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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155/216)

155화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야? 내 기능에 이상이 없다는 건 너도 알잖아.”

한참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 무거운 침묵을 사이에 두고 ―고작해야 1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둥, 사실이 아니라는 둥 하는 거짓말을 해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출처는 너무나 명백했으니까.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야.”

에리얼은 주저 없이 제 생각의 근거를 내놓았다.

“네 말대로 넌, 나와 사귈 때는 거리낀 게 없었잖아. 만약에 내가 코이처럼 쑥맥이었다면 애초에 나와 사귀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지? 네 스타일은 항상 모든 면에서 쿨한 여자애였으니까. 나처럼.”

틀리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다. 코이를 좋아하게 되기 전까지, 애슐리가 사귄 상대 중에서 에리얼은 가장 이상적인 상대였다. 언제나 적당한 선을 지켰고, 치어리딩 팀의 부장을 맡았을 만큼 리더십도 있었던 데다, 적극적인 성격에 운동과 공부 모든 면에서 우수한 것은 물론 눈에 띄는 미인에 다리까지 근사했다.

한 마디로 에리얼은 완벽한 여자 친구 그 자체였다. 애슐리는 단 한 번도 에리얼에게 불만을 느낀 적이 없었고 호감도 깊었다. 그 때문에 코이에게 빠져든 것은 모든 면에서 계산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애슐리가 선뜻 그 사실을 인정할 리는 없었다.

“남자와 자는 게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애슐리가 빈정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에리얼은 그의 연약한 반항 따위는 발꿈치로 가볍게 찍어 눌러 버렸다.

“애쉬, 넌 코이가 오메가로 발현했어도 그 애와 자지 못했을 거야. 코이가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못 하겠다고 말하면 넌 그길로 화장실에 들어가 좆이 닳도록 문질러대고 끝냈을걸.”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불쾌해하는 애슐리와 대조적으로 에리얼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섹스를 하지 못하는데도 코이와 헤어지지 않고 계속 사귀었으니까.”

자신만만한 대답에 돌아온 것은 비웃음이었다.

“네 기억 속의 나는 섹스에 미친 인간이었던 모양이군.”

명백한 냉소에 에리얼은 전혀 기죽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니, 내 기억 속의 너는 그런 쪽에선 아주 평범한 보통의 남자애였어.”

그녀는 똑바로 애슐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유별나게 밝히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위해서 참는 애도 아니었다고. 내가 아는 너는 말이지, 호감이 있어서 사귄다고 해도 그쪽으로 충족이 안 되면 굳이 기다리지 않고 그냥 다른 상대를 찾았을 거야. 그런데 코이는 1년을 넘게 기다려 줬다고? 발현을 하고 나서도 안 헤어지고? 그 정도로 코이를 아꼈다면 너에게 코이는 그냥 평범하게 사귀다 헤어진 정도는 결코 아닐 거야. 그만큼 특별했다는 거지.”

에리얼이 조목조목 따지며 가차없이 진실을 후벼 팠다. 말이 끝나고도 입을 열지 않던 애슐리가 한참 만에 침묵을 깼다.

“그게 다야? 고작 내가 베타와 자지 않았다는 거?”

“아니, 하나 더 있어.”

조용한 음성에 에리얼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넌 친구들한테 인심이 후한 편이긴 했어도 명백하게 선이 있었어. 가끔 식사를 사거나 해도 그린벨 정도의 수준이었고 생일 선물 같은 걸 줘도 딱 우리 수준에 맞는 금액의 선물이었지 지나치게 돈을 쓰거나 하진 않았단 말이야. 그런데 코이한테는 모든 게 예외적이지, 안 그래?”

그녀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스포츠카 같았다. 오직 엑셀러레이터만을 밟으며 질주하는.

“벌써 헤어진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렇게 비싼 옷을 사 준다고? 고작 친구의 데이트를 응원한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지. 그건 네가 아냐, 애슐리 밀러.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건, 모든 상황에서 코이는 예외라는 사실이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던 에리얼이 똑바로 애슐리를 응시했다.

“자, 이제 솔직히 말해 봐. 대체 코이에게 아직도 미련이 있으면서 그런 시답잖은 수작을 부린 이유가 뭐야? 친구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애슐리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에리얼은 원하는 대답을 얻을 때까지 애슐리를 두들겨 팰 기세였다. 과거와 달라진 것은 주먹이 아닌 말로 팬다는 사실이었다.

애슐리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에리얼은 재빨리 손목의 시계를 흘긋 확인했다. 아직 시간은 3분 정도 남았다. 저런 식으로 밍기적거리면서 대충 때우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법정에서도 저런 식으로 상대를 약올리겠지, 생각하자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폭행을 저지르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일부러 주먹을 폈다 쥐기를 몇 차례 반복하며 긴장을 풀었다. 그런 그녀의 감정에는 아랑곳없이 연기를 뱉어 낸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코이에게 뭔가 해를 끼치기라도 할 것 같아?”

“당연하지. 코이는 네 거짓말에 홀랑 넘어갈지 몰라도 난 아니야.”

냉큼 대답한 에리얼에게 애슐리는 뜻밖에도 엷은 미소를 지었다. 순간 멈칫한 에리얼을 보며 그가 말했다.

“넌 나에 대한 불신이 어마어마한 모양인데.”

느릿한 말투로 애슐리는 말을 이었다.

“코이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내 진심이야.”

