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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177/216)

177화

애슐리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으나 코이는 왠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런 코이의 두려움은 움츠린 어깨와 흔들리는 눈동자로 너무나 명백히 드러났지만 애슐리는 그를 달래기 위해 분노를 감추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어리광을 받아 줄 때가 아니었다. 코이는 더듬거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 하지만 넌 네 일을 다 한 거잖아. 돈은 받게 됐으니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해야지…….”

그는 자신이 멋대로 행동한 나름의 근거를 내놓았다.

“수임료도 못 주는데 더 부탁할 수는 없어.”

거기에 허점은 없었다. 물론 그건 코이의 생각이었다. 애슐리는 가차없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코이, 내가 전화한 뒤에 그 돈을 실제로 받았어?”

“어?”

순간 당황한 코이에게 애슐리는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아니겠지. 트럭을 찾아온 뒤에 받은 거니까.”

“어? 어…….”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더듬거리기만 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애슐리는 계속해서 그를 나무랐다.

“그럼 내가 일을 다 한 게 아니지? 네가 돈을 실제로 받았어야 내 일이 끝나는 거니까. 자, 말해 봐. 내가 틀렸어?”

“어…….”

코이는 등 뒤로 뻘뻘 식은땀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다 결국 작게 웅얼거렸다.

“네가 맞아…….”

“그래, 알아줘서 아주 고맙군.”

여지없이 빈정거린 애슐리가 그때까지 입술을 누르고 있던 손을 뗐다. 행커치프에 묻어난 피를 미간을 모은 채 내려다본 그가 코이의 입술을 확인했다. 피는 멎어 있었다.

“얼마나 맞은 거야? 또 어딜 다쳤는지 봐야겠어.”

“으, 으악!”

갑자기 입고 있던 티셔츠를 확 들어 올리는 바람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몇 군데 붉은 멍이 든 것을 본 애슐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몸 여기저기를 손으로 눌러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자지러지며 비명을 질렀던 코이를 보며 손을 옮기던 애슐리는 배 한쪽에 다다르자 지그시 누른 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코이는 의아해하며 말했다.

“거긴 안 아파.”

그러자 애슐리의 얼굴에 뜻밖에도 안도감이 퍼졌다.

“그래, 다행이다.”

어리둥절했던 코이는 지난번에 애슐리가 그 자리를 눌렀을 때 아파 비명을 질렀던 걸 떠올렸다. 살살 눌러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넬슨에게 맞은 곳은 살짝만 눌러도 저절로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픈 걸 보면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애슐리는 아무 설명 없이 손을 옮기더니 코이의 남은 몸을 모두 눌러서 확인했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던 애슐리가 손을 뗐다.

“대체 왜 이렇게 싸운 거야? 그때처럼 애도 아니고 다 자란 어른이 주먹질까지 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아무리 넬슨이 막 나가는 양아치라도 아무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슐리는 머뭇거리는 코이에게 경고했다.

“솔직하게 말해, 모든 걸.”

“어, 응.”

그 말은 마법의 키워드나 다름없었다. 코이는 어렵게 입을 열어 고백했다.

“그게…… 넬슨이 네 욕을 하잖아.”

예상치 못한 말에 애슐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뭐라고?”

코이는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한 채 시선을 배회하며 중얼거렸다.

“차를 찾으러 갔는데…… 넬슨이 있더라고. 아니, 자기 집이니까 있는 게 당연한데…… 아무튼, 트럭을 찾으러 왔다고 하니까 좀 성가시게 굴더라고. 그래서 대충 비위를 맞춰 주고 나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네 욕을 하는 거야…….”

말을 하다 보니 화가 치밀었다. 마약이나 파는 주제에 누굴 욕해.

“나한테 찐따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욕하는 거야 괜찮아. 가랑이 사이를 기라고 해도 상관 없었거든. 그냥 차를 빨리 찾아서 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애슐리 밀러는 찐따라고 그러잖아.”

울컥 치밀어 오른 감정에 격해진 음성을 애슐리는 그저 듣기만 했다. 머리는 일시에 전쟁이 난 듯했다. 넬슨 그 개자식이 코이한테 뭐라고 했다고? 가랑이 사이를 기게 했어? 또다시 분노가 차올랐으나 그보다 더 큰 감정이 먼저 그를 차지했다.

“코이, 그럼…… 나 때문에 싸운 거라고?”

“그 쓰레기 같은 자식이 널 욕하는데 어떻게 참아!”

