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릭 미 업 이프 유 캔-204화 (204/216)

& & &

코이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것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에리얼이 출근한 뒤 느지막이 잠에서 깬 그는 아직 나른한 몸을 움직여 주방으로 향했다. 에리얼이 냉장고에 붙여 둔 메모를 떼어 내 확인한 그의 입가에 저절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냉장고에서 아무거나 꺼내 먹어. 7시까지 돌아올게. L.

그녀의 메모에 적힌 대로 대충 재료를 꺼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은 코이는 그녀가 퇴근 할 때를 대비해 저녁 식사를 만들기로 했다. 일단 씻고 커피를 먼저 끓이고 있는데, 문득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애쉬?

화들짝 놀라 다급하게 휴대 전화를 확인한 그의 입에서 실망스러워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내용을 읽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메시지를 곱씹었다.

*

“줄리한테서 연락이 왔다고?”

코이가 준비해 놓은 저녁 식사를 하며 식탁에 마주 앉아 있던 에리얼이 놀라 물었다. 코이는 난처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 내용은 아냐. 그냥 잘 지내고 있느냐고, 안부 인사 정도.”

“그래서 뭐라고 보냈어?”

에리얼의 물음에 코이는 그냥, 하고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다고.”

이 둔탱이가.

에리얼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심상치 않은 눈길에 코이는 당황해 눈치를 봤다. 에리얼은 한동안 그를 노려보다가 곧 후,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일단 네 형질 검사를 해 보자.”

어, 하고 코이가 뭔가 말을 하기 전에 에리얼이 먼저 덧붙였다.

“극오메가면 베타로 나온다고 하니까, 여전히 베타라면 넌 극오메가가 맞을 거야. 네가 히트사이클을 겪은 건 사실이니까.”

더 많은 검사를 해 보고 싶었지만 에리얼의 형편도 넉넉지 않았고 코이 또한 가진 돈으로는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만약을 위해 돈을 아낄 필요가 있었으니까.

개럿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좀 더 여유가 있었을 텐데.

집세를 내기도 빠듯한 형편이라 전혀 짬이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두 달만 더 참을걸, 후회가 밀려왔으나 벌써 늦었다. 에리얼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가 극오메가라는 건 당장은 비밀로 하는 게 어떨까?”

의아해하는 코이에게 에리얼이 설명을 덧붙였다.

“극오메가는 아주 희귀하기 때문에 그게 밝혀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그러니까 일단 비밀로 하고, 경과를 좀 보자고. 만약에 얘기를 해야 될 상황이 온다면 오메가라고만 하는 쪽이 나을 거 같아.”

불현듯 엔젤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과 만났던 걸 비밀로 하자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그가 자신의 형질을 감춰 주려 했다고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다시 엔젤과 만나고 싶었지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코이가 그에 대해 아는 건 엔젤이라는 이름뿐이니까. 그나마 본명인지도 불명확한.

“애쉬한테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저기…… 내가 오메가인 게 확실하다면.”

도저히 입에서는 ‘극오메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대강 얼버무리자 에리얼이 말했다.

“네가 애쉬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말해도 되겠지. 하지만 난 당분간은 애쉬한테도 비밀로 했으면 좋겠어.”

“어째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비밀을 만들다니 썩 내키지 않았다.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코이에게 에리얼이 말을 이었다.

“네가 오메가라는 걸 그 자식이 알고 있었는지 몰랐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잖아. 고의로 속였다면 문제 아니니? 일단 상황을 봤으면 해.”

먼저 자신의 생각을 말한 에리얼이 곧 한발 물러났다.

“하지만 이건 내 의견이고 네가 말하고 싶다면 해. 어쨌든 네 일이고, 네 의사가 중요하니까.”

코이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애슐리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도 의구심이 남아 있는 걸까, 생각하니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선뜻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주저하는 코이를 잠시 바라보았던 에리얼이 곧 화제를 돌려 물었다.

“차라도 마실래? 저번에 마셨던 차가 좀 남아 있는데.”

