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어?”
코이는 무심코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그를 바라보는 애슐리의 시선이 이전과는 달라진 듯했다. 어쩐지 화가 난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지만 곧 코이는 부정했다. 애쉬가 화를 낼 이유가 없잖아.
“코이.”
“응?”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코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애슐리는 그런 코이를 마주 보며 여전히 서늘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그 달라붙었다는 게 어떤 거였는지 자세히, 하나하나 설명해 봐.”
“어…… 응.”
코이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기억을 더듬어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코이의 말을 듣는 동안 애슐리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차갑게 식은 얼굴로 듣고 있었다. 그가 반응을 한 것은 마지막에 쫓겨났던 직원이 코이에게 키스를 하려다가 실패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였다.
“키스를 했어? 너한테?”
“아니, 실패했다고. 내가 피했거든…….”
앞서 했던 말을 반복하자 애슐리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반응에 코이는 내심 긴장해 그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다. 하아, 한숨을 내쉬었던 애슐리는 미간을 모은 채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그 향기라는 게 대체 뭔데? 들은 거라도 있어?”
“아, 응.”
코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키우던 화초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전철이고 어디고 다닐 수가 없을 지경이 돼서 그 꽃을 에리얼한테 줬거든. 그 뒤로는 괜찮더라고.”
“……꽃향기가 그렇게 하루종일 간다고?”
믿기 어렵다는 반응에 코이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정색을 하고 결백을 주장했다.
“정말이야. 에리얼한테 화초를 주고 난 뒤에는 괜찮더라니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코이는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애슐리는 미간을 문지르다 혼잣말을 했다.
“대체 냄새가 어땠길래…….”
코이는 향을 맡지 못하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코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전에 직원이 얘기해 줬어. 꽃 냄새 같기도 하고 풀 냄새 같기도 한데 굉장히 좋다고, 마음이 편해진다면서.”
미간을 문지르던 애슐리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그는 그 상태로 굳은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생각을 떠올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코이는 베타인데.
말도 안 돼, 애슐리는 곧 부정했다. 코이가 발현할 거였다면 진작에 했을 것이다. 애슐리가 발현했을 때 그토록 진한 페로몬 속에서 함께 있었는데도 발현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변이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코이가 말한 특징은 모두 오메가 페로몬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같은 직장에 다니던 사람들의 반응도 그렇다. 그 외에 무엇으로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은 코이에게서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는 걸까.
만약에 코이가 발현했다면 페로몬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혹시 억제제라도 먹고 있는 건가? 설마, 코이가?
“애쉬?”
갑자기 코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흠칫 놀라 정신이 든 애슐리가 미간에서 손을 떼고 코이를 응시했다.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는 코이의 얼굴은 결백하기 그지없었다.
아냐, 코이는 뭔가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지 못해. 바로 눈치챘을 거야.
애슐리는 곧 부정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변이한 거라면.
갑자기 왜?
“……일단은 알았어. 내가 해결할게.”
애슐리는 조용히 말한 뒤 곧 화제를 돌렸다.
“식사는 다 했어? 일어날까?”
“어? 아, 응.”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던 코이는 남아 있는 음식을 보고 내심 아까워졌다. 이걸 싸 가면 이틀은 먹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벌써 애슐리는 계산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차마 싸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코이는 그의 뒤를 따라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저기, 오늘…… 고마웠어.”
코이는 애슐리의 등에 대고 감사의 말을 했다. 먼저 밖으로 나간 애슐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코이는 무안함을 어쩌지 못하고 시선을 떨군 채 말을 이었다.
“이렇게 상담도 해 주고, 식사까지…….”
코이가 뭔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슐리의 귀에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달싹이는 코이의 입술과, 뺨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과, 멋쩍은 듯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긴 손가락이 시야에 가득 찼을 뿐이다.
만약에.
