀석이 그것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너, 거기 갔었지? 페로몬 파티. 약을 쓰는 건 대부분 거기 아냐?”
“궁금해. 거긴 어때? 극알파들이 잔뜩 모여있다면서? 정말 다 보라색 눈이야?”
“비싼 술이랑 약이 아주 널렸다던데, 거긴 그냥 아무나 잡고 섹스를 한다잖아.”
“천국이지.”
“천국이야.”
뒤따라 웃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코이는 묵묵히 배수관을 분리해 안에 쌓인 이물질을 확인했다. 역시나 음식물 찌꺼기와 알 수 없는 불쾌한 덩어리가 뭉쳐 있는 것을 긁어내는데, 넬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들이 아무리 잘나 봤자 페로몬 쌓이면 기억도 못 하는데 뭐. 어차피 내 약 없으면 파티가 굴러가지도 않으니까 말이야…….”
곧 이어진 자화자찬을 듣고 있던 다른 여자가 물었다.
“그럼 파티가 아니라도 그 극알파들하고 거래를 해? 연락처도 알고 그런 거야?”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이 도시에서 나 말고 누가 이렇게 질 좋은 약을 수시로 대 줄 수 있겠어?”
이어서 그는 자랑스레 유명한 극알파들의 이름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정치인부터 시작해 연예인, 기업의 회장, 저명한 교수까지 줄줄이 흘러나오는 이름에 모두가 감탄사를 뱉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럼 무슨 일이 생겨도 넌 걱정이 없겠네.”
누군가 한 말에 넬슨이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 변호사가 누군데.”
곧이어 나온 이름에 코이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바로 애슐리 밀러라고. 너희들도 알고 있지? 밀러 로펌의 그 녀석.”
“뭐?”
“밀러라고? 정말?”
놀란 코이의 마음을 대변하듯 주변에 있던 녀석들이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거기 엄청 비싸잖아! 게다가 애슐리 밀러가 네 담당 변호사라고?”
“말도 안 돼, 거짓말이지?”
“맞아, 그건 너무 갔어.”
곧이어 야유가 흘러나오자 넬슨은 곧바로 화를 내며 거친 음성으로 내질렀다.
“이 자식들이, 내 말을 못믿는다는 거야? 애슐리 밀러는 말이지, 고등학교 때 내 부하였다고.”
엑.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에 찬 탄성을 내뱉을 뻔했다. 가까스로 그것을 참았지만 모두의 반응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너무 간다, 진짜.”
“약도 적당히 해야지.”
“맞아, 머리에 구멍이 난다니까. 저 자식처럼.”
이어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요란한 소리로 웃고 있었다. 웃지 않는 건 단 두 사람, 코이와 넬슨뿐이었다. 화가 나 얼굴이 뻘게져 부들부들 떨던 넬슨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달려갔다. 금세 돌아온 그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다들 닥쳐, 씨발 새끼들아!”
넬슨이 고함을 질렀다. 코이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때까지 웃고 떠들던 녀석들은 그런 그를 보고 또다시 박장대소를 했다. 약에 취해선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색이 되어 버린 코이의 시야에 넬슨이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이 보이고, 이어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웃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그들을 전부 체포한 것은 그로부터 10여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불행히도 코이 또한 그들과 함께였다.
* * *
사방에서 고함 소리와 울음소리, 코 고는 소리가 난무했다. 좁은 유치장 안에 쭈그리고 앉은 코이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자신이 감옥에 갇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본인은 그저 수리를 의뢰받아 갔을 뿐인데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걸까.
체포된 순간부터 그는 계속해서 자신은 무관함을 주장했지만 경찰은 건성으로 넘기고 대충 그들을 한공간에 쑤셔 넣었다. 덕분에 코이는 처음 보는 약쟁이들은 물론 넬슨까지 함께 있는 비좁은 유치장 안에 남겨졌다.
어떻게 하지.
머릿속에는 그들이 약물을 하던 모습만 가득히 맴돌았다. 혹시나 이걸로 전과라도 생기면 어쩌지, 생각하자 두통이 생길 것 같았다. 하아아, 저절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넬슨, 뭐라도 해 봐!”
누군가 소리쳤다. 개중에 조금이나마 정신이 든 녀석들의 관심이 모두 한곳에 집중되었다. 코이 또한 무심코 그를 바라보자 넬슨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뭘 어쩌라는 거야, 씨발 새끼들아. 다 너희들 때문이잖아.”
곧바로 돌아온 화살에 처음 소리친 녀석이 기죽지 않고 내뱉었다.
“여기서 나가게 해 줘야지. 너 아는 사람 많다면서? 연락해 보라고, 빨리 빼 달라고.”
“누구한테 무슨 연락을 하라고?”
기가 막힌다는 듯 넬슨이 빈정거리자 다른 녀석이 난데없이 소리쳤다.
“애슐리 밀러! 네 변호사라면서!”
뜻밖의 이름에 넬슨이 그대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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