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아주 재밌었지?”
영화가 끝나자마자 줄리가 물었다. 코이는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둘은 극장에서 나와 길을 걸으며 계속 영화와 배우에 관한 얘기를 했다. 줄리는 위트가 넘쳤고, 코이는 그녀와의 대화가 무척 즐거웠다. 어느새 그들은 전철역이 보이는 거리까지 도착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코이와 마주 선 줄리가 말했다. 코이 역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덕분에 좋은 영화를 봤어. 고마워.”
캐러멜 팝콘을 먹은 것도 처음이었다. 이렇게 보니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상당히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그의 인생이란 오직 동부에 와서 애슐리를 만나는 게 전부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럼 목표를 이룬 지금은 뭘 해야 하는 걸까.
잠시 멍해져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그럼 앞으로, 나는…….
머릿속이 텅 빈 채로 그냥 멈춰 서 있었을 때였다. 그런 그를 올려다본 줄리는 그만 착각하고 말았다. 남자의 투박한 손과는 전혀 다른 작고 고운 손이 코이의 뺨을 감싸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코이는 그저 보기만 했다. 천천히 내려오는 속눈썹, 부드럽게 감기는 눈꺼풀, 기대로 살며시 벌어지는 입술까지.
〈코이.〉
“아……!”
순간 자신도 모르게 줄리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크게 뜬 시야에 줄리의 놀란 얼굴이 들어왔다. 뒤늦게 코이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깨닫고 그만 사색이 되고 말았다.
“주, 줄리, 미…… 미안해. 저기, 그러니까…… 그게.”
그저 더듬거리며 횡설수설하는 와중에도 뭐라도 변명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은 분명히 떠올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생각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자신을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 부드러운 입술, 떨리는 숨결, 아플 정도로 강하게 몸을 끌어안던 팔, 그리고.
〈난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애슐리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주 많이. 최고로.〉
코이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멈췄다. 그런 그를 향해 애슐리는 다정하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게 너이길 바라.〉
그럴 수 없어.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깨달았을 때, 먼저 정신을 차린 줄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서둘렀나 봐.”
“어?”
뒤늦게 코이가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제야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해 낸 그의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줄리의 존재를. 그런 자신을 깨닫자 더더욱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그런 코이의 모습을 본 줄리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갈게. 내 번호 알고 있지? 다음 연락은 네가 해.”
두 번째 손가락으로 코이의 가슴을 꾹 누른 줄리는 생긋 웃더니 돌아서서 전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만 보던 코이는 마침내 줄리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하아, 저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코이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주말이라 여기저기서 가족과 커플이 행복한 웃음을 나누며 그를 스쳐 갔다. 오직 코이만이 시무룩한 얼굴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아!”
누군가 세게 어깨를 치고 지나갔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남자는 바쁜 걸음으로 벌써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코이는 잠깐 그를 쳐다봤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변엔 어수선한 소음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으나 코이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그때 그렇게 놀라서 뿌리쳤을까.
놀랐다기보다는 거부감이 들었다고 하는 쪽이 맞다. 분명 줄리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전까지 분명히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째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습기가 느껴지는 지하방에 들어서자 그제야 막혔던 숨을 천천히 나누어 쉴 수 있었다.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눕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애슐리가 준 소중한 옷을 그렇게 막 다뤄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조심조심 셔츠의 버튼을 하나씩 풀었다. 평소 낡은 티셔츠만 입던 코이에게 이런 화이트 셔츠는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애쉬가 사 주지 않았다면 절대 입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무심코 떠올렸던 코이의 손이 점차 느려졌다. 애슐리가 이 옷을 사 준 건 줄리와 데이트를 잘하라는 의미였다.
내가 망쳐 버렸어.
당연하지 않은가. 어떻게 감히 자신이 다른 누구를 만나 웃고 떠들고, 다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뿐인데.
버튼을 쥐고 멈춰 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곧 바닥을 향해 축 처지고 만 두 손을 내버려 둔 채 코이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친구 같은 걸 원한 게 아니었어.
코이는 멍하니 떠올렸다. 귓가에 애슐리의 음성이 다시 되살아났다.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불가능해.
문득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코이는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 네가 없는데.
〈친구가 되자.〉
아니, 안 돼. 난 그럴 수 없어. 왜냐면, 왜냐면 나는.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은 이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바닥으로 방울져 떨어졌다. 코이는 멈춰 보려 했지만 눈물은 굴러떨어지기 무섭게 또다시 가득히 차오르고 또 차오르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펑펑 울고 말았다. 이젠 모두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저 제대로 끝맺지 못했던 마음의 종지부를 찍는 것뿐이라고, 남은 건 죄책감뿐이라고 다짐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모두 착각이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너를 잊고, 너에 대한 마음을 접고, 그렇게 모두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아직도 널 이렇게나 좋아하면서.
하지만 애슐리에게는 이미 끝난 일이다. 그는 결코 코이를 돌아봐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친구가 되자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 어쩌면 그건 이런 내 감정을 먼저 눈치채고 미리 선을 그으려고 한 말이었을지도 몰라.
내 마음은 아직도 그대로인데.
깨닫는 순간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다음 날 저녁 코이를 불러낸 에리얼이 잔뜩 부은 얼굴로 물었다. 취조를 당하는 기분으로 끌려나온 코이는 오랜 친구와 싸구려 술집에 마주 앉아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에리얼이 계속해서 다그쳤다.
“줄리는 나한테 네가 자길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하던데, 아니지? 줄리같이 좋은 애를 싫어할 남자는 없는데.”
“물론 아냐, 나도 줄리에 대한 호감은 있었어.”
“그런데?”
에리얼이 날카롭게 물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에게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코이는 치어리더의 카리스마에 굴복해 결국 그날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찌푸린 얼굴로 듣기만 하던 에리얼은 코이가 줄리의 키스를 거부했다는 대목에서 그만 크게 탄식하고 말았다.
“대체 왜 그런 거야? 네가 어마어마하게 실례를 저질렀다는 건 알고 있지?”
“알아. 미안해하고 있어.”
솔직히 말하자 에리얼은 미간을 찡그린 채 물었다.
“첫키스였어? 아니지? 애쉬랑 할 건 다 했을 거 아냐. 걔 은근 손 빨랐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그건.”
에리얼의 지레짐작이었지만 코이는 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본 에리얼이 의심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뭐야? 그 반응은. 누가 보면 애쉬가 널 아예 손끝 하나 안 건드린 줄 알겠어.”
“…….”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코이를 본 에리얼의 눈이 점차 커졌다.
“설마, 아니지?”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높아진 음성으로 에리얼이 물었다.
“정말이야? 그 녀석이 너랑 사귀면서 손끝 하나 안 건드렸다고? 그 애슐리 밀러가?”
당황한 코이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무, 물론 그런 건 아냐. 우, 우리도 키스는 했어.”
“키이스으?”
에리얼이 비꼬듯 단어를 늘려 말하더니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사귄 게 햇수로는 1년이 넘었다면서? 그동안 너희가 한 게 고작 키스야? 그게 다라고?”
코이는 이 상황이 너무나 부끄러웠지만 솔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언젠간 넘어야 할 산이다. 각오를 했지만 달아오른 얼굴을 어쩌지 못한 채 그는 고개를 숙였다.
“내…… 내가 서툴러서…….”
에리얼은 잠시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테이블 위의 맥주를 벌컥거리며 들이켰다. 이윽고 빈 잔을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그녀가 두 눈을 번득이며 낮은 소리로 뇌까렸다.
“솔직히 털어놔 봐, 그 개자식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던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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