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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162/216)

162화

너무 놀라 그만 휴대 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두 달 만에 듣는 목소리에 코이는 뛰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여, 여보세요.”

- 응.

간신히 소리를 내자 건너편에서 평이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전히 믿을 수가 없어 다시금 휴대 전화를 확인한 코이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애쉬……?”

- 그래, 나야.

확인을 받았어도 코이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고 하필 이 순간에 전화한 사람이 애슐리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네, 네 번호가 아니었는데.”

코이가 더듬거리며 지적하자 애슐리는 여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 사무실에서 전화하는 거니까. 이 번호도 저장해 놔.

“어, 아, 알았어.”

무심코 바로 저장하려던 코이는 황급히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

“저기, 무슨 일이야? 나, 기다리는 전화가 있어서…….”

말을 하고 나서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네 전화는 기쁜데, 정말이야, 너무 반가운데 그게…….”

- 괜찮아. 기다리는 전화가 변호사라면 내가 맞아.

“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자 애슐리가 다시 말했다.

- 네가 전화를 기다리던 변호사가 바로 나라고. 앨이 전화했었어, 네가 무척 곤란해졌다면서.

“아…….”

납득은 했지만 여전히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멍한 감탄사만 흘린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 어떻게 할까? 상담은 빠를수록 좋겠지?

“아, 응.”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자 곧 궁금해졌다. 애쉬는 지금 상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기…… 이쪽으로 와 줄 수 있을까? 내가 나가긴 좀…… 그래서.”

사실 코이가 애슐리의 사무실로 가는 게 맞지만 전철을 탈 돈조차 없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부탁하자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코이는 그 말에 안도하기는커녕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네 차를 여기 세워 두면 도난을 당할지도 몰라.”

- 알았어, 전철이나 버스를 탈게.

“자, 잠깐만.”

또다시 그를 가로막은 코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것도 위험할 거 같은데…… 강도를 만나면 어떡해, 총이라도 맞으면.”

극알파라고 해서 총을 맞아도 멀쩡한 건 아니잖아, 하고 작게 덧붙이자 애슐리는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주소나 보내 줘.

“아, 응.”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나 내려 줬던 거기에서 만나. 내가 마중 나갈게.”

주소를 찾아 헤매다 또 범죄에 엮일지 모른다. 애슐리가 길에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짧게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 코이는 황급히 덧붙였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큰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코이, 난 어린애가 아냐. 주소를 줘, 내가 찾아갈게.

“어, 응.”

더 이상 말을 했다가는 정말로 짜증을 낼 것 같았다. 코이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고 주소를 쳐서 메시지를 보냈다. 애슐리가 읽은 것을 확인한 후 안도감을 느꼈으나 길게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자 갑자기 현실감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으나 그의 집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공간이 좁은 것은 둘째 치고 계속 격무에 시달린 데다 배고프고 지쳐 청소고 빨래고 아무것도 못 한 것이다. 쓰레기와 옷가지가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고 먼지가 쌓인 바닥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곳에 애쉬를 들여놓을 순 없어.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팠으나 그는 억지로 기운을 내 몸을 움직였다. 애슐리가 오면 커피라도 대접을 해야 할 텐데 줄 건 물밖에 없었다.

코이는 그나마 깨끗한 컵을 꺼내 한 번 더 씻고 물기를 닦아 놓았다. 빨래방에 가지 못해 쌓여 있는 옷가지는 모아서 벽장 안에 숨기고 쓰레기는 봉투에 담아 한쪽에 세워 둔 뒤 바닥을 닦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조용한 발소리를 들은 것은 간신히 청소를 마치고 한숨을 돌렸을 때였다. 혹시, 하고 잔뜩 긴장해 귀를 기울이는데, 점차 가까워진 발소리가 그의 문 앞에서 멈췄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현관문을 바라보는 코이의 귓가에 가늘고 신경질적인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코이는 두 번 생각할 틈도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훤히 열린 문 밖에는 예상대로 애슐리가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에 값비싼 슈트는 물론 한눈에 들어오는 명품 코트까지 갖춰입은 모습으로. 그에 반해 코이는 벌써 며칠이나 입고 있는 낡고 지저분한 티셔츠에 닳아 빠진 청바지 차림이었다.

애슐리는 잠깐 놀란 눈을 했다가 이내 표정을 되돌렸다. 난데없이 문이 열렸으니 순간 당황할 만도 하다고 생각하며 코이는 머쓱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어서 와, 잘 찾아왔네.”

