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르휜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사라진 다음날 전군에 은밀하게 퍼졌다. 소문이란건 일부러 전하는 사람이 없어도 널리 퍼지기 마련이라서 역시 레오포드가의 망나니야, 라고 병사들이 술렁거리는걸 들으며 펠릭스는 붉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렸다.
아르휜이 원래 이런 녀석이란걸 알고있었다고는 해도 설마 이렇게까지 망신을 줄줄은 몰랐다. 레오포드가의 차남이, 이 펠릭스 폰 레오프드의 동생이 마물이 무서워서 도망을 쳐? 좋다, 아르휜. 그렇다면 두번다시 내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레오포드가엔 두번다시 얼씬도 하지않는게 좋을거다. 너와 형제이기이전에 너의 목을 직접 베어 레오포드가의 명예를 지키는것 역시 레오포드가의 후계자로서의 내 의무니까.
행군한다는 명령이 전해지자 숲속에서 사라진 아르휜을 침착한 그답지 않게 걱정하던 알프레드가 펠릭스에게 다가왔다.
"펠릭스님.. 아르휜님을 찾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크로멜성으로 가는일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아르휜은 레오포드가의 명예를 더럽혔다. 도망친 자를 잡아 목을 베는건 목적을 달성한 후에 해도 늦지 않아."
"도망치신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무슨일이 생기셨을수도 있습니다."
"우습군. 알프레드. 아르휜에 대해서는 형인 나보다 네가 더 잘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말을 하다니.. 아르휜의 출중한 연기가 현명한 너를 속일 정도였나? 아니면 너의 현명함이 기껏 광대녀석의 연기따위를 가려내지 못할 정도였던건가?."
날카로운 말에 주제가 넘었다고 판단한 알프레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가족들, 심지어 자기자신에게조차 실수가 용납이 되지 않을만큼 엄격한 펠릭스다. 아르휜도련님에 대해서는 이미 지긋지긋할만큼 실망을 한 상태고 그게 최후까지 몰린것쯤 짐작하면서도 알프레드로서는 말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기억상실인척... 처음엔 그도 귀찮은 원정이라고 생각해서 빠지려고 연기하는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연기든 무엇이든 아르휜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억지로 식사를 삼키던 모습도 피투성이 발도 거짓은 아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펠릭스님. 하지만 아르휜님께서 원정길에 오르신후부터 계속 몸이 좋지 않으셨던건 사실입니다."
짝,짝,짝.. 가까이에서 박수소리가 들리자 펠릭스도 알프레드도 고개를 그쪽으로 꺽었다. 고개를 꺽은 쪽에는 삐딱한 표정으로 웃으며 박수를 친 장본인 프란시스하워드가 서있었다.
"레오포드가의 충성스런 개인줄 알았는데 반항도 할줄알고 멋진걸, 알프레드. 그리고 명예가 동생보다 소중하시다니 역시 대.단.히.휼.룡.하.십.니.다. 펠릭스형님"
"명예란것은 지킬 명예따위 없는 너같은 녀석이 입에 올릴 화제는 아니지"
"아, 저런.. 정곡을 찔려서일까요. 심장이 뜨끔하는걸요. 그런 의미에서 지킬 명예따위 없는 녀석은 이쯤에서 사라져드리겠습니다. 아르를 따라온건데 아르가 사라졌으니 제가 함께할 이유가 없어져서요."
"계속 잊고있는것 같군. 프란시스 하워드. 아무도 너에게 따라와달라고 요청한적 없으니 사라진다고해서 보고할 의무도 없다."
"훗, 적어도 그만 이 보기싫은 놈이 사라져드린다는 인사는 해야할것 같아서 말입니다. 친구의 형에 대한 예우쯤으로 생각하시죠"
가볍게 고개를 끄덕해보이는 프란시스 하워드의 푸른 머리카락을 펠릭스가 차갑게 노려보는걸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알프레드는 속으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휜과 전에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쟁터에서 귀한 힐링포션을 아르휜님의 발에 아낌없이 들이붓는 남자 프란시스하워드와 아르휜님과 닮은 생김새면서 안타깝게도 가깝게 지내지 못하는 형제인 한 남자 펠릭스 폰 레오포드..이 둘은 절대 가까워질수 없는 개와 고양이 사이같았다.
