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급히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던 코이는 주차되어 있는 벤테이가를 보고 숨이 턱 막혔다. 애슐리는 이런 곳에서 산 적이 없었을 테니 치안이 불안정하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절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로 그를 부르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코이는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애슐리가 차를 출발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슐리가 코이를 데려간 곳은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혹시 예전에 갔던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가는 게 아닐까 걱정했던 코이는 그나마 마음을 놓았다. 거기서 뭔가를 먹을 만큼의 돈이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먼저 차에서 내린 애슐리의 뒤를 따라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아늑한 분위기의 인테리어에 조용히 흐르는 재즈가 긴장을 풀어 주었다.
창가 자리로 그들을 안내해 준 직원은 각자의 앞에 메뉴판을 내려놓은 뒤 물러났다. 잠시 주저했던 코이가 메뉴판을 들려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그것을 빼앗아 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코이에게 애슐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먼저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코이.”
반사적으로 긴장하는 코이를 보며 그는 물었다.
“지금 너한테 있는 돈이 얼마나 돼? 콜라에 얼음을 넣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거야.”
코이는 멈칫했으나 애슐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
“나와 약속한 거 잊지 마.”
솔직하게, 숨기는 것 없이.
코이는 숨을 들이켰다 내쉬고 어렵게 고백했다.
“……콜라도 사기, 힘들 정도.”
기어들어 가는 음성에 하아, 하고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애슐리가 내쉰 숨소리였다. 코이는 부끄러운 한편, 괜한 죄책감이 들어 얼굴을 들지 못했다.
“자.”
애슐리가 코이의 앞에 다시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저절로 음료에 시선을 향하려는 코이에게 그가 말을 이었다.
“여기 음식값은 내가 낼게. 먹고 싶은 만큼 주문해.”
“어?”
순간 귀가 번쩍 뜨여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애슐리가 그를 마주 보았다.
“친구의 호의라고 생각해. 입장을 바꿔서 네게 여유가 있고 내가 굶주리는 상황이라면 너도 나와 같이 행동할 거야, 안 그래?”
상대가 애슐리라면 친구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애슐리에게 코이는 친구고 코이도 그런 척을 하고 있지만 진심은 그런 게 아니니까. 대신 코이는 그 자리에 에리얼을 넣어 상상해 봤다. 당연히 결론은 같았다.
친구로서의 호의구나.
씁쓸한 기분을 감춘 코이는 “고마워.” 하고 말한 뒤 메뉴를 훑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이제는 아플 지경이었기 때문에 빨리 되는 거라면 뭐든 좋았다.
어느 정도 정신이 든 것은 주문한 음식을 절반 정도 먹고 난 뒤였다. 정신없이 햄버거 하나와 잔뜩 쌓여 있는 프렌치프라이를 전부 먹어 치운 다음에야 비로소 코이는 뭔가 말을 할 정도로 기운이 돌아왔다.
허기를 달래고 나자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애슐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이 그에게 감사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자 갑자기 민망해졌다.
애슐리는 말없이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고 있었다. 평소 그가 갈 만한 레스토랑이라면 분명 코스 요리를 주문했을 것이다. 그러면 요리 사이사이에 공백이 생길 때마다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새삼 여길 택해 준 애슐리에게 감사의 마음이 솟아났다. 코이는 애슐리가 스테이크를 넘기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저기, 많이 바쁘지 않아? 시간 괜찮아?”
자신을 돕기 위해 한달음에 와 준 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묻자 애슐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 스케줄은 내가 알아서 할게.”
“어, 응.”
괜한 말을 했다 싶어 입을 다물었던 코이는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둘 사이에는 평화로운 재즈가 흐르고 있었지만 코이는 불편한 침묵을 느꼈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자신이 먼저 일 얘기를 꺼내면 괜히 애슐리를 닦달하는 거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화제를 끄집어 내야 했다.
남은 음식을 먹는 척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머리를 굴렸던 코이는 드디어 뭔가를 떠올렸다.
“저, 아까 얘기한 의뢰인의 수칙 말이야.”
애슐리가 흘긋 그에게 시선을 향했다. 코이는 그가 당부했던 내용을 다시 읊조렸다.
“솔직하게 감추지 말고 말할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애슐리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코이는 열심히 혼자만의 대화를 이어 갔다.
“거짓말 안 하고 감추지 않기만 하면 다라니, 정말이야?”
조건이 너무 간단하지 않냐는 물음에 애슐리는 선뜻 대답했다.
“그래. 내 의뢰인들은 그걸 아무리 얘기해도 안 지키거든.”
