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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
집 안에 들어선 코이를 보자마자 에리얼이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
“어떻게 됐어? 그 자식은 뭐래?”
가차 없이 욕설을 내뱉는 에리얼에게 쓴웃음을 지은 코이는 먼저 양해를 구했다.
“좀 씻고 얘기해도 될까?”
“아, 그래. 그래야지. 미안, 궁금해서 그만.”
코이는 괜찮다는 듯이 웃으며 자리를 떴다. 다행히 에리얼이 아직 하우스 메이트를 구하지 못한 상태라 코이는 쉴 곳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도 이번 달까지만이다. 코이가 가진 돈을 보태긴 했으나 그래 봤자 한 달 집세에 불과했다. 월말까지 적당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코이는 물론 에리얼도 더 이상 이곳에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수리가 되겠지.
대충 씻고 밖으로 나가자 에리얼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코이는 간단히 애슐리와의 일을 얘기했다. 전부를 말한 건 아니었다. 에리얼이 화를 낼 게 분명한 데다 그녀에게 성토해 봤자 달라질 게 없으니까.
간단히 페로몬 때문에 애슐리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과 자신에게 서부로 돌아가라고 했다는 얘기, 그에 맞서 자신은 꼭 여기 남아서 애슐리의 곁에 있을 거라는 결의로 말을 끝내자 에리얼은 그렇구나, 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코이는 할 말을 찾는 그녀의 반응에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난 그렇고, 너와 빌은 어때? 둘이 만났지?”
“어? 그랬지.”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는 걸 안 그녀가 먼저 후,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놀랐어. 갑자기 나타난 것도 당황스러운데 다시 시작하고 싶다니. 우리가 헤어진 게 언젠데.”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던 에리얼이 갑자기 코이를 쏘아보았다. 흠칫 놀란 코이에게 그녀가 말투를 바꿔 물었다.
“지금 내가 싱글이라고 말한 거 너지?”
“어…… 응.”
발뺌해 봤자 소용없다. 소재는 너무나 확실하니까. 코이는 기가 죽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미안, 하며 사과했다. 에리얼은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콧등을 찡그리고 그를 바라보다 곧 표정을 풀었다.
“이미 말한 거 어쩔 수 없지. 또 무슨 얘기 했어?”
“그것뿐이야.”
코이는 얼른 대답했다.
“더는 말하지 않았고, 너한테 먼저 말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빌이 널 좋아한다잖아. 난 너와 빌 둘 다 내 소중한 친구니까 어느 한쪽을 편들 수는 없어. 대신 빌이 널 만난 뒤에 사과해 달라고 해서 그것만은 들어준 거야.”
미안해, 하고 다시 진지하게 사과하자 에리얼은 “이제 됐어.” 하고 쿨하게 넘어갔다. 곧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상체를 기댄 그녀가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자니, 대체 그 녀석 무슨 생각인 걸까?”
“좋아한다는데 또 무슨 이유가 있겠어.”
코이는 냉큼 생각하는 걸 말했다.
“솔직히 난 둘이 잘됐으면 좋겠어.”
“우리 둘 다 네 친구라?”
에리얼이 야유하듯 묻자 코이는 고개를 가로젓고 대답했다.
“둘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나는.”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딱히 서로가 싫어져서 헤어진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에리얼은 한숨을 사이에 두고 말했다.
“빌의 팀은 서부에 있잖아. 코이, 만나러 가려고 해도 비행기로 6시간이 넘게 걸리는 데다 시차까지 있다고.”
현실적인 문제엔 코이도 할 말이 없었다. 처음 헤어진 것도 이런 이유였으니까. 에리얼이 동부에 일을 하러 왔을 때 둘은 합의하에 헤어졌다. 그 뒤로 지금까지 가끔 안부 전화 정도만 나눴을 뿐인데 이렇게 갑자기 빌이 찾아왔으니 에리얼이 난감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저, 빌이랑 다시 시작하는 게 그렇게 불가능해?”
그래도 역시 아쉬움이 남아 질척거리는 코이에게 에리얼은 정색을 했다.
“내 모든 건 동부에 있어, 코이.”
그녀는 강경하게 말을 이었다.
“연인끼리 관계가 깊어져서 한쪽이 다른 쪽을 위해 커리어를 희생할 경우 어떻게 되는지 알아? 대부분은 여자가 모든 걸 포기해.”
