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릭 미 업 이프 유 캔-198화 (198/216)

198화

잠에서 깨어나 보니 코이는 혼자였다. 항상 그렇듯이 애슐리는 이미 출근하고 보이지 않았다.

“……아.”

침대에서 내려오던 그의 입에서 무심코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유난히 아래쪽이 아팠다. 애슐리가 특별히 심하게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문득 현기증이 밀려왔다. 코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고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이 좀 안 좋은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 괜히 불안해졌다. 한동안 그대로 앉아 심호흡을 했던 그는 현기증을 가라앉히고 난 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집 안은 여느 때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쓸쓸함은 또다시 그를 찾아왔다. 코이는 느리게 발을 옮겨 주방으로 향했다. 항상 그랬듯이 애슐리는 같은 자리에 메모를 남겨 두었다.

코이, 오늘은 청소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쉬어.

그 아래로는 건강 검진에 필요한 서류가 놓여 있었다. 상단에 코이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로 보아 필요한 내용을 적으라는 의미 같았다.

청소는 안 해도 된다니 안심했다. 오늘은 정말 그냥 쉬고 싶었다. 식사도 가져다달라고 부탁한 뒤 코이는 그동안 서류를 채워 넣었다. 질문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다. 수술한 적이 있는지, 가족 병력이 있는지 따위를 묻는 설문에 그는 잠깐 생각했다가 ‘모름’에 표시를 했다. 아버지의 암 병력 외에 아는 게 없었다. 부모의 종은 베타라고 적었다.

서류를 반쯤 채워 넣었을 때 그는 생각을 바꿨다. 식사는 내려가서 하기로 하고 프런트에 전화해 취소를 한 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나일즈 씨.”

친절하게 인사를 건넨 직원에게 알은체를 한 코이는 그가 안내한 대로 걸어가 창가의 자리에 앉았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쉬자 곧 직원이 그에게 메뉴북을 건네 주었다.

“좋은 차가 들어왔는데 어떠세요?”

미소를 지으며 묻는 말에 코이는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큰 차이는 느끼지 못하니까 상관없었다.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먼저 나온 차를 마시며 한동안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었다. 자꾸만 나른해지는 몸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날씨도 화창하고 잠도 충분히 잤는데 왜 이런 걸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을 때였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 코이를 스쳐 가 맞은편 의자를 꺼냈다. 코이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선뜻 앉아 버린 그의 행동에 코이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깨를 스치는 다소 긴 은발에 감싸인 목은 길고도 우아했으며 코이에게 향한 눈동자는 진한 초록색이었다. 단정한 코와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광대와 부드러운 턱은 물론이고 잘 익은 체리처럼 붉은 입술은 단연코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긴 속눈썹은 머리칼과 같은 색이었고, 투명하고 하얀 피부엔 작은 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코이는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바로 겁도 없이 발코니에 알몸으로 나와 앉아 담배를 피우던 바로 그 천사였다. 그가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다니 이건 꿈인 걸까.

정말로 사람이었구나.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새삼 되새기며 코이는 다시금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벗은 몸을 분명히 봤음에도 왠지 그의 성별을 규정하는 것에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도 천사에게는 성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사람이라는 걸 아는데도 코이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거기다 고작 두 번째 보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친밀감이 들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마저 느껴져 코이는 더욱 당황했다. 대체 이 기분은 뭘까?

넋을 잃고 바라보는 코이에게 그가 긴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생각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 왠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음성에 코이가 화들짝 놀라자 그가 말을 이었다.

“잘 감추고 있구나. 기특한 아이네.”

무슨 말인지 코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거기다 마치 한참 연상인 것처럼 하는 말에 그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겉보기엔 비슷한 나이대 같은데, 혹시 젊어 보이는 타입인 걸까?

“저…… 죄송하지만, 몇 살이신가요?”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말을 하고 나서 깨달았다. 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상대방은 빙긋이 웃으며 되레 질문을 했다.

