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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145/216)

145화

뭔가 중요한 얘기를 놓친 것 같아 코이는 잔뜩 귀를 곤두세우고 다음을 기다렸으나 애슐리는 선뜻 말을 잇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듯이 느껴진 뒤 ―실상은 고작해야 5분여가 지났을 뿐이지만― 애슐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제 귀는 움직이지 않는 거야?”

“어?”

난데없는 물음에 코이는 무심코 자신의 귀로 손을 가져갔다. 애슐리의 시선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을 느낀 그는 무안해져 얼굴을 붉혔다.

“……고쳤어. 이젠 내가 일부러 움직이려고 하지 않으면 아무 때나 움직이고 그러지 않아.”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그의 귀를 바라볼 뿐이었다. 코이는 머쓱해하며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상하잖아, 귀가 움직이는 건. 습관을 고친다는 게 쉽진 않았는데 그래도 노력하니까 어떻게 되긴 하더라고.”

하하, 웃었지만 애슐리는 웃지 않았다. 여전히 코이의 귀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 때나 움직였던 건 아니잖아.”

코이는 애꿎은 귀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의 말이 맞다. 만약 그 버릇이 아직 남아 있었다면 애슐리를 보자마자 귀는 정신없이 까딱거렸을 것이다. 다시 그를 만났을 때 코이의 심장은 기쁨으로 터질 듯이 두근거렸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버릇을 고쳐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고, 그런 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오히려 애슐리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 코이는 최대한 담담한 척 꾸미며 그와의 관계를 새롭게 시작할 생각이었다.

다시 애슐리와 어떻게 해 보고 싶다는 바람은 감히 가져 본 적이 없다. 코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고, 벌써 소원을 이루었다. 그러니 이젠 서부로 돌아가는 게 맞는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코이는 스스로에게 좀 더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지금 자신의 인생에 남은 건 애슐리에 대한 마음뿐이지 않은가.

“저기, 애쉬…….”

“여긴 왜 온 거야?”

어렵게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애슐리에게 말을 할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찌푸린 미간과 차가운 말투에 코이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던 코이는 고개를 숙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너를, 만나고 싶었어.”

기어들어 가는 음성에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코이는 자신이 멋대로 굴어 애슐리의 마음을 더 상하게 했다는 생각에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싶어졌다. 충동을 꾹 참고 그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그게 다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속삭인 말에 애슐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코이.”

“으, 으응.”

황급히 대답하며 고개를 들자 곧바로 심장을 찌를 듯한 서늘한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멈칫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내가 널 반가워할 거라고 생각해?”

순간 코이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저 눈만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는 코이를 향해 애슐리가 피식 웃었다. 넌 정말 구제불능이라는 듯이.

“넌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구나.”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코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얗게 빈 머릿속에는 애슐리의 말만이 계속해서 맴돌 뿐이었다.

〈안녕, 코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그의 인사가 불현듯 되살아났다. 그제야 자신이 여기까지 왔던 이유가 또 하나 떠올랐다. 지금 말해야 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슐리에게는 그저 변명일 뿐이지 않을까.

또 다른 목소리가 코이를 가로막았다. 이성은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그를 말렸지만 도저히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땐…… 내가 널, 실망시켜서, 정말 미안해.”

너무나 늦었지만 사과해야 한다. 그때 상처받은 애슐리의 얼굴은 줄곧 코이를 괴롭혀 왔다. 이 순간, 당사자를 앞에 둔 지금도 코이는 그때 그의 얼굴을 겹쳐 보고 있었다. 이렇게 차갑고 쌀쌀맞게 자신을 대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코이는 자신이 애슐리에게 상처 줬던 바로 그날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 내가 그때, 널 선택하지 못했던 거에 대해.”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성대가 갈라져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코이는 당장 물을 벌컥벌컥 마셔 버리고 싶은 걸 참고 어렵게 말을 끝냈다.

애슐리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코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내심 조마조마해하는데, 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가족을 버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턱을 괸 채로 말하는 바람에 그의 발음은 다소 뭉개져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코이는 놀랐다.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자 애슐리는 여전히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우린 어렸고, 무모했어. 너도 어쩔 수 없었겠지, 그런 상황에서 아픈 가족을 버리고 떠난다는 건 대부분 불가능한 모양이니까.”

