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릭 미 업 이프 유 캔-206화 (206/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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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나일즈 씨.”

숨이 턱에 닿아 헐떡이는 코이를 향해 도어맨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다행히 그를 알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코이는 안도하며 끊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녕, 하세요, 애쉬, 하아, 밀러 씨는, 돌아……왔나요?”

거친 숨결 사이로 간신히 물은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3시간 전에 올라가셨습니다.”

도어맨은 확인을 해 주고 앞장서서 걸어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급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코이의 심장은 이제 다른 이유로 뛰기 시작했다. 곧 만날 수 있어. 이제 곧. 드디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코이는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넓은 집 안을 가로질러 마침내 주방에 다다랐을 때, 코이는 그만 숨을 크게 들이켜고 말았다.

그는 거기에 있었다. 조리대에 한 손을 기대고 위스키를 마시며 맞은편의 전면 창을 통해 밖을 보고 있는 장신의 남자를 확인하자 코이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애쉬.

숨소리처럼 잦아든 음성이 손바닥 안에서 사그라들었다.

하아, 하아.

입 안에서 가쁜 숨이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숨이 차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왠지 모를 감격에 겨워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을 때, 애슐리가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아주 잠깐 코이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무표정했던 애슐리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지고, 그가 입을 열었다.

“코이.”

위스키 글라스를 내려놓은 애슐리가 두 팔을 넓게 펼쳤다. 코이는 즉시 그에게 뛰어들었다.

“애쉬……!”

정신없이 달려가 애쉬를 꼭 끌어안자 즉시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두 팔에 가득 찬 굵은 몸도, 체온도, 틀림없이 진짜였다.

꿈이 아냐.

그동안 몇 번이나 애슐리의 꿈을 꿨다. 하지만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계속해서 멀어지기만 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코이는 더듬거리며 애슐리의 몸을 확인했다.

정말이구나. 정말 돌아왔어.

“보고 싶었어.”

코이의 말에 애슐리 또한 그를 끌어안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나도 그래.”

“그럼 왜…….”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와 코이는 억지로 숨을 내리누르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연락하지 않았어……? 돌아와 놓고 왜…… 아, 아냐, 괜찮아. 돌아왔으면 됐어. 이걸로 충분해.”

원망이 서렸던 말을 황급히 지우고 거듭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얼굴을 바짝 붙이고 체온을 느끼는 코이의 귀에 애슐리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애쉬……?”

코이의 들뜬 목소리가 불안하게 가라앉았다. 주저하며 고개를 들자 곧바로 애슐리의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건 그때였다. 문득 버니스의 말이 머리를 스쳤을 때, 애슐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뺨에 키스했다.

“어떻게 알고 왔어?”

귀에 익은 다정한 목소리에 코이는 반신반의하다 입을 열었다.

“미스 버니스가 연락해 줬어. 네가 퇴원했다고. 얘길 듣자마자 뛰어왔어.”

“……그랬구나.”

약간의 사이를 두고 애슐리가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로 코이를 위로했다.

“많이 걱정했지? 미안해, 이젠 괜찮아.”

코이는 다시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어렵게 고백했다.

“미스 버니스가, 네 기억에 이상이 생겼다고 해서…… 저, 괜찮은 거지? 별일 없는 거 맞지?”

“별거 아냐.”

이번에는 주저없이 대답이 나왔다.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버니스가 과장해서 말한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마.”

“정말 기억엔 문제없어?”

코이가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묻자 애슐리는 가볍게 넘겼다.

“심각한 건 아냐. 그보다 코이, 앨의 집에 있었다면서?”

돌연한 화제에 코이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응…… 좀, 그럴 일이 있어서…….”

“무슨 일?”

애슐리가 웃으며 코이의 코에 코를 문질렀다. 귀여운 연인의 장난에 코이는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토록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에리얼의 말이 일시에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상관없어.

코이는 그동안 수없이 되뇌었던 말을 자신에게 읊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애쉬는 날 사랑해.

“앨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코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넌, 네가 날 행복하게 해 주려는 건, 그만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네가, 앨에게 그렇게 말했다면서.”

애슐리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코이의 설레던 심장이 조금씩 내려앉았다. 여전히 애슐리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에 코이의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애쉬?”

그는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거짓말이지? ……앨이 한 얘기는, 그냥 농담이었던 거지?”

코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부디 애슐리가 부정해 주길.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해 주길.

그러면 난 전부 믿을 텐데…….

“그리고?”

애슐리가 물었다. 코이가 바라던 대답 대신 그는 다른 질문을 했다.

“또 뭐가 있어?”

코이는 더 이상 웃고 있는 것이 힘들어졌다. 입가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어렵게 대답했다.