“응, 고마워.”

일부러 시간을 들여 그가 생각할 시간을 준 에리얼은 차를 만들어 돌아왔다.

“줄리는 어떻게 할래?”

“어?”

잊고 있던 화제에 코이가 멈칫하자 에리얼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에 처음 연락하는 거지? 그쪽에서 다시 연락이 왔으니까 한 번 더 만나 보면 어때? 지난번에 네가 무례하게 굴었던 걸 만회도 할 겸.”

은근히 인기가 많단 말이야.

에리얼은 건너편에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며 땀만 뻘뻘 흘리고 있는 코이를 보며 생각했다. 어이없게 깨져 버린 데이트에 코이 대신 사과하며 자신의 친구가 얼마나 숫기가 없고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지에 대해 열심히 변명을 했던 에리얼에게 오히려 줄리는 반색을 했었다.

<세상에, 앨. 저렇게 순진한 미남이라니, 이건 희귀동물 정도가 아니라 멸종 위기종이라고.>

오히려 코이에게 더욱 호감을 내비치는 그녀의 반응에 에리얼은 반신반의하며 애매한 웃음만 지었었다. 하지만 먼저 연락을 하다니, 줄리가 진심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코이와는 다른 쪽으로 마음이 뒤숭숭했다. 헤어지기 직전 개럿에게 들은 바로는 사라 또한 코이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코이가 문어발이 되겠어.

오메가라고 해도 이성과 사귈 수 있다. 상대에게 미리 그 사실을 말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임신의 염려가 없다고 좋아하는 경우도 있는 데다 사귄다고 꼭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

설마 그 개자식도 코이를 먹고 버리려는 속셈인 건 아니겠지?

불쑥 떠올랐던 나쁜 생각을 떨치고 에리얼이 말을 꺼냈다.

“어쨌든 용기를 낸 상대에게 너도 그만큼의 반응은 보여야 되지 않겠어?”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애쉬인걸…….”

코이가 흐릿한 말투로 웅얼거렸다.

“줄리와 사귀라는 게 아니잖아.”

에리얼은 참을성 있게 말을 이었다.

“거절을 하더라도 만나서 하라고. 지난번에 네가 줄리에게 무례한 짓을 했으니까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코이 또한 일말의 죄책감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 정도는 애쉬도 이해할 거야.

애쉬를 떠올리자 또다시 가슴이 아파졌다. 아직도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아마 러트 때문에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코이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른 뭔가가 있다고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그럼…… 그렇게 할게.”

코이가 어렵게 수긍하자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인 뒤 덧붙였다.

“사라한테도 연락하고. 계속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았어.”

생각해 보니 자신이 여기저기에다 몰상식한 짓을 한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의기소침해진 그에게 에리얼은 다정하게 용기를 북돋워 줬다.

“의사를 확실히 밝히는 건 좋은 일이야. 네가 좋아하는 건 애쉬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은 확실히 거절하는 게 옳지, 안 그래?”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거절하고 올게.”

“그래.”

에리얼은 미소를 지은 뒤 건배하듯 찻잔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날 바로 간단한 검사를 받기로 하고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

코이가 전화를 받은 것은 내내 뒤척이다 간신히 선잠에 빠져들었을 즈음이었다. 벨 소리를 즉시 인식하지 못하고 꿈속을 헤매던 그는 뒤늦게 반쯤 깨어나 매트리스 위를 더듬어 휴대 전화를 찾았다.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코너 나일즈?

억양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흡사 기계 같은 음성에 코이는 잠이 확 깨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는 그에게 상대가 말을 이었다.

- 미스 버니스란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구나, 전할 말이 있어서.

“애쉬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사색이 되어 소리치듯 묻자 그녀는 잠깐 사이를 두고 아니, 하고 말했다.

- 주니어는 괜찮아. 좀 전에 의식이 돌아왔단다. 단지 조금…… 작은 문제가 생겨서.

“문제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달려들듯이 물은 코이에게 버니스가 답을 내 주었다.

-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냐. 그저…….

