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겨얼호온?”
에리얼이 큰 소리로 단어를 반복했다. 코이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응, 하고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서로 좋아하잖아.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그다음엔 당연히 결혼이지. 난 베타지만, 알파가 베타와 결혼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어.”
코이의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에리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제대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로 좋아한다고 해서 꼭 결혼하는 건 아냐, 코이.”
고작해야 그렇게 말한 에리얼에게 코이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린 결혼할 거야.”
그는 평소와 달리 강한 말투로 덧붙였다. 코이의 기세에 순간적으로 에리얼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코이에게 저런 자신감이 있었다니.
에리얼은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깜박였다. 기특한 한편 짠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물론 애슐리에 대한 분노도 함께였다. 테이블 밑으로 관절이 튀어나오도록 힘껏 주먹을 움켜쥔 에리얼은 행복해하는 코이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다행히 1,000을 넘기 전에 그녀의 이성이 돌아왔다.
코이의 행복을 망칠 수는 없어.
지금 자신이 애슐리에 대해 말한다는 건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 만약 그의 과거를 폭로한다면 코이는 상처받을 게 분명했다. 애슐리가 골탕을 먹는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통쾌했지만 그 대가로 코이가 괴로워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최소한 청혼만큼은 막아야 했다. 만약 애슐리가 정말로 코이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 생긴다면 코이는 몇 배로 심한 자괴감을 느낄 테니까. 에리얼은 치미는 화를 욱여넣으며 짐짓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네 말뜻은 잘 알겠어. 하지만 청혼은 미루는 게 좋지 않을까?”
“어째서?”
예상했던 되물음에 에리얼은 차분하게 설득했다.
“좋아한다고 먼저 고백했던 건 너지? 그럼 애쉬가 고백할 기회를 네가 빼앗아 간 건데, 청혼은 그 애가 할 수 있도록 양보하는 게 어때?”
“어…….”
코이가 눈을 깜박거렸다. 에리얼은 그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사뭇 다정한 말투로 덧붙였다.
“애쉬가 너한테 청혼하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애도 널 좋아한다고 했다면서? 평생 너 하나뿐이라고 했을 정도면 당연히 결혼도 하려고 하겠지? 둘은 같은 마음일 테니까.”
일리 있는 얘기였다. 코이는 벌써 그녀의 말에 홀딱 넘어가 버렸다. 에리얼은 확신을 가지고 다시 물었다.
“그럼 청혼은 그 애가 하게 내버려 둬. 고백도 못 했는데 청혼까지 네가 해버리면 많이 실망할 테니까. 일생에 한 번뿐인 기회잖아, 안 그래?”
넘어오라고 속으로 빌 필요도 없었다. 코이가 금세 그렇구나, 하고 납득하는 얼굴을 보고 에리얼은 어깨의 긴장을 풀고 진심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코이 또한 마주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앨. 난 그런 건 생각 못 했어.”
“그럴 수도 있지 뭘. 반지를 사기 전에 먼저 나한테 얘기해서 다행이다, 그렇지?”
테이블 위로 코이의 손을 잡은 에리얼이 부드럽게 말하자 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래도 아르바이트는 해야 될 거 같아.”
코이가 멋쩍어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애쉬한테 언제까지나 얹혀살 수는 없으니까…… 나도 어느 정도는 돈을 보태야지. 많이는 못 하겠지만…….”
“그 돈을 모아서 나중에 애쉬에게 청혼을 받고 나면 그때 선물을 하는 건 어때?”
에리얼이 재빨리 아이디어를 냈다.
“어차피 애쉬한테는 푼돈일 거고 집세에 별로 보탬도 안 될 거야. 그러느니 차라리 그 돈을 모아서 선물을 사는 게 낫지 않겠어? 청혼의 기회를 애쉬에게 양보한 대신으로.”
“아…….”
코이의 두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환한 얼굴로 말했다.
“앨, 넌 정말 머리가 좋구나. 그거 정말 괜찮다. 그렇게 해야겠어. 고마워.”
“그렇지?”
나,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네.
에리얼은 자신의 임기응변에 감탄하며 조금 우쭐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코이의 존경 어린 시선이 더욱 그녀에게 자신감을 북돋워 줬다.
“그럼 됐네. 아르바이트 자리는 이제 알아보려고 하는 거지? 찾아보진 않았고?”