코이가 저런 말을 하다니.

애슐리는 그의 입에서 처음 듣는 거친 말투에 더욱 놀랐다. 코이가 그를 위해 싸우고 욕설에 가까운 말까지 했다. 그것도 고등학교 때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양아치를 상대로.

나를 위해서.

하아, 저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넘치는 사랑스러움에 키스를 퍼부어야 할지, 왜 애초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나가서 맞고 오냐고 엉덩이를 때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양쪽 다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터진 코이의 얼굴이었다. 내일쯤 되면 몸 곳곳이 쑤시고 멍이 들 것이다.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애슐리는 다음을 기약하는 대신 꼭 실행하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엉덩이를 때린 다음에 키스하는 게 좋겠지.

어떡해, 내가 멋대로 굴어서 화가 많이 났나 봐.

찌푸린 얼굴로 뚫어져라 자신을 보는 애슐리의 표정에 코이는 황급히 말했다.

“괜찮아, 이 정도는 자주 맞아 봤는걸. 너도 알잖아? 나 맷집 좋은 거.”

일부러 하하 소리 내어 웃어도 봤지만 애슐리의 얼굴은 한층 더 일그러졌을 뿐이었다. 자신이 또 타이밍에 맞지 않은 농담을 했다는 걸 깨달은 코이는 뒤늦게 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바꿨다.

“그때랑은 달라. 나도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고, 내가 더 많이 때렸을걸? 이거 봐, 나도 때렸어.”

자, 하고 내보인 주먹은 벌써 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그런 코이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애슐리가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의 손가락에 키스를 했다. 난데없는 입맞춤에 놀란 코이가 눈을 크게 뜨자 여전히 입술을 댄 채로 시선만을 들어 코이를 바라본 애슐리가 말했다.

“앞으로는 손으로 때리지 마, 다치잖아.”

무슨 의미인지 몰라 그저 보기만 하는 코이에게 그는 덧붙였다.

“네가.”

아, 그제야 깨달은 코이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기 시작했다. 금세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마구 흔들리는 두 눈동자는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그런 그의 얼굴에 애슐리 또한 흥분하고 말았다. 곧바로 그에게 키스하며 몸을 덮치고 싶었으나 그 순간 찢어져 벌어진 입술이 시야에 들어왔다. 애슐리는 그만 앓는 것처럼 깊은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향기가 주변에 퍼졌다. 지금까지 어쩐 일인지 그다지 느껴지지 않던 향이 불시에 그의 심장을 두드려 댔다. 애슐리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코이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있어, 갈아입고 올 테니까.”

“어, 응.”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코이를 남겨 두고 방에서 나온 애슐리는 지금까지의 여유롭던 태도와는 달리 뛸 듯이 빠르게 걸음을 옮겨 자리를 벗어났다. 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하던 코이의 귀에 작은 기계음이 들렸다. 환풍기가 최대 전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시끄러운 음악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요란한 클럽의 사운드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조차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고막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넓은 소파에 모여 앉은 한 무리의 사람들 중에서 넬슨은 왕처럼 군림했다. 에워싼 남녀 모두가 약과 돈을 탐하며 그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히이익.”

쇳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의 가루를 코로 빨아들인 넬슨은 사용한 지폐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황급히 그것을 주워 든 남자가 신이 나 웃는 모습을 보며 그는 피식했다.

“넬슨, 이제 몸은 괜찮아? 다쳤다고 해서 걱정했잖아.”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큰 소리로 물었다. 넬슨은 히죽거리며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별거 아냐, 미친 찐따 새끼가 주제를 모르고 덤벼서 손을 좀 봐줬지 뭐.”

“전에 그 애슐리 밀러가 꺼내 준 걔라면서?”

누군가 잘난 척 끼어들었다. 그러자 다른 여자가 어머, 하고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잘생긴 남자? 키도 크고 정말 멋있던데!”

“머리숱도 많더라고.”

또다른 누가 키득거렸다.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용케 그 말을 알아들은 넬슨이 이죽거리며 그들을 비웃었다.

“보는 눈도 없는 새끼들이네. 그 자식, 고등학교 때 내 밑이었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 병신 찐따 새끼라니까?”

그는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말만 하면 내 앞에 납작 엎드려서 가랑이 사이로도 기어가는 놈이라고. 증명해 줄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들 앞에서 그 자식 머리에 오줌도 쌀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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