생각지 못했던 지적에 코이가 아, 하고 당황하자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덧붙였다.
“난 빌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내 자신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내 인생을 주도하는 건 나고, 모든 결정의 중심도 나야. 난 내 삶의 주도권을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을 거야.”
코이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에리얼의 등 뒤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아 저절로 우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멋있어, 앨.”
“고마워.”
진심으로 경탄하자 에리얼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반응은 익숙하다는 듯이.
당연하지, 고등학교 때부터 앨은 모두의 우상이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코이의 머릿속에 곧 뭔가가 스쳤다. 아, 하고 눈을 깜박거리며 그는 다시 물었다.
“혹시 개럿과도 그래서 헤어졌어?”
에리얼은 멈칫했으나 이내 솔직히 털어놓았다.
“다른 주로 직장을 옮긴다고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 내가 왜? 어째서 내가 개럿을 위해 내 모든 걸 희생해야 돼? 개럿은 좀 더 좋은 자리를 얻어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 거길 가는데 왜 난 있던 자리를 포기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냐고.”
“그건 그래.”
부당함을 토로하는 에리얼에게 동조하며 코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만 포기하는 건 너무하지. 개럿이 이기적인 거야.”
“맞아. 그런 녀석하고는 함께할 수 없어.”
에리얼과 코이는 한 손을 들어 식탁 위에서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으나 곧 에리얼은 심난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런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저러면 난 아주 난감하단 말이지. 어떻게 해야 하냐고. 게다가 석 달이나 여기 있는다니.”
“석 달? 2주가 아니라?”
깜짝 놀란 코이에게 에리얼은 정확하게 짚었다.
“석 달이래. 2주는 의사가 훈련을 쉬라고 한 기간이고.”
“아…….”
그제야 코이는 이해를 하고 멍한 소리를 냈다. 2주라고 해도 부담스러울 텐데 석 달이나 여기 있겠다니. 에리얼의 기분을 모르겠는 건 아니라 코이는 조심스레 물었다.
“빌이 싫은 건 아니지?”
에리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답이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코이는 잠시 생각하다 슬그머니 의견을 제시했다.
“저, 생각나는 게 있는데 말해도 될까?”
“얘기해.”
에리얼의 허락하에 코이는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빌이 여기에 석 달이나 있는다니까 그동안 계속 호텔에 머무는 것도 그렇잖아. 너도 어차피 하우스메이트가 필요하고. 빌이 머무는 동안 함께 지내면서 생각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잖아? 월세도 해결되고.”
에리얼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코이는 내친김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싫어서 헤어진 건 아니지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잖아. 이번에 같이 살면서 시험해 보면 어때? 안 맞는 구석이 보이면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끝내는 거고, 그게 아니면 또 그때 다시 생각해 보면 되잖아. 어쨌든 이 집에서 석 달 더 있을 수 있으면 너도 좋지 않아? 빌이야 여기 집세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을 테니.”
“그 녀석이야 여길 살 수도 있을 텐데 뭐. 그것도 몇 채나.”
빌은 현재 아이스하키 선수 중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고 있었다.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던 에리얼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할게.”
“잘 생각했어 앨!”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코이에게 활짝 웃어 보였던 에리얼이 금세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내가 너에게 연애 상담을 하다니.”
마치 장성한 자식을 보듯 대견해하는 표정에 코이는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사람은 성장하는 거야, 앨.”
에리얼이 웃고, 둘은 다시 식탁 위에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맞아, 그러니까 애쉬, 우리도 예전과는 다를 거야.
에리얼과 얘기를 나누며 코이는 생각했다. 모두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애슐리만 제외하고. 그때부터 전혀 흐르지 않고 멈춰 버린 그의 시간을 코이는 어떻게든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 성공하든 망하든, 어느 쪽으로든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정체되어 있는 것은 최악의 상태니까.
지금 뭘 하고 있어, 애쉬?
잠들기 전 그와 나눴던 메시지를 다시 읽으며 코이는 그리움을 간신히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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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 이 기특한 녀석!”
빌은 만나자마자 코이의 목을 한 팔로 감싸고 다른 손으로 마구 머리를 문질러 댔다.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리던 코이가 간신히 그에게서 빠져나오자 빌은 곧바로 그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퍼부어 댔다.