에리얼이 묻자 코이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노는 데 익숙해진 거 같아. 이렇게 오래 쉬어 본 적이 없는데…….”
얼굴을 붉히며 찻잔을 내려다보는 코이의 모습에 에리얼은 다시 물었다.
“애쉬는 별 얘기 안 하지?”
“어, 하지만 마냥 놀고 있을 수는 없는 거니까.”
코이에게는 당연한 얘기였지만 애슐리의 의견은 다를지도 모른다. 에리얼은 잠깐 생각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넌 하루 종일 뭘 하고 있어?”
이제서야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뭔가 이상했다. 쉬는 거야 당연히 좋겠지만 왠지 에리얼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역시나 코이는 순간 당황하더니 우물쭈물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저기, 그게…… 일어나면 점심시간이 다 돼 있어서…… 청소 부르고 그동안 식사하고 그러면 훌쩍 오후가 지나 버리더라고. 어영부영하다가…… 저녁 주문하고…… 애쉬가 오면…… 그러니까…….”
코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너무나 투명한 반응에 참다못한 에리얼이 대신 말을 맺었다.
“애쉬는 집에 오자마자 섹스부터 하니? 저녁도 안 먹고?”
코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자 에리얼은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뭐 그런 짐승 같은 놈이 다 있어.
에리얼은 찡그린 얼굴로 빤히 코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극알파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하나? 예전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지는 않았지만 애슐리는 평범한 그 나이 또래의 사내아이 정도 수준일 뿐 그렇게 밝히는 타입은 아니었다. 저렇게 퇴근을 하자마자 달려드는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애슐리를 제외하고 본다면 저런 경우가 있기는 했다. 에리얼은 몇 명의 친구들의 경우를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둘이 지금 신혼인 거야, 뭐라는 거야.
갓 결혼한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였지만 얼굴이 빨개져 부끄러워 허둥지둥하는 코이의 모습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둘 다 성인이니까 알아서 할 문제긴 한데, 넌 베타잖아. 그 녀석한테 그렇게 휩쓸리면 안 돼, 몸을 생각해야지.”
에리얼이 할 수 있는 충고는 고작 그 정도가 다였다. 일일이 옆에서 그를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됐다. 어쨌든 둘 사이의 일이니까.
“콘돔도 꼭 쓰고. 그 녀석은 극알파지만 넌 아니잖아. 병에 걸린다고.”
괜찮아, 애쉬는 나하고밖에 하지 않는걸. 줄곧 나만 사랑했다고 했어.
코이는 생각했으나 자신을 걱정해 주는 에리얼의 말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응, 고마워. 그렇게 할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코이를 빤히 바라보았던 에리얼이 그래, 하더니 팔짱을 끼고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코이.”
“응.”
왠지 진지한 부름에 코이가 내심 긴장하며 대답하자 그녀는 똑바로 코이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항상 네 편이라는 걸 잊지 마.”
차분한 음성으로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지지할 거야. 힘들거나 괴로운 일이 생기면 꼭 나한테 얘기해 줘.”
“알았지?” 하고 확인하듯이 덧붙인 그녀에게 코이는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에 뭉클한 것이 올라와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응.”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코이가 큰 숨을 내뱉고 확고한 어조로 덧붙였다.
“잊지 않을게. 저, 나도 그래. 항상 네 편이야. 너도,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줘, 꼭이야.”
“그래.”
에리얼이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코이는 역시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약속했어.”
“너도, 약속한 거야.”
서로에게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줄 것을 확인한 뒤 그들은 손가락을 뗐다.
* * *
“어서 오십시오, 나일즈 씨.”
도어맨이 문을 열어 주며 인사를 했다. 코이는 자신이 이곳의 주민인 것처럼 맞이해 주는 그의 모습에 왠지 쑥스러워져 작게 인사를 마주 한 뒤 서둘러 걸음을 뗐다.
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던 그는 그것이 최상층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무심코 멈칫했다. 애슐리가 벌써 돌아온 모양이었다. 현관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하자마자 아차,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오랜만에 에리얼을 만나 지나치게 시간을 보내 버렸다. 언제나처럼 같은 시간에 돌아왔을 애슐리를 떠올리자 마음이 급해졌다.
허겁지겁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코이는 문이 열리자마자 발을 내디뎠다가 화들짝 놀랐다. 애슐리가 중문 너머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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