자신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진 것 같은 착각을 느꼈을 때,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
갑자기 애슐리가 코이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놀란 코이는 얼떨결에 그대로 그에게 끌려가 품에 안기고 말았다. 커다란 몸이 그대로 코이의 온몸을 감싸안았다. 그의 위로 진하고 달콤한 페로몬이 폭포수처럼 들이부어졌다.
만약에 네가 정말 오메가가 된 거라면…….
강한 팔이 온몸을 옥죄어 코이는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 압박감이 오히려 마음을 안도하게 해, 그는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애슐리를 마주 안았다. 애슐리가 고개를 기울여 코이의 귓바퀴에 코를 문지르더니 머리카락에, 목에, 연이어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크고 깊은 숨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코이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끌어안고 있던 애슐리의 몸을 힘껏 붙잡았다.
나지 않아.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은 채 페로몬을 쏟았던 애슐리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아.
천천히 코이의 몸을 안았던 팔에서 힘을 풀자 허탈한 기분이 뒤따라왔다.
난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애쉬?”
코이가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코이의 얼굴을 내려다본 애슐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코이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페로몬을 쏟아부어도 코이는 알지 못한다.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애슐리는 십여 년 전에 느꼈던 기분을 또 한 번 절감했다. 그러자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애슐리는 다시 코이를 세게 끌어안았다.
덩달아 그의 몸에서 팔을 내려놓았던 코이는 얼떨결에 또 그에게 푹 안겨 버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깜박이는데, 애슐리는 숨을 죽인 채 그를 안고 움직이지 않았다.
애쉬……?
코이는 그의 반응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당황했으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겨우 용기 내어 머뭇거리던 손을 그의 등으로 가져가려 했을 때, 애슐리가 팔을 풀고 코이를 놓아주었다.
“……그만 가자.”
갑작스러운 허전함에 황망한 표정을 짓고 만 코이를 내버려 둔 채 애슐리가 돌아섰다. 코이는 한동안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다 허겁지겁 뒤를 쫓아 달려갔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애슐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코이 또한 침묵했으나 그 시간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코이가 침묵을 깼기 때문이다.
“저기, 애쉬……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애슐리의 차가 달리고 있는 도로는 아무리 봐도 코이의 집으로 가는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왠지 모를 불안함에 자꾸 창밖을 확인하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대답했다.
“내 집으로.”
“응? 왜, 왜?”
코이는 당황해 시선을 돌려 애슐리를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 네 집은 제대로 지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잖아. 또 네 사장이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릴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안전한 곳은 아니지.”
사장은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코이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까……?”
자신감 없는 물음에 애슐리는 주저없이 답했다.
“안 주려던 돈이 나가게 생겼는데 분풀이라도 하고 싶지 않을까?”
여전히 코이는 믿기 어려웠으나 아마도 애슐리가 맞을 것이다. 그는 이런 일엔 자신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은 변호사니까.
“그렇지만 네 집에 굳이 갈 필요는…….”
“내 집이 싫으면 호텔을 잡아 줄 수도 있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선뜻 나온 제안에 코이는 당황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닌데, 너한테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하루 이틀이면 끝나는 일이야?”
조심스럽게 묻자 애슐리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글쎄, 그건 너희 사장에게 달렸겠지.”
“그럼…… 언제까지일지 모르는데 네 집에 있는다는 건…….”
“코이.”
더 말을 하려던 코이를 애슐리가 가로막았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변호사의 말에는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 그랬지.”
코이는 황급히 대답했으나 여전히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흘긋 그 모습을 본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코이.”
“응.”
곧바로 반응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부담스러워하지 마, 의뢰인만이 아니라 변호사도 지켜야 할 의무라는 게 있는 거니까.”
“의무?”
코이가 단어를 반복하자 애슐리가 그래, 하고 덧붙였다.
“의뢰인을 보호하는 게 변호사의 의무야.”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아무 말 못 하는 코이를 태우고 자신의 아파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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