곧이어 그는 입가를 비뚤어뜨려 냉소를 지었다.
“아마 네가 내 의뢰인 중에선 가장 내 말을 잘 들을 거야.”
코이는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당연하잖아, 넌 날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네 말을 들어야지.”
주저없이 나온 말에 돌아온 말은 여전히 시니컬하기만 했다.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르는 바보들이 세상엔 많아.”
코이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를 바라봤다.
“왜 그러는 걸까?”
코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뜻밖에도 애슐리가 대답했다.
“글쎄, 거짓말하고 감추는 게 일상이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코이는 자신의 별거 아닌 말도 애슐리가 받아 준다는 사실이 기뻐 즉시 다음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사는 사람보다 안 그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너한테 의뢰를 하다니 정말 힘들겠어.”
애슐리가 어떤 사람들을 변호하는지 코이도 알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신뢰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코이는 뭔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코이의 믿음을 애슐리는 가차 없이 부숴 버렸다.
“코이, 애써 부정하지 마. 난 쓰레기들만 상대해. 그리고 그들이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않게 구해 주는 변호사야.”
애슐리의 음성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제발 현실을 직시하라는 듯이. 코이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넌, 나를 도우러 와 줬잖아. ……내가 수임료를 낼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애슐리는 대답 대신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왠지 할 말을 찾느라 괜한 어니언링만 입에 넣던 자신이 떠올라 코이는 작게 덧붙였다.
“두 달이나 연락하지 않아서, 이대로 영영 끝나 버리는 건가 생각했는데.”
하지만 애슐리는 코이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에게 달려왔다. 어쩌면 코이가 먼저 연락하기를 기다렸던 게 아닐까?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다신 날 만나려 하지 않을 줄 알았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코이는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아냐, 설마. 왜?”
다시금 “어째서?” 하고 묻고 만 그를 보며 애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질렸다는 얼굴로 쳐다봤으니까.”
순간적으로 코이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내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고?
믿을 수 없지만 애슐리가 그렇다면 사실일 것이다. 뒤늦게 코이는 그날 자신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애슐리가 한 일에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심한 감기를 앓았을 정도니까.
10년이 훨씬 지났어.
코이는 자신을 향해 속삭였다. 애쉬가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다는 건 불가능하잖아. 나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을 텐데. 예전에는 아버지가 부자였고 지금은 애쉬가 부자인 거니 돈을 쓰는 법이나 스케일도 달라지는 게 당연해. 거기다 지금 우리 둘은 사는 세계가 완전히 다르잖아. 애쉬의 일상은 그런 건가 보지 뭐.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든 사과를 할 일이 생기면 돈으로 처리하는.
코이는 그 방법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이의 삶에 이러쿵저러쿵할 권리는 없었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과 그의 삶이 다르다는 걸 인식시키는 것뿐이었다.
“많이 놀라긴 했는데, 나나 내 주변에선 약속을 깬다고 선물을 하거나 하진 않아서…….”
말로 설명을 하자니 갑자기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 왔던 걸 말로 푼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애쉬도 예전에는 그렇게 살았을 텐데.
언어의 빈약함에 무력감을 느꼈을 때, 애슐리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이제 사적인 얘긴 그만하고 일 얘기로 들어갈까?”
“어? 응…….”
이건 명백히 불편한 화제를 끝내자는 사인이었다. 아마 이런 말을 할 기회는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이는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는 대신 그의 의사에 따랐다. 상대가 원치 않는 대화를 굳이 이어 갈 이유는 없는 거니까.
코이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세세히 설명하는 동안 애슐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사무적이고 서늘한 얼굴에 코이는 내심 긴장했으나 떨지 않고 용케 얘기를 끝냈다.
“……그렇게 된 거야.”
말을 맺자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애슐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은 알겠는데, 그렇게 된 원인이 뭐야?”
“어?”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코이가 멈칫하자 애슐리는 다시금 말을 풀어 질문했다.
“갑자기 회사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만두는 건 누가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그렇게 여러 명이 단기간에 그만둘 때는 보통 명백한 이유가 있어. 왜 그런 거야? 사장이 가혹 행위라도 했어?”
“어? 아니…….”
애슐리의 의심은 너무나 합리적이었다. 사장이 부당한 일을 저질러서 직원들이 직장을 떠났다면 코이의 일을 해결하는 데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이유는 전혀 아니었다. 코이는 그게 아니고, 하고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나한테 달라붙어서…….”
커피를 마시려던 애슐리가 손을 멈췄다. 천천히 잔을 내려놓은 그가 똑바로 코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달라붙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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