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안녕하세요, 밀러 씨. 좋은 아침입니다.”
언제나처럼 밴에서 내린 남자에게 경비 직원은 붙임성 있게 말을 건넸다. 화려한 백금발을 가진 남자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장신에 그와 걸맞은 체격을 갖춰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거의 매일 보는 그의 모습에도 반사적으로 긴장한 직원은 억지로 입가를 끌어 올려 웃어 보였으나 남자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 게 전부였다.
남자의 얼굴은 진짜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윤곽이 뚜렷하고 섬세한 이목구비였으나 표정이 없었다.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아 종종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남자는 주차 직원에게 자동차 키를 건네준 후 곧바로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속으로 사무실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확인한 경비 직원이 재빨리 안내데스크의 전화를 들어 비서실에 연락을 했다.
“네, 알겠습니다.”
상사의 출근을 전해 들은 비서는 재빨리 사무실 안을 점검한 후 자리로 돌아와 문을 바라보며 자세를 바로했다.
“안녕하십니까, 밀러 씨.”
언제나처럼 정각에 모습을 드러낸 상사의 모습에 비서는 사무적인 어조로 인사를 했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때마침 마른번개가 떨어졌다. 전면 창을 통해 비치는 회색의 하늘에 일순 빛이 그려졌다 사라지는 것을 본 비서는 내심 등골이 오싹해졌다.
남자는 그대로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가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비서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탕비실로 향했다. 시간에 맞춰 올려 둔 커피가 지금쯤 다 되었을 것이다. 서류와 함께 차를 준비해 들어가려고 분주한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런 시간에 뭐지?
무심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던 비서는 이어서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을 보고 한층 더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
똑똑, 조용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던 애슐리는 비서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불을 붙였다. 예상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는, 그러나 커피도 서류도 없는 빈손이었다.
“저, 밀러 씨.”
흔치 않게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비서가 입을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예정에 없었던 일입니다만…… 갑자기 손님이 찾아오셔서요.”
“손님? 지금?”
찌푸린 얼굴로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 상사에게 비서가 즉시 대답했다.
“9시 10분입니다. 저도 스케줄에 없는 약속은 곤란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얘기를 들으면 밀러 씨도 승낙하실 거라고 막무가내라서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에 비서는 덧붙였다.
“여성이신데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하면서 잠깐만 시간을 내 달라고 합니다. 오래 끌지 않을 거라고, 10분 정도면 된다고 했습니다.”
곧 이름을 들은 애슐리가 하, 하고 짜증스러움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돌려보내.”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듯 말했으나 비서는 다른 때와 달리 즉각 행동하지 않았다. 마치 이런 반응도 예상했다는 것처럼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저, ‘코이’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던데요.”
고작 몇 초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비서는 그녀의 상사가 명백히 굳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의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으나 놀라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천천히 입을 연 애슐리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무서운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
“그, 그게.”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만 비서는 황급히 이성을 찾아 말투를 가다듬었지만 여전히 목소리에는 희미한 떨림이 남아 버렸다.
“애보트 씨가, 혹시 밀러 씨가 자신을 만나지 않고 돌려보내라고 하면 그렇게 말하라고 해서요.”
“……하.”
이번엔 소리 내어 탄식을 뱉어 내고 말았다. 기가 막힌 듯이 책상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애슐리의 시선에 비서는 안절부절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역시 그냥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벌써 늦었다. 무엇보다 상대의 자신감과 어마어마한 기세에 자신이 그만 꺾여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 그녀는 자괴감을 느꼈다.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상사를 바라보았으나 애슐리는 더 이상 비서를 보지 않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깊이 볼이 팰 정도로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던 그는 천천히 연기를 내뱉고 나서도 잠시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 차는 필요없어.”
낮게 가라앉은, 다소 쉰 목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비서가 황급히 네, 하고 대답한 후 서둘러 돌아섰다. 그녀가 사무실에서 나가고 난 뒤 곧이어서 문이 열리고, 달갑지 않은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애쉬. 저엉말 오랜만이야. 잘 지낸 거 같네.”
10여 년 전, 쉴 틈 없이 구호를 외치던 높고 힘찬 목소리가 변함없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역시나 그때처럼 활달하게 웃는 에리얼의 얼굴을 애슐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였다면 역시나 마주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애슐리의 시선에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자신을 환영할 거라고는 에리얼 또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반응을 보여 봤자 상처는커녕 전혀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불쾌해하는 쪽이 더 마음에 들어, 에리얼은 미소를 감추지 않고 사무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굉장하네. 내가 사는 아파트 전체가 이 사무실 하나만 하겠어. 이렇게 큰 사무실을 혼자 쓰다니, 정말 성공했구나, 너. 이번 재판으로도 어마어마한 수임료를 챙겼겠지? 저 화분 하나가 그 정도 가격은 되려나?”
한껏 비꼬아 말했으나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건 애슐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긴, 세상의 온갖 욕을 다 얻어먹고 살 텐데 고작 이 정도는 우습지도 않겠지. 에리얼은 쉽게 납득하고 걸음을 옮겼다.
선뜻 소파에 앉은 그녀는 습관적으로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소파 등받이에 편안히 등을 기대었다. 그런 에리얼을 본 애슐리가 일부러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그녀가 말했던 10분에서 단 1초도 더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허세를 부리는 동안 벌써 3분이 지났다.
애슐리가 시계에서 눈을 떼자 에리얼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네가 이런 사무실에 앉아 고작 5분 10분에 연연해하면서 가난한 사람들 피를 쥐어짤 거라고 그때 친구들이 상상이나 했을까?”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한 물음에 애슐리는 드러내 놓고 그녀를 비웃었다.
“옛날얘기나 하자고 이런 아침부터 찾아온 건 아닐 텐데.”
“물론 아니지. 역시 넌 눈치가 빨라서 좋아. 변하지 않은 것도 있긴 하구나?”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친 에리얼이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손님한테 차도 안 주니? 돈도 많이 벌면서 정말 인색하네.”
“6분 2초.”
애슐리가 심드렁하게 남은 시간을 읊자 에리얼은 당황하는 대신 피식 웃더니 겨우 용건을 꺼냈다.
“코이를 만났었다면서?”
대답 대신 그녀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애슐리에게 에리얼이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러 간다는데 옷을 사 주고 조언까지 해 주다니 어떻게 된 거야? 빌 입가에 묻은 소스 좀 닦아 줬다고 미친 듯이 화를 냈던 사람은 어딜 가고?”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중대한 오류를 지적했다.
“턱이었어.”
에리얼은 그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애슐리의 얼굴은 그다지 변함이 없었다. 에리얼은 일단 그의 말에 수긍했다.
“그래, 턱.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생긋 웃었던 에리얼이 곧 가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애쉬. 대체 무슨 꿍꿍이야? 난 네가 진심으로 코이의 행복을 빌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 코이는 아직 널 믿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다르다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나운 말투에 애슐리는 오히려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받았다.
“너무하군, 내 진심을 의심하다니. 내가 예전하고는 많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아니, 넌 그 부분만큼은 달라지지 않았어.”
에리얼이 그의 말을 가로채 버렸다. 미간을 찌푸린 그를 보며 에리얼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너에게 코이는 특별했잖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귀면서 고작 키스밖에 못 했을 정도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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