몸을 뒤로 빼 공간을 만들자 애슐리가 선뜻 발을 들여놓았다. 코이 혼자 있을 때도 좁은데 그보다 덩치가 두 배는 되는 애슐리까지 있으니 집 안이 꽉 찬 듯했다.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한 차례 집 안을 둘러보더니 곧 코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코이는 어색함을 참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야, 애쉬. 잘 지냈어?”

애슐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뚫어져라 코이의 얼굴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한참 만에 겨우 한 마디를 내놓았다.

“그래.”

다시금 흐른 침묵에 코이는 머리를 긁적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바쁠 텐데 와 줘서 고마워. 앨이 너한테 연락할 줄은 몰랐는데…….”

코이의 말끝이 이내 흐려졌다. ‘최고의 변호사’라고 말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잘나가는 변호사란 당연히 애슐리 밀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만큼 ‘도시에서 가장 바쁜’ 변호사이기도 하고 또한 ‘가장 비싼’ 변호사이기도 했다. 에리얼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도 그래서 차마 애슐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애슐리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그들의 인맥이 얼마나 뻔한 것인지 코이는 새삼 깨달았다.

가장 강력한 인맥이기도 하잖아.

“코이.”

자신을 다독이고 있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들자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애슐리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향한 서늘한 시선에 무심코 마른침을 삼킨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문을 열었다.

“먼저 네게 확인할 게 있어. 넌 정말 날 변호사로 선임하고 싶은 거 맞지?”

“어…… 응, 마음은 그런데…….”

“하고 싶다, 아니다만 대답해.”

수임료를 줄 여유가 안 된다는 말을 할 틈은 없었다. 가차없는 애슐리의 요구에 코이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해 주면 좋겠어.”

“그래.”

마주 고개를 끄덕인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내가 네 변호를 맡기 전에 네가 다짐해야 할 게 있어. 이건 절대로 지켜야 돼, 알겠어?”

“어, 응. 그럴게.”

돈도 못 주게 생겼는데 뭐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당연하지. 코이는 긴장한 얼굴로 대답하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 코이의 반응을 확인한 뒤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좋아. 네가 지켜야 할 건 단 하나야. 나에게 무엇이든 솔직하게 말할 것, 감추지 말고 거짓말도 하지 말 것.”

생각보다 대단한 게 아니라 놀랐다. 코이는 다음이 더 있지 않을까 기다렸으나 애슐리의 요구는 그게 전부였다. 이내 눈치를 챈 코이가 약속했다.

“물론이야. 난 너한테 절대 거짓말하지 않으니까.”

“감추지도 마.”

“……응.”

한 번 더 지적한 애슐리에게 코이는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대답했다.

“안 그럴게.”

애슐리는 이제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꺼냈다.

“그럼 첫 번째 질문을 할게, 코이. 약속한 거 잊지 마.”

“응, 솔직하게 거짓말하지 않고 전부 말할게.”

다시금 긴장해서 애슐리가 했던 당부를 읊조리자 그는 짧은 미소를 짓더니 드디어 질문을 했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언제야?”

“어?”

난데없는 질문에 코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그 반응을 본 애슐리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끼는 모습에 그는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하고 잠깐 머뭇거렸던 코이가 어렵게 대답했다.

“어제저녁에…… 샌드위치를 하나 먹었어.”

샌드위치라고는 하지만 말라비틀어진 빵에 얇은 싸구려 패티 한 장 들어간 게 전부였다. 허기를 자각하자 미친 듯이 굶주림이 밀려왔다. 소리가 나려는 배를 손으로 누르며 시선을 피하는 코이의 반응에 애슐리는 알았어, 하고 말했다.

“그럼 나가자. 나도 아직 식사 전이야. 같이 먹으면서 얘기해.”

“어?”

자신도 모르게 놀라 고개를 들었으나 벌써 애슐리는 몸을 돌려 나가고 있었다.

“아, 참.”

멀거니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기만 하는데, 갑자기 뭔가 생각난 것처럼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나 더 지켜야 할 게 있는데.”

“아, 응. 뭔데?”

반사적으로 굳은 코이를 보며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의뢰인은 변호사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해. 지킬 수 있겠지?”

“그,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자 애슐리는 그럼 됐다는 듯이 가볍게 손짓을 했다.

“나와, 식사하러 가자.”

그리고 그는 곧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때까지 엉거주춤 서 있기만 하던 코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그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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