뜻밖에도 애슐리가 그를 이해한다는 양 이야기하는 것에 코이는 얼떨떨해졌다. 머뭇거리며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피식 웃더니 짧게 덧붙였다.

“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코이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애슐리의 말에는 어디 하나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너무나 이성적인 판단이었고, 누구나 할 법한 말이었으며, 코이를 향한 비난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납득하고 있었다. 아직 어렸던 그들이, 그것도 아픈 부모를 두고 떠나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라는 걸.

물론 그것이 감정적으로도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애슐리의 부모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애슐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들에게서 떠나려 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코이를 선택했던 그를 떠올리면 이런 반응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만큼 코이와 애슐리가 다르다는 얘기도 됐다.

기껏 준비했던 고백이었지만 결과는 어딘지 맥빠진 것이었다. 다음 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코이에게 애슐리가 시큰둥한 얼굴로 감자 튀김을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그래서, 네 아버지는? 어떻게 됐어?”

“어…… 응, 금방 돌아가셨어…… 몇 달 못 버티시고…….”

저절로 수그러지는 머리에 애슐리는 별다른 감흥 없이 말했다.

“내가 기다릴 걸 그랬나?”

코이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곧 돌아가실 테니 기다려 줘,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병세가 심각했다고는 해도 사람의 남은 수명이 얼마인지는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고, 마치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듯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애슐리도 알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코이가 아무 말 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하지만 코이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가 만약에, 기다려 달라고 했으면…… 기다려 줬을까?”

감자튀김을 씹던 애슐리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코이를 바라보던 그가 감자튀김을 넘기고 나서 입을 열었다.

“넌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할 말이 없어져 코이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불편한 침묵이 다시 이어졌다. 다음에 할 말을 필사적으로 찾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놀라 덩달아 일어선 코이에게 그가 말했다.

“이제 얘긴 끝난 거지?”

“애, 애쉬!”

당연한 듯이 계산서를 들고 걸어가는 애슐리의 커다란 보폭을 코이는 황급히 쫓아가 붙잡았다.

“잠깐만, 이건 내가 사기로 했잖아.”

“됐어.”

“아니, 안 된다니까!”

카드를 꺼내려는 애슐리를 한사코 말리며 코이가 간청했다.

“내가 내게 해 줘, 부탁이야. 정말로, 이젠 이 정도 돈은 있어. 충분해.”

제발, 코이는 필사적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물끄러미 코이를 내려다보던 애슐리는 좋을 대로 하라는 듯 뒤로 물러났다. 코이는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서둘러 주머니에서 꼬깃하게 접힌 지폐를 꺼내 카운터 위에 늘어놓았다. 동전까지 끌어모아 간신히 팁까지 지불을 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때까지 옆에 서서 지켜보던 애슐리는 그제야 몸을 돌려 먼저 가게에서 나갔다.

“애쉬, 애쉬!”

황급히 뒤를 쫓아 달려 나간 코이는 애슐리가 차에 타기 전에 겨우 그를 붙잡았다.

“고마워, 와 줘서……. 널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 꼭 다음 약속을 잡고 말겠다. 각오와는 달리 우물쭈물 말을 꺼냈던 코이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저기…… 이런 걸 사 줘서 미안해. 다음엔 더 좋은 걸 살 테니까…… 한 번 더 만나지 않을래?”

애슐리가 ‘싸구려 햄버거’라고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더 좋은 걸 사 주고 싶었고, 그걸 핑계로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바람에 코이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물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애슐리가 무심히 대답했다.

“글쎄, 이번 주말엔 시간이 없는데.”

코이는 별생각 없이 말했다.

“아, 그건 나도 그래. 약속이 있어서.”

애슐리는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내려다보더니 코이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약속?”

코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아, 응. 여기서 사귄 친구가 있는데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어.”

“남자끼리 영화를? 재밌겠군.”

피식 웃는 애슐리를 보고 코이는 머뭇거리며 정정했다.

“어, 줄리는 여자야…….”

애슐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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