“네가…… 약혼을, 했었다고.”

성대에서 목소리를 쥐어 짜내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그는 말을 이었다.

“결혼하기로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부자에다가, 아주 미인이던데.”

뒷말에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코이는 머뭇거리다 고백했다.

“그 프렌치 식당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어. 같이 갔던 사람이 그 여자분이랑 아는 사이였어서…….”

간신히 거기까지 말한 코이가 자신의 온 힘을 쥐어짜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뭔가 사정이 있었던 거겠지? 넌 계속 날 좋아했으니까, 안 그래?”

코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거듭해서 물었다.

“지금껏 좋아했던 건 나잖아, 응?”

대답을 바라며 재촉하는 말에 코이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이 느슨해졌다. 코이는 애슐리가 그를 놓아주고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는 모습을 보았다.

후, 애슐리가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허공을 가른 하얀 연기가 이내 부옇게 흐려졌다. 그는 다시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사실이야.”

코이는 놀라 크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애슐리는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너무나 일상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실이라고, 전부. 네가 말한 것 전부 다.”

코이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애슐리가 그의 머리를 힘껏 때렸더라도 이렇게 멍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완전히 얼이 나가 버린 것 같던 코이가 간신히 입을 열었으나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랬냐고?”

코이의 말을 대신하듯 애슐리가 물었다. 지금까지 다정했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차갑게 식은 냉엄한 얼굴이 코이를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진작 앨이 너한테 떠들어 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다는 듯이 애슐리가 말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코이가 급히 물었다.

“설마, 일부러 앨한테 그런 말을 했던 거야? 왜?”

내가 어떤 말을 듣더라도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고 있었던 걸까.

심장 한구석이 서늘해졌을 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

그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엷은 웃음을 지었다. 코이는 그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어졌다. 저 사람이 애쉬가 맞는 걸까?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 남자는 어딜 갔지? 저건 대체 누구야?

“날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

코이는 간신히 입을 벌려 말을 했다. 이게 얼마나 비참한 물음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애슐리가 모두 농담이었다고 말해 주길 간절히 바라며 그를 올려다보는 코이에게 애슐리는 후, 연기를 뱉어 내더니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사랑한다고.”

저렇게 차가운 음성으로 하는 사랑의 말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역시나 창백한 얼굴로 굳어진 코이를 향해 애슐리는 여전히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정말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는 담배를 낀 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얹고 미소를 지었다. 코이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져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나는…… 평생 너뿐이었어.”

코이는 더듬거리며 털어놓았다.

“너한테 상처 줬던 걸 줄곧 후회했어.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널 만나려고 죽을힘을 다해 돈을 모았는데…….”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려고 했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아. ……지난 일이라는 거 알아. 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으니까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좋아했었을 수도 있지. 그런데 넌 나한테 말했잖아, 나뿐이라고. 너도 줄곧 나밖에 없었다고 말했으면서, 어떻게. 그러고서 또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나는, 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코이는 입을 다물었다. 눈앞은 어질거리는데 심장은 여지없이 욱신거린다. 그런 코이의 표정을 본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코이, 넌 대체 나한테 뭘 기대했던 거야?”

여전히 웃음이 섞인 음성으로 그는 말했다. 지금 코이의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비소를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탄식하듯 털어놓았다.

“넌 나를 버렸잖아.”

코이는 또 한 번 그에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 말 못 하고 있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빙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걸 잊을 거라고 생각했어? 코이, 너도 이젠 더 이상 순진한 나이가 아니잖아. 그렇다면 내가 널 믿지 않을 거라는 사실쯤은 자각하고 있었어야지.”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가 서서히 색을 되찾았다. 빛바랜 사진처럼 부연 시야를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며 되돌리려 애쓰던 코이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럼, 나에게 복수하려는 거야?”

지금까지 내게 했던 모든 말들, 달콤한 키스, 애틋한 고백, 사랑한다는 그 모든 말조차.

그저 나를 상처 입히기 위해서…….

애슐리가 들고 있는 담배의 끝이 빨갛게 빛을 내며 타올랐다.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던 그는 한숨처럼 그것을 뱉어 내며 말했다.

“코이, 그런 시시한 짓을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어? 시간 낭비일 뿐이지.”

“그럼 이게 다 뭐야, 알아듣게 얘기해!”

결국 참다못해 코이가 소리쳤다. 숨이 막혀 고함이라도 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계까지 북받친 코이와는 대조적으로 애슐리는 여전히 냉정하기만 했다.

“더 설명할 게 있나? 그게 다야. 네가 지난 10년 동안 날 만나러 올 준비를 하는 동안 나도 내 나름의 준비를 했다는 얘기지.”

“날 불행하게 만들 준비?”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피식 웃었다.