“푸하.”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서서 숨을 몰아쉬는 코이를 내버려 두고 빌은 스위트룸의 넓은 거실 안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신이 나 환성을 지르며 두 팔을 들고 허리를 흔들며 춤을 추는 그를 보자 절로 웃음이 났다.
“그렇게 좋아?”
“물론이지, 앨과 같이 살게 되다니 상상도 못 했어. 파워볼에 당첨된 것보다 더한 행운이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내리며 “이예!” 하고 소리친 빌이 다시 허리춤을 췄다. 코이는 그런 친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빌은 거실의 끝까지 춤을 추며 걸어갔다가 턴을 해 돌아와 코이 앞에서 멈췄다.
“이럴 때는 샴페인을 마셔야지. 너도 같이 마실 거지?”
패드를 들고 룸서비스 메뉴를 찾으며 물은 말에 코이는 아냐, 하고 손을 내저었다.
“난 허브차로 해 줘. 얼음을 넣어서.”
“재미없게 왜 그러냐.”
빌은 실망한 얼굴로 말했으나 코이의 주문을 순순히 받아 주었다. 메뉴를 모두 입력한 뒤 아무렇게나 소파 위에 내던진 패드를 자리에 돌려놓으며 코이가 말했다.
“이제 좀 앉아 봐, 자세히 얘기해 줘. 앨이 뭐라고 했어?”
두 눈을 빛내며 물은 코이에게 빌은 한껏 자신감에 찬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에리얼이 먼저 연락해 하우스메이트를 제안했고 석 달 동안 시험 삼아 함께 지내기로 했다는 내용이 전부였지만 그는 그걸 30분도 넘게 떠들어 댔다. 그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건 룸서비스로 샴페인을 가져온 다음이었다.
“잘되길 바랄게.”
마시지는 못하지만 일단 글라스를 채운 코이가 그의 행운을 빌어 주자 이번엔 빌이 글라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와 애쉬도.”
둘은 웃으며 가볍게 립을 마주쳤다. 코이는 벌컥거리며 샴페인을 들이켜는 빌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호텔방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둘의 사진이 공개된 것은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코이에게 키스하는 빌의 모습과 함께.
애슐리 밀러가 그 기사를 접한 것은 오후 늦은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오전의 회의를 끝낸 후 약속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쌓였던 한숨을 내쉬었다.
일상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이상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주 가끔 뭔가를 잊기도 했으나 비서가 빈틈없이 공백을 메꿔 주었다. 그녀는 물론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실수일 뿐이었으므로.
아침에 비서가 올린 경제와 사회에 대한 짧은 요약 기사를 확인했던 애슐리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비서의 보고서와 함께 기사를 검색하려 했다. 그가 인터넷을 연 것은 그때였고, 이미 전국을 강타한 스포츠 스타의 스캔들이 화면 곳곳을 차지한 후였다.
“밀러 씨?”
지시를 기다리던 비서가 의아해하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애슐리의 시선은 모니터에 못 박힌 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나가 봐.”
쳐다도 보지 않은 채로 중얼거린 한마디에 비서는 재빨리 네, 하고 대답한 후 사무실을 나갔다. 비서는 대체 자신의 상사가 무엇 때문에 저런 반응을 보인 건지 궁금해 즉시 기사를 훑어보았으나 모니터 뒤에 서 있던 그녀로서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혼자 남아 한동안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애슐리가 휴대 전화를 든 것은 대략 30여 분이 지난 뒤였다. 아침에 터졌던 기사는 벌써 2보, 3보를 거쳐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빠르게 내용을 훑어본 그는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를 대략 정리한 후 번호를 눌렀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은 건 고작 두 번의 신호음이 들린 다음이었다.
- 애쉬?
코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애슐리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그래, 나야.”
평소처럼 사무적인 음성을 흘려 내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하게는 다정하게 샴페인 글라스의 립을 마주치며 서로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빌과 코이의 사진에.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아프게 귀를 때려 댔다. 코이는 숨을 가다듬으며 휴대 전화에 잔뜩 주의를 기울였다.
잠에서 깬 것은 대략 두어 시간 전이었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그는 피곤한 몸을 끌며 샤워를 하고 아침 겸 점심 식사를 만들어 먹었다. 에리얼은 출근한 다음이었고, 집 안엔 혼자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로운 아침은 그리 길지 못했다. 따뜻한 허브차를 한 잔 더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갑작스럽게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신인을 확인한 순간 그는 금세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애쉬?”
