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에리얼은 어리둥절해졌다. 지금 이 자식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좋아했다고? 코이를? 계속?”
말의 어순조차도 엉망이었으나 그녀는 무시해 버렸다.
“그런데 코이를 행복하게 만들어서 떨어뜨린다느니 어쩌니 지껄여 댔다는 거야? 페로몬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됐니?”
애슐리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 비난쯤은 우스울 뿐이라는 듯이. 에리얼은 그런 애슐리의 반응에 기분이 상했으나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
에리얼은 정색을 하고 애슐리의 풀네임을 불렀다. 물론 그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 한 행동이었고, 애슐리의 한쪽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보자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네가 정말 코이를 좋아한다면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코이와 잘해 보겠다든가, 그게 아니면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여야 하는 거 아냐?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너는? 원하는 게 대체 뭐냐고.”
에리얼의 다그침에 애슐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너에게 그것까지 말할 생각은 없다는 듯이.
이 개자식이.
에리얼은 치솟는 환멸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물었다.
“설마 너, 코이를 상대로 밀당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갑자기 애슐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짧은 웃음소리였지만 거기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맙소사, 앨. 우린 이제 10대가 아니잖아.”
그런 유치한 발상을 떠올리는 것조차 우습다는 듯이 그는 말했으나 에리얼은 전혀 무안해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네가 하고 있는 짓은 대체 뭔데? 혹시 너, 코이를 의심하고 있는 거야?”
에리얼의 물음에 뜻밖에도 애슐리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믿어.”
그는 멈칫한 에리얼을 보며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태도로 말을 이었다.
“코이는 날 좋아하겠지, 물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럼 넌 대체 뭐가 문제야?”
이 개자식은 코이가 저를 좋아하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한껏 마음을 숨기려고 했던 코이가 안쓰럽고, 상황에 화가 치밀어 에리얼이 다그치듯 묻자 뜻밖에도 애슐리가 피식 웃었다. 고개까지 저으며, 마치 너무나 황당한 연극의 끝을 본 관객처럼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앨, 코이가 날 좋아하는 게 진심이고 아니고는 나와 상관 없어.”
에리얼은 당장 그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코이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인기척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던 에리얼은 이내 멈칫했다. 코이의 얼굴이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변해 있었다. 에리얼의 표정은 굳었으나 반면 애슐리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당황하며 엉거주춤 의자에 앉는 코이를 보자 한쪽 허벅지가 묵직하게 달아올랐다.
“코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에리얼이 먼저 물었다. 코이는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누가 봐도 이상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여기서 그 이유를 아는 건 코이를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바로 그가 이 상황을 유발한 장본인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괘, 괜찮아. 그냥 좀…… 불편해서.”
“갑자기?”
에리얼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나 당연한 의문이었으나 코이는 해명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달아나고 싶은데, 어떻게 자기 입으로 말한단 말인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고개만 젓는 코이를 내버려 둔 채 만악의 근원인 남자는 느긋하게 손을 들었다. 재빨리 걸어온 직원에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같은 것으로, 한 병 더.”
“또 마셔?”
에리얼이 얼굴을 찡그리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코이 역시 사색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건 디저트뿐이라 그나마 안심했는데, 또 술을 마신다고? 그런 둘의 반응과 대조적으로 애슐리는 평온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좋은 와인을 마실 기회는 흔하지 않지. 걱정 마, 와인 계산은 내가 할게.”
코이에게 안심하라는 듯 그는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코이는 얼굴이 벌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정말 괜찮아, 코이?”
헤어지는 와중에도 에리얼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로 줄곧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코이의 모습에 그녀는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면 병원에라도 갈래?”
왜인지 자꾸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데다 걷는 것도 어딘지 어색했다. 몸이 나빠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끼는 친구의 다정한 마음씨에도 코이는 호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가 이렇게 어색한 행동을 취하는 건 아파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친구에게 코이는 어렵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좀 피곤해서 그래…… 집에 가서 쉬면 좋아질 거야.”
‘집’이라는 단어에 에리얼은 흘긋 애슐리를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까지와 별로 다르지 않은 얼굴로 코이의 뒤에 서 있었다. 당당하게 코이의 허리를 한 팔로 안고. 에리얼은 그 꼴이 볼썽사나웠지만 그걸 지적해 봤자 애슐리는 분명 뻔뻔하게 허튼 말을 지껄일 게 뻔했다. 코이의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안고 있다느니 그런 개소리겠지.
애슐리는 접어 두고라도 코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에리얼은 일단 본심을 감추고 코이의 손을 꼭 잡았다.
“알았어, 어서 들어가. 오늘 정말 잘 먹었어,”
“응, 안녕, 앨.”
인사를 하는 코이의 얼굴에 얼핏 안도감이 스쳤다. 이제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놓았는지도 모른다. 에리얼은 그런 그를 안쓰러워하며 팔을 두어 번 더 두드린 후 손을 놓았다.
운전석에 올라서 차를 출발시키면서도 아직 서 있는 코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던 에리얼은 룸미러로 멀어지는 그들을 흘긋 본 뒤에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향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저 자식.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말뿐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변한 걸까. 아니면 원래 저렇게 음흉한 녀석이었는데 모두 속고 있었던 걸까?
거기다 오늘 코이에게 하던 행동도 이상했다. 에리얼은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마시지 않았지만 코이는 그렇지 않은데도 애슐리는 그에게 술을 먹지 못하게 했다. 그 때문에 코이는 주스나 탄산을 마셔야 했고, 마지막에 추가한 와인 역시 한 방울도 입에 댈 수 없었다.
그렇게 좋은 와인이 많다고 극찬을 했던 주제에 코이는 마시지도 못하게 하다니.
뭔가 있어.
에리얼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만간 코이를 불러내 깊이 얘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차의 속도를 높였다.
*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애슐리가 허리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줘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애슐리에게 푹 안겨 버린 코이의 머리 위로 애슐리가 속삭였다.
“카드에 적혀 있던 대로 했어?”
코이의 어색한 행동을 보면 답이 뻔한데도 일부러 물은 말에 역시나 코이는 예상대로 반응했다.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다 간신히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웅얼거리는 그를 보자 애슐리는 줄곧 가라앉히려 노력했던 성기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히익!”
갑자기 코이가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애슐리가 손을 내려 그의 엉덩이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아랫도리가 어색해 미치겠는데 살덩어리를 붙잡히기까지 하자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말았다.
그대로 굳어 버린 코이의 반응에도 아랑곳 없이 큰 손 안에 들어온 작은 엉덩이를 느긋하게 주무르며 애슐리가 물었다.
“이제 우리도 돌아갈까?”
코이는 대답조차 못 하고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집에 돌아가 이걸 벗어 버리고 싶었다. 밤은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코이는 애슐리가 열어 준 차의 문 안으로 구르듯이 들어갔다.
하아, 하아 간신히 안도의 숨을 몰아쉬는 그의 앞에서 차 문을 닫은 애슐리는 여유 있는 걸음으로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코이.”
“어, 응.”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코이가 깜짝 놀라 돌아보자 애슐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아가면 보여 줘.”
이번에는 숨을 삼키지도 못한 채 입만 딱 벌렸다. 그런 코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애슐리가 차를 출발시켰다. 왠지 평소보다 빠른 것 같은 차의 속도에 코이는 아무 말 못 하고 그저 초조해하며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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