“글쎄, 그건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그는 말장난을 하고 있었다. 코이는 그와 법정에 마주 서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이는 소시민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결국 코이는 완전히 의욕을 잃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네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거야? 내가 서부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왠지 울고 싶어져 코이는 급히 숨을 가라앉혔다. 다시는 애슐리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심장이 아파 왔을 때, 애슐리가 “하.” 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탄식을 뱉어 냈다.

“그래서? 또 나를 버리려고?”

빈정거리는 말에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네가 떠나라고 하지만 않는다면.”

“상관없어.”

조심스럽게 덧붙였으나 애슐리는 담백하게 미련을 끊어 버렸다.

“뭐든 원하는 대로 해, 여기에 남든 서부로 돌아가든. 어차피 넌 다시는 날 버리지 못할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위스키 글라스를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애슐리를 보고 코이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애슐리는 흘긋 시선을 던지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곧 알게 될 거야.”

불길한 예감에 또다시 가슴이 어수선해졌으나 애슐리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건배하듯 글라스를 들어 보일 뿐이었다. 단번에 남은 위스키를 비워 버린 애슐리가 흘긋 코이를 훑어보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몸은 어때?”

“……괜찮아.”

가끔 죽도록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코이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 하고 말한 애슐리가 턱을 쓰다듬더니 이내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볼일이 끝났으면 그만 가 보지 그래? 아니면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일부러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는 애슐리의 모습에 코이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는 애슐리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심호흡을 한 뒤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있어, 할 얘기.”

코이가 말하자 애슐리는 해 보라는 듯 그를 응시했다. 무심한 듯도, 따분한 듯도 보이는 그의 표정을 응시하며 코이가 입을 열었다.

“결혼하자, 애쉬.”

애슐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가면처럼 굳어 버리는 얼굴을 보며 코이는 자신감을 얻어 다시금 힘주어 말했다.

“나랑 결혼해.”

애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코이는 꼿꼿하게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짧게 숨을 뱉어 낸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실없이 웃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머리에 이상이 생긴 건 내가 아니라 너였던가?”

“난 멀쩡해. 네 귀가 잘못된 것도 아냐. 너한테 결혼하자고 했어. 네가 날 사랑하는 마음만큼 나도 진심이야.”

코이는 정색을 하고 빠르게 내뱉었다. 반지까지 있었다면 완벽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코이는 내친김에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너도 믿는다고 했잖아? 너도 날 사랑하고. 그럼 다 끝난 거 아냐? 결혼해야지, 당연히.”

애슐리가 처음으로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코이가 이렇게 반격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듯했지만 정작 코이는 전혀 통쾌하지 않았다. 아마 애슐리는 지금 코이의 속셈이 뭔지 알아내려 머릿속을 뒤적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의도 따위는 전혀 없었다. 코이는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애슐리가 그랬듯이.

때마침 휴대 전화의 벨소리가 울리고, 둘의 시선이 일시에 같은 곳으로 향했다. 조리대 위에 올려 둔 애슐리의 휴대 전화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난 이만 갈게.”

코이는 그가 전화를 받기 전에 먼저 말했다. 자신에게 돌아온 시선을 마주하며 그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반지는 내가 살게. 청혼은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네가 놓쳤으니 날 원망하지는 마.”

자신이 할 말만 나열한 뒤 코이는 등을 돌려 나와 버렸다. 뒤에서 애슐리가 그를 부른 듯도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까지도 그는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고 막혔던 숨을 토해 낸 것은 건물에서 빠져나와 모퉁이를 돌아선 다음이었다.

“하아아.”

소리 내어 큰 한숨을 내쉬었던 그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뒤늦게 눈앞이 빙빙 돌았다. 자신에게 그런 대담한 면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애쉬는 어떻게 반응할까?

앞으로의 일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자신의 마음뿐이었다. 코이는 그런 스스로를 믿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후우우, 다시금 떨리는 숨을 내쉬며 심호흡을 했을 때였다. 갑자기 휴대 전화의 진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번호를 확인했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스팸일지도 몰라.

잠시 망설이는 사이 전화는 끊어졌으나 이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왠지 받아야 할 것 같아 코이는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를 가져갔다.

“네, 여보세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건너편에서 곧바로 쾌활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코이, 코이 맞지? 나야, 빌!

“빌이라고?”

놀란 코이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코이!”

“빌!”

호텔 방에서 만난 둘은 얼굴을 보자마자 와락 서로를 끌어안았다. 온몸에 전해지는 체온과 단단한 팔에 무엇보다 강한 현실감이 찾아왔다. 빌 또한 마찬가지인 듯 코이를 꼭 안고 크게 몸을 흔들어 대며 와하하, 웃음소리를 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좀 마른 것도 같고, 어?”