“몇 살 같아 보여?”

“어…….”

당황한 코이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막 말을 하려는 찰나 건너편에서 먼저 답을 내놓았다.

“무조건 너보다 열 살 많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보고만 있는데, 그가 웃음을 지었다. 달콤한 얼굴에 그만 넋을 잃어버린 코이에게 그는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이네, 우린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지만 믿진 않았거든. 난 나 말고 동류는 처음 봤어. 너도 그렇겠지? 우린 정말, 아주 희귀하니까 말이야. 평생 마주 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혼자만 아는 얘기를 늘어놓으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무는 그를 보고 코이가 안 된다고 말을 하려는 찰나 직원이 다가와 정중하게 제지했다.

“죄송합니다, 전 좌석 금연입니다.”

남자는 담배를 문 채 고개를 들었다. 코이가 내심 긴장했을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불을 붙이지만 않으면 괜찮죠?”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건 남자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뜻밖에도 직원은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네, 하고 대답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필요한 건 없는지 확인까지 한 후 돌아서서 가 버리는 뒷모습에 코이는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박였다. 그런 코이에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친절하지.”

이런 상황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코이의 주의를 끈 것은 다른 쪽이었다.

“‘우리’요?”

남자가 한 말을 반복하자 그는 엷은 웃음을 지었다.

“너도 알잖아, 아주 약간만 페로몬을 흘려 주면 누구든 넘어온다는 걸.”

도통 모를 소리만 하고 있었다. 코이가 멍하니 보고만 있자 그제야 남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내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것처럼. 우리끼린 그럴 필요 없잖아.”

또다시 그는 ‘우리’라는 표현을 썼다. 코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런 천사 같은 사람과 자신이 어떻게 한 무리로 엮일 수 있다는 말인가.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코이의 표정에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코이는 주저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얘긴지 전혀 모르겠어요…… 당신과 제가 동류라니, ‘우리’라는 건 무슨 말인가요?”

그가 담배를 입에 문 채 가만히 코이를 바라보았다. 작은 움직임은커녕 눈조차 깜박이지 않는 그의 반응에 코이는 그만 불편해져 안절부절못했다. 한동안 가만히 코이를 보기만 하던 상대방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더니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내가 너와 같다는 걸 지금 보여 줬잖아, 경계할 거 없어. 우린 같은 편이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페로몬이요?”

더욱 모를 소리였다. 뉘앙스로 그가 자신에게 페로몬을 흘렸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뿐이었다. 코이는 이 남자가 왜 자신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전 베타인데요, 페로몬이라니 무슨 얘긴지…….”

코이의 말에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굳이 내 앞에서까지 숨길 필요 없잖아.”

그는 전혀 코이를 믿지 않고 있었다. 참다못한 코이가 다시 물었다.

“아까부터 우리, 우리 하는데 대체 당신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가요? 좀 제대로 얘기해 줘요, 전혀 모르겠어요.”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코이를 응시했다. 코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반신반의하던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뚫어져라 코이를 바라보던 그가 짧게 감탄사를 뱉어 냈다.

“……맙소사, 진심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가 담배를 빨아들였다가 연기가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대신 후, 하고 한숨을 내쉰 남자가 입을 열었다.

“겨우 동류를 만났나 했는데 자기가 뭔지도 모르는 머저리였다니.”

“네?”

코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물었다. 처음 느꼈던 친밀감은 점차 무뎌지고 조금씩 남자의 무례함에 대한 불쾌감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면전에서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

하지만 그런 코이의 반응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남자는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럼 넌 평생 베타라고 믿고 있었단 말이야?”

“베타가 맞아요. 테스트에서도 그랬고…….”

“그런 허접한 테스트는 무시해. 어차피 우린 테스트해 봤자 나오지 않으니까.”

다시 ‘우리’라는 표현을 썼던 남자가 짧은 한숨을 사이에 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코이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넌 베타가 아니라 극오메가야, 나와 같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9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