반갑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건너편에서 곧 대답이 나왔다.
- 그래, 나야.
애슐리의 목소리에서는 평소처럼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매우 사무적이었으나 코이는 별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그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안녕, 잘 지냈어? 벌써 점심시간이네, 지금 쉬고 있는 거야?”
- ……그래.
이번에 나온 대답은 짧은 침묵이 사이에 있었으나 역시나 코이는 눈치채지 못하고 신이 나 재잘거렸다.
“그렇구나. 난 좀 전에 일어나서 지금 막 차를 마시려던 참이야. 걱정하지 마, 허브차니까.”
아직도 자신이 임신을 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메가가 된 것도 아직 실감이 안 나는데 하물며 임신이라니. 무심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던 코이는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달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생각해 보고 전화한 거야? 우리 얘기.”
- ……뭐?
돌아온 반응에 코이는 금세 실망했으나 어깨를 늘어뜨리는 대신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하긴, 아직은 너무 빠르지? 괜찮아, 좀 더 시간을 가져도. 하지만 오래 끌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부담을 줄 생각은 없지만…….”
애슐리를 몰아붙이는 것 같아 말꼬리를 흐렸지만 상대방은 반응이 없었다. 코이가 의아해하며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 물어볼 게 있어.
“응, 뭐든지 말해. 다 말해 줄게.”
냉큼 대답하자 애슐리는 사이를 두고 물었다.
- 빌이 여기 온 거, 알고 있어?
왠지 신중한 말투에 코이는 의아해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며칠 됐는데? 아, 내가 말을 안 했던가……?”
- 안 했어.
그랬구나, 하고 코이는 별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하긴 우리 일로도 정신없었으니까. 혼자 납득한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쪽에 볼일이 있어서 왔나 봐. 연락했길래 가서 만났었어. 너한텐 아직 연락 안 했어?”
- 볼일이라니?
코이의 질문을 무시하고 애슐리가 되물었다. 코이는 막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멋대로 둘의 얘기를 떠들어 대면 안 된다. 아직 조심스러운 단계니만큼 주변에서 더 배려해야지. 괜히 설레발을 쳤다가 안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진심으로 둘을 응원하고 있던 코이는 마음을 다잡고 얼버무렸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대. 먼저 연락했길래 가서 얘기 좀 하다 왔어. 연습하다가 다쳐서 의사가 2주 정도 쉬라고 했던 모양이더라고.”
이 정도는 괜찮겠지? 기사에도 나오고 했으니까.
최대한 밖으로 드러난 사실과 더불어, 자신과 관련한 얘기만 빼서 전달하자 애슐리는 잠시 동안 반응이 없었다. “그래?” 하고 짧게 말한 애슐리가 여전히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 그게 다란 말이지?
“응. 정말이야. 그냥 대화만 했어.”
뒤이어 코이는 웃으며 덧붙였다.
“빌이 샴페인을 마시자고 했는데 그건 술이라서 거절하고 그냥 건배만 했다니까. 빌이 투덜거렸지만 하는 수 없지 뭐.”
거기까지 말한 코이가 내친김에 물었다.
“저, 우린 언제 만나? 더 기다려야 할까?”
자신도 아직 뭔가 생각난 것이 없었지만 그냥 만나기라도 하면 좋겠다. 애슐리를 보고 싶은 마음에 물었으나 건너편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 나중에.
애슐리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마치 의뢰인과의 전화를 빨리 끊고 싶어 하는 변호사와 통화하는 듯한 기분에 코이는 절로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듯 애슐리가 덧붙였다.
- 지금은 좀 바빠서 힘들고, 조만간 만나러 갈게. 앨의 집에 있다고 했지?
“응, 누가 내 집 문을 발로 차서 부숴 버렸거든. 혹시 소송을 해서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변호사님?”
일부러 의뢰인을 흉내 내 묻자 애슐리가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금세 코이는 마음이 놓여 마주 웃었다.
“사랑해, 애쉬. 나한텐 너뿐이야.”
코이가 벅차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고백했다. 애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음소리조차 사라져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만나서 얘기할걸, 금세 후회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 ……알고 있어.
전화는 곧 끊겼다. 애슐리는 코이의 마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코이 자체를 신뢰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코이는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며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애쉬가 날 믿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