어째서인지 뜸을 들였던 그녀가 이윽고 덧붙였다.

- 러트 때문에 기억에 장애가 왔어. 무슨 얘긴지 알겠니? 주니어의 기억이 너와 다를 수 있다는 거야.

예상치 못한 말에 코이는 즉시 반응하지 못했다. 애쉬와 내 기억이 다르다니 무슨 얘길까? 침묵하는 그에게 버니스가 말을 이었다.

- 어쨌든 혼란이 없도록 미리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주니어는 다시 잠들었어. 깨어나서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되면 먼저 네게 연락할 거야. 넌 별일 없니? 지금 어디 있지?

“어…… 없어요. 지금 친구…… 앨의 집에 있다고 하면 애쉬도 알 거예요.”

뜻밖에 자신의 상황을 확인하는 물음에 당황하며 말을 더듬자 그래, 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 늦은 시간에 미안하게 됐구나. 그럼 더 쉬렴.

여전히 사무적인 말투로 정해진 말만 덧붙인 버니스는 곧 전화를 끊었다. 코이는 한동안 휴대 전화를 내려다봤으나 더 이상 연락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웠으나 결국 날이 샐 때까지 전혀 잠들지 못했다.

& & &

“이런 멋진 식당에 초대해 주다니, 고마워.”

맞은편에 앉은 줄리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자 코이는 부끄러워하며 마주 웃었다. 그가 줄리를 초대한 식당은 애슐리가 소개해 준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고급 레스토랑은 여기가 전부였으며,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의 고급 레스토랑 또한 여기뿐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가 혼자라도 언제든 이곳에 방문할 수 있도록 애슐리가 미리 손을 써 준 것에 감사하며 코이는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저번엔 정말 미안했어.”

다시 사과하자 그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이는 식사가 끝난 뒤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밝히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대신 같이 있는 시간 동안은 줄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줄리는 화제가 다양했고 대화를 나누기에 즐거운 상대였으므로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직원이 메뉴북을 가져올 때까지 그들은 화기애애하게 말을 나누고 있었다. 주변의 소소한 사건들을 늘어놓으며 웃었던 그들에게 직원은 메뉴북을 한 권 씩 건네준 뒤 똑바로 섰다.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던 코이는 별생각 없이 첫 장을 펼쳤다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어?

몇 차례 반복해서 눈을 깜박였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메뉴 옆에 쓰여 있는 금액은 지금껏 그가 봐 왔던 것보다 최소한 0이 하나 이상은 더 있었다. 코이는 당황해 머리가 정지해 버렸다.

어떻게 된 거지?

얼음처럼 굳어 버리고 만 코이에게 지배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급히 직원을 제치고 다른 메뉴북을 꺼낸 그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이쪽이 진짜입니다. 저희가 메뉴북을 바꾸느라 샘플을 뽑았는데 직원이 실수로 잘못 드렸습니다. 부디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양쪽에 다른 메뉴북을 다시 건네준 지배인은 즉시 이전의 메뉴북을 회수했다. 코이에게 새롭게 들어온 메뉴북은 이전에 보았던 것과 동일한 가격이었다.

“아, 놀라라.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깜짝 놀랐지 뭐야.”

줄리가 웃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코이는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지배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메뉴북을 바꾼다고 했는데 지금 받은 것과 좀 전에 받은 것은 전혀 다른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건 금액뿐이었다.

……설마.

자신을 향해 미소 짓던 애슐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애쉬가 뭐라고 했었지? 회원제라서 가격이 이렇다고 했었나? 그럼 이건 회원들 전용 메뉴북인 거야? 아니, 회원제라면 회원들만 오는 거잖아. 그럼 전용 메뉴북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을 텐데?

어쩌면 애쉬가 나한테 거짓말을…….

줄리가 뭔가를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지만 코이는 좀처럼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은 계속 애슐리에게 돌아가 끝도 없는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후우.”

양해를 구한 뒤 화장실에 간 코이는 찬물로 얼굴을 씻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휴대 전화를 확인해 봤지만 여전히 걸려 온 전화는 없었다.

