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어수선했던 유치장 안의 분위기가 고요하게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술렁이며 넬슨의 눈치를 봤던 녀석들이 의아해하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코너 나일즈?”, “그게 누구야?”,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경찰이 부른 것은 틀림없이 그의 이름이었다. 코이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넬슨이 당황해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코너 나일즈? 누구야, 그게…….”
황당해하는 것이 역력히 느껴지는 음성이었지만 코이의 귀에는 선뜻 들어와 박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한곳에만 못박혀 있었다. 상대방이 그렇듯이.
애슐리가 날 찾아왔어.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장소에서,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애슐리는 단번에 코이를 찾아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경찰보다 먼저 코이를 발견한 애슐리의 시선이 줄곧 그에게 못 박혀 있었으니까.
내가 이렇게나 변했는데도.
불현듯 코이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자 곧 그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예전에도 그랬다. 애슐리는 항상 자신을 바로 찾아냈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도, 보통보다 작은 키였던 코이가 사람들사이에 파묻혀 있을 때에도 그는 손쉽게 코이를 발견하고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그걸 깨닫자 코끝이 찡해져 그는 황급히 숨을 들이켰다. 경찰이 다시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코이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대답했다.
“네, 네.”
별거 아닌 말을 하는데도 왠지 쑥스러워져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 접니다.”
뜬금없이 쉰목소리가 흘러나와 그는 황급히 헛기침을 했다. 경찰이 나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 코이는 서둘러 몸을 움직여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넬슨의 멍한 시선 또한.
“어…… 어어?”
뒤에서 멍청한 탄성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곧 넬슨이 소리쳤다.
“잠깐, 뭐라고? 누구? 코너 나일즈? 그 찐따?”
거친 음성에 다른 녀석들이 어리둥절해하며 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뭐야? 왜 그래?”
“어떻게 된 거야? 너, 저 사람이랑 아는 사이였어?”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묻는 말에 넬슨이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함을 질렀다.
“너, 정말 그 녀석이야? 병신 찐따 코너 나일즈? 씨발, 정말이라고?”
그나마 남아 있던 머리칼을 마구 잡아당기던 그가 뒤늦게 정신이 든 듯 황급히 손을 떼고 대신 코이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저 자식 고등학교 때 내가 부려먹던 병신 새끼라고. 허구한 날 나한테 쥐어터지던 녀석인데, 얼마나 찐따였는지 알아? 야, 코이! 너 이리로 와. 뭘 멀뚱거리고 있어? 어서 튀어와, 당장 여기 머리 박으라고! 빨리 말 안 들어? 또 맞고 싶어? 콱, 그냥!”
그는 금세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코이에게 침을 뱉고 가차없이 발길질을 하던 고등학생으로.
예전으로 돌아간 것은 넬슨만이 아니었다. 코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순간에 작고 볼품없던 코너 나일즈가 되어 버렸다. 이제 넬슨보다 키도 더 커지고 머리숱도 훨씬 많은데, 어째선지 코이는 겁에 질려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명령에 따라 예전처럼 납작 엎드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몸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못 한 것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엉거주춤한 채 그 자리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코이를 지켜보던 애슐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천천히 그의 입술이 열렸고, 다시 만난 후 처음으로 코이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코이, 어서 나와.”
그의 음성은 예전보다 더 나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울림이 좋은 굵은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코이가 주저하다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애슐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그 자리에 서서 명령했다.
“나오라고, 어서.”
나한테 와.
왠지 코이는 그의 숨겨진 또다른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 애슐리는 말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그때와 똑같이.
마치 홀린 것처럼 코이는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주변이 모두 사라진 듯했다. 남아 있는 건 오직 애슐리와 자신뿐이다. 시합이 끝나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애슐리, 환하게 웃던 얼굴, 열정적으로 퍼붓던 키스.
〈좋아해, 코이.〉
마치 환청처럼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달아올라 있던 뺨도, 가쁜 숨결도, 모두가 바로 눈앞의 일처럼 생생했다.
〈나랑 사귀자.〉
들뜬 음성으로 폭탄선언을 했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을 때, 현실이 갑자기 코이를 찾아왔다.
지금의 애슐리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지도, 얼굴을 붉히지도 않는다. 그저 냉정하게 코이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서늘한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코이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유치장의 문을 닫고 열쇠로 잠근 것이다.
그제야 소리가 하나씩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뒤에서 넬슨이 어마어마하게 분노해 마구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대충 욕설과 함께 애슐리를 비난하고 코이를 업신여기며 모욕하는 말들이었다.
나 때문에 애쉬까지 욕을 먹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자 코이는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런 그를 흘긋 내려다봤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먼저 나가 있어.”
“어?”
낮은 음성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코이는 애슐리와 눈이 마주치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경찰에게 다가가 뭔가 말을 하는 애슐리를 보고 코이는 황급히 시키는 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뒤늦게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애쉬야.
경찰서 앞에 서서 숨을 가다듬는 동안 조금씩 현실감이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머릿속을 냉정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곧이어 벅찬 감동이 올라왔다.
정말로 애쉬를 만났어.
참지 못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을 때였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코이는 그대로 멈춰 섰다.
경찰서에서 나온 애슐리가 시선을 내렸다. 또다시 마주 본 그의 모습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유치장 안에서도 이미 한 차례 그를 보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자 또다른 기분을 느꼈다. 에리얼은 애슐리가 변했다고 말했으나 코이의 생각은 달랐다. 매끈하고 높은 콧대와 넓고 두꺼운 아랫입술은 물론 강인한 턱선, 단단한 어깨에서 이어지는 좁은 허리와 끝없이 긴 다리까지, 그는 예전 그대로였다. 다만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 애슐리는 완전히 남자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보니 도미니크 밀러와 더 닮아 보였다. 아마 그것은 애슐리에게서 앳된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코이는 어떻게든 그에게서 예전의 모습을 찾으려 노력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 도와줘서.”
목소리가 갈라져 황급히 헛기침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일시에 밀려와 어떤 것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애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코이는 부산한 머릿속을 뒤적여 간신히 무난한 화제를 꺼냈다.
“날 어떻게 알아봤어? 다들 내가 많이 변했다고 하던데.”
어렵게 웃음을 떠올린 코이에게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덜컥 심장이 내려앉고 만 코이가 그대로 굳었다. 그런 코이를 한 차례 훑어본 애슐리가 그의 얼굴로 다시 시선을 고정한 뒤 입을 열었다.
“별로 안 변했는데.”
처음으로 사적인 말을 꺼낸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저음이었으나 코이를 안심시키기엔 충분했다.
“그, 그래?”
안도감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자 애슐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
“그…… 그렇구나. 하하.”
코이는 어색한 소리로 웃고 말았다. 예상했던 대답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가고 있긴 하다. 지금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넬슨도 날 못알아봤었거든. 그게, 내가 많이 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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