에리얼이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안 그럴 이유가 없잖아? 너도 알다시피 우린 10년 전에 끝난 사이고, 모처럼 만난 동창에게 그 정도 선의는 베풀 수 있는 거니까.”

그의 태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코이는…… 뭐라고 할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너무 순수하잖아. 혹시 곧이곧대로 데이트를 했다가 망쳐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퍽이나 상대를 생각해 주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비꼬는 뉘앙스는 남아 있어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만약 코이가 저 말을 들었다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겠지만 다행히 여기 있는 건 에리얼이었다. 그녀는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코이를 위해서 한 짓이라는 말이지?”

“그래.”

선뜻 돌아온 대답에 곧바로 에리얼이 물었다.

“어째서?”

이번에도 애슐리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말했잖아, 코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그는 다시 담배를 입에 가져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코이한테서 그건 못 들었나 보지?”

“들었어. 그러니까 여기까지 달려온 거고.”

에리얼은 곧바로 받아쳤다. 다시 또 속 뒤집어지는 소리를 듣기 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네가 코이의 행복을 빌고 있다는 사실을 난 전혀 못 믿겠어. 정말로 진심이야? 코이가 다른 사람과 사랑하고, 키스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는다고 해도 넌 기꺼이 축하해 줄 거라는 말이지?”

“물론, 그렇게 해서 코이가 행복해진다면.”

애슐리의 대답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너무나 적당한 타이밍에 흘러나왔다. 이 정도 고문엔 이미 익숙하다는 것처럼 여유롭게 웃기까지 하며. 에리얼은 그래서 더 애슐리가 의심스러웠다.

“이유가 뭐야? 네가 남의 행복을 이렇게까지 간절히 바랄 이유가 없을 텐데.”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 애슐리의 뻔뻔한 얼굴을 보며 에리얼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오늘 쳐들어온 목적은 다른 거니까.

역시나 애슐리는 대답 대신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에리얼은 그제야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을 꺼냈다.

“그럼 넌, 코이가 누구랑 뭘 하든 상관없는 거야. 그렇지?”

“코이가 행복해지기만 한다면.”

여전히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애슐리가 말했다. 어쩌면 코이는 제대로 된 연애 따위 하지 못할 거라고 자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코이가 여전히 애슐리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평생 사귄 사람도 애슐리뿐이라는 사실은 절대 알게 해선 안 된다. 코이는 굳이 숨길 생각도 없을 테지만 에리얼은 그런 꼴은 용납하지 않았다.

“넌 그 애가 여전히 쑥맥이라 데이트도 제대로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코이가 내던진 자존심을 에리얼은 냉큼 주워 챙겼다.

“여자들은 좋은 사람은 귀신같이 알아보거든. 거기다 코이는 키도 커지고 이젠 제법 미남이라는 소리도 듣는단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녀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내버려 두지 않는 사람은 너만이 아니라는 얘기지. 코이도 제법 경험을 쌓았으니 안목도 좀 생겼을 테고.”

일부러 에리얼은 말을 맺고 대신 싱긋 웃었다. 애슐리는 여전히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으나 어딘지 그것은 가면 같았다.

“……경험이 쌓였다고?”

“그래.”

에리얼은 크게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헤어진 10년 동안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코이가 모르듯이, 너도 전혀 모르잖아. 안 그래?”

애슐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리얼은 보란 듯이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가 시계판을 반대로 돌려 애슐리에게 보여 주었다.

“3초 전.”

에리얼은 일부러 남은 시간을 읊어 준 뒤 미소를 지었다.

“시간 안에 끝났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문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애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코이를 방해하지 않으리란 걸 믿고, 난 이만 가 볼게. 시간을 내 줘서 고마워.”

예의 바르게 인사를 덧붙인 그녀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고요한 사무실 안에는 규칙적인 발소리만이 이어졌다. 에리얼이 막 문의 손잡이를 잡은 순간 그때까지 말이 없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왜 코이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거냐고 물었지?”

조용한 음성에 에리얼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왠지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 때, 그가 서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높이 올라갈수록 바닥에 떨어졌을 때 충격이 커지잖아.”

드물게도 에리얼은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자신이 들은 말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고, 다음엔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애슐리의 얼굴은 너무나 현실적이었고, 그녀는 애슐리 밀러가 천하에 둘도 없는 개자식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러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에리얼이 마주 웃으며 받아쳤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정말 아프긴 하겠다, 그렇지? 네가 보험을 제일 비싼 걸로 들어 놨어야 할 텐데.”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던 그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너무나 다정하게 덧붙였다.

“잘 들어,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 한 번만 더 코이를 울리면 그땐 네 잘난 보라색 눈깔을 파버리겠어.”

말투와는 전혀 다른 험악한 내용에 애슐리는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너무 무서운데.”

에리얼은 그에게 한 번 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말을 어기면 정말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듯이.

“아 참, 그리고.”

막 나갈 것 같던 그녀가 일부러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것처럼 돌아섰다.

“코이가 베타라고 해서 남자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코이는 예전에도 너랑 사귀었었잖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애슐리가 느린 말투로 물었다. 에리얼은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코이의 상대는 여자일 수도, 남자일 수도 있다고.”

“…….”

“네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런, 시간을 초과해 버렸네. 미안해, 이만 갈게.”

그녀는 산뜻하게 덧붙였다.

“오늘도 많은 억울한 사람들의 피를 쥐어짜 더 마않은 돈을 벌길 바라요, 밀러 변호사.”

곧 그녀가 문을 열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애슐리는 드디어 혼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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