내가 먼저 연락해 볼까.

애슐리를 위해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핑계였다.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 미스 버니스를 향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는 걸 그는 깨달았다.

정신 차려, 지금 중요한 건 애쉬잖아.

자신의 뺨을 세게 여러 번 두드렸던 코이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검사가 끝나고 여유가 생기면 애슐리한테서 연락이 올 것이다. 찾아보니 러트가 오면 최소 이틀, 길게는 닷새도 잠에 취한다고 한다.

잠깐 의식이 돌아왔다지만 다시 잠들었다고 했으니 좀 더 기다려야 할 거야.

단순하게 계산해도 아직 날짜는 남았다. 조급해하지 말자,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부터 생각해.

코이는 최대한 냉정해지려 애썼다. 다시 애쉬를 만나기 전에 주변을 먼저 정리하려고 한 거잖아. 앨에 대한 예의이기도 해. 일단은 줄리에게 집중하자.

만약에 애쉬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더라도 그건 나를 위해서였을 거야.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고 스스로를 다독인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다행히 식사를 끝낼 때까지 무난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자리에서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막 들어오려던 사람과 마주쳤다. 무심코 뒤로 물러난 코이와는 달리 줄리는 반색을 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머, 맬. 여기서 만나다니!”

“줄리!”

두 손을 맞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자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코이는 멀뚱히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누가 봐도 부잣집 아가씨로 보이는 청초한 미인이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줄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반갑다, 이게 얼마 만이야.”

“그러게. 잘 지냈지? 그동안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좀 바빴거든.”

수줍게 웃는 미소와 맞잡은 손에 낀 반지를 본 줄리가 뒤이어 그녀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더더욱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 정말이야? 진짜로?”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 친구가 둘을 서로 소개했다. 약혼자라는 말을 들은 줄리가 함박 미소를 짓더니 두 팔을 활짝 폈다.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은 둘은 반짝이는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다 곧 줄리가 뒤로 물러났다.

“자세한 얘긴 다음에 해 줘, 꼭이야.”

“응, 전화할게.”

친구는 슬쩍 코이를 보고 의미심장한 시선을 줄리에게 던진 후 자리를 떴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줄리가 그제야 코이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갑자기 친구를 만났네. 너무 오랜만이라 그만, 미안해.”

“괜찮아. 오랜만에 만나면 그럴 수 있지.”

선뜻 대답한 코이는 직원이 건네준 차 키를 받아 차에 올랐다. 에리얼이 빌려준 차로 줄리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동안 코이는 어색한 침묵을 깨려 먼저 말을 꺼냈다.

“친한 친구였나 봐.”

줄리 또한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선뜻 말을 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데 정말 착해. 집안이 정말 부잔데 티를 하나도 안 내고, 항상 조용하고 그래서 모두 맬을 좋아했어. 그동안 바빠서 연락을 못 했는데 약혼을 했을 줄은. 다행이야, 이제 괜찮아 보여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구나.”

커브를 돌며 맞장구를 치자 그녀는 응,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교 때 약혼 직전까지 갔다가 깨졌거든. 그때 좀 많이 힘들어했었어.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남자가 잘못한 거야, 무조건.”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 듯 줄리가 다소 격앙된 음성으로 내뱉었다.

“하여간 어쩌다 하필 그런 개자식이랑 엮여서. 정말 재수가 없었다니까.”

줄리의 집이 멀찍이 보이기 시작했다. 코이는 그녀에게 할 말을 떠올리며 건성으로 말했다.

“운이 나빴구나. 그래도 지금은 좋은 사람을 만났으니까 잘됐잖아.”

“그건 그렇지. 아, 그쪽에 세우면 돼.”

줄리가 가리킨 곳에 차가 멈추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하긴, 애슐리 밀러 같은 개자식을 또 만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려던 코이가 멈칫했다. 그가 반응한 것은 몇 초 뒤의 일이었다.

“……지금, 뭐라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