“괜찮아.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한창 훈련 중인 거 아니었어?”

간신히 몸을 떼고 물은 코이에게 빌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쪽 팔을 들어 보였다.

“좀 다쳤어. 심각한 건 아닌데 훈련은 2주 정도 쉬는 게 좋겠다고 해서.”

“어쩌다가?”

“걱정하지 마, 별건 아냐.”

뒤늦게 손목에 두른 붕대를 발견한 코이가 깜짝 놀라자 빌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빌이 주문한 차와 디저트를 함께 먹으며 둘은 간단히 어떻게 지냈는지를 주고받은 뒤 본론을 꺼냈다.

“그럼 휴가를 온 거야? 여기까지?”

코이가 묻자 빌은 애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그것도 있긴 한데, 다른 이유도 있고.”

“응? 뭔데?”

코이가 다시 물었으나 빌은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돌려 버렸다.

“넌 어때? 애쉬는 만났어? 그 자식, 여기서 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하던데?”

양쪽 손의 검지와 중지를 들어 V 자로 만든 빌이 ‘명성’에 힘을 주며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코이는 괜히 무안해져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쪽으로는 잘 몰라…… 만나긴 했어.”

줄곧 에리얼과 함께 코이를 응원해 준 친구에게 그는 망설이다 더듬거리며 그간 있었던 일을 최대한 압축해서 늘어놓았다. 처음엔 흥미진진해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빌의 얼굴이 점차 심각해지더니 마지막에는 놀라 턱을 쑥 빠뜨렸다.

“청혼을 했다고? 갑자기?”

“응.”

애슐리보다 더 충격받은 표정에 코이는 민망해하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자꾸 애쉬가 발을 빼는데 어떡해, 그럼. 나라도 밀어붙여야지.”

“아니, 그 말이 맞긴 한데.”

빌은 얼떨떨해하는 한편 대견해하는 기분으로 코이를 바라보았다. 항상 소심하고 주눅 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코이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왠지 가슴이 벅차올라 그는 과장되게 친구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야, 잘했어. 진짜 잘했어. 멋있다, 코이. 그럼, 그래야 남자지. 애쉬 그 새끼는 사내도 아냐, 팍팍 밀어붙여야지 꽁무니를 빼? 물건만 크면 뭐 하냐? 그럴 거면 그냥 잘라 버리라고 해라, 그게 남자냐?”

아니, 그건 좀 곤란한데…….

코이는 내심 생각했다. 애쉬의 물건은 나도 필요하다고. 자르는 건 곤란해.

아무튼, 하고 급히 화제를 돌리며 코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나왔으니까 애쉬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봐야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던 빌이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애쉬 그 자식은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 널 사랑한다는 게 정말 맞아?”

“그건 진심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힘을 주어 말했던 코이는 이내 기가 죽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다고.”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이미 코이는 한 번 애슐리를 포기했었다. 이번에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오로지 전진뿐이었다.

“일단 애쉬가 어떻게 나올지 두고 봐야지. 일주일 정도 기다려 보고 연락이 없으면 사무실이든 어디든 찾아가려고 해. 이번엔 반지를 사서 정식으로 청혼하려고.”

빌이 오, 하고 눈과 입을 둥그렇게 벌렸다.

“너 실행력이 정말 대단하다. 하긴 10년 동안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응, 애쉬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날 사랑하는 건 진심이라고 하니까 포기할 이유가 없어.”

힘주어 말한 코이를 보고 빌이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아무튼 나하고 앨은 항상 네 편이라는 거 잊지 말고.”

“고마워, 정말 힘이 돼.”

코이는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에리얼과 빌이 없었다면 이만큼 힘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타이밍 좋게 나타나 준 빌 덕분에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야.

다짐을 되새긴 후 그는 화제를 바꿔 물었다.

“내 얘긴 전부 다 했어. 이제 네 얘길 해 줘, 여긴 왜 온 거야? 이유가 있지?”

형질에 대한 얘길 빠뜨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으나 말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애슐리에게 먼저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일단 코이는 빌의 말을 기다렸다. 어, 하고 짧게 자른 머리를 긁적거린 빌이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저기, 너…… 앨하고 만났지? 요즘 앨은 어떻게 지내? 그러니까…… 사귀는 사람 있어?”

“어?”

살짝 붉어진 빌의 뺨을 본 코이는 갑자기 계시가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걸 눈치챘다.

“설마, 너?”

놀라 소리치자 빌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떡해, 나 정말 앨 없이는 못 살겠어.”

코이는 입을 딱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둘은 에리얼이 동부로 오면서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코이는 황급히 물을 들이켠 후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말해 봐,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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