바로 그 개와 고양이중의 한쪽인 프란시스 하워드가 몸을 돌리기전 할말이 남아있는듯 아아, 라고 말하며 멈칫 발을 멈춰섰다.
"펠릭스형님께선 관심이 없으시겠지만 알프레드는 조금 관심이 있을것 같아 말해두자면 실드에게 숲에 남아있는 아르휜의 흔적을 쫒으라고 했더니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더군요. 구토하다가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아르.. 그리고 아르의 앞에 나타난 두명의 남자가 했던 얘기들."
펠릭스의 몸이 굳어지는걸 눈치채지 못한채 알프레드는 역시, 라고 생각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얘기들이란게 -군에서 한사람쯤 사라졌다고 눈치채지 못하겠지-,-노예로서 저정도면 최상품이야. 최대한 다치지않게 사로잡자고- 이런 수상한 얘기들이고 결정적으로 쓰러트린 아르를 자루에 담아 보쌈해갔다는군요. 불쌍하고 가엾은 아르으. 노예시장에다가 내놓으면 남색하는 남자들이나 변태들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텐데.. 뭐,지금쯤이면 펠릭스형님께서 이를가는 동생은 꽤 괴로운 꼴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잘나신 펠릭스형님께선 동생보다 명예를 지키시느라 바쁘신것같으니 지켜야할 명예따위가 없는 저같은 놈은 이만 친구를 찾아나서야겠습니다. 그럼.."
여유있게 말을 끝내고 돌아선 프란이 멀어질때까지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 펠릭스쪽으로 알프레드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세상에.. 아르휜님이 납치를 당하시다니, 그것도 노예상인에게.. ? 아르휜님 정도의 외모면 정말 무슨일을 당할지 알수없는 일이다. 물론 그전의 아르휜님이라면야 걱정이 조금 들되겠지만 지금의 아르휜님은 왠지 심각하게 걱정된다.
얄밉게 말하고 건방지긴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남자라는건 펠릭스님역시 알고있을거다. 하지만 알프레드는 펠릭스라는 이남자가 어떤사람인가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있었다.
"행군을, 행군을 속행한다!!"
벼락같이 소리치며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단호하게 몸을 반대쪽으로 돌이키는 걸 보며 알프레드는 역시, 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쪽이 중요한지에 대한 판단도 냉정하게 이성적이고 한번 정한 방침을 우회하여 되돌리진 않는 무서울만큼 자신이 내세운 원칙에 엄격한 남자의 결론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거지만 .. 예상하고 있었다고 해서 안타까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쯤은 걱정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셔도 좋을텐데요. 펠릭스님.... 아르휜님을 누구보다 엄하게 다그치시는건 아직도 아르휜님이 변하시길 기대하고 계시기때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크로멜성으로 가는 원정단에도 공작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넣으신거 아니십니까.
강한 남자의 단호한 뒷모습에서 뒤돌아보고싶은 미련을 어렵지않게 눈치채며 알프레드는 돌아보지 않는 그대신 프란이 사라진쪽을 잠시 돌아보았다.
전에 용병일로 해서 번 돈으로 현재 여곽을 운영하는 아버지밑에서 음식나르는 서빙과 방을 안내하는 카운터를 보는 메리에게 낯선 손님들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귀족들, 평민들 할거 없이 여행객들이 묶어가는게 여관이란 곳이다 보니 숲의 종족인 엘프나 드워프역시 간혹 보긴 봤지만 지금 새로 들어온 손님들처럼 존재감이 뚜렷하진 않았었다. 아름답다고 소문난 엘프도 고귀한 귀족남자들이나 어떤 누구에게서도 이렇게 정신이 아득해질만큼 시선을 잡아채는 사람또한 단한번도 메리는 만나본적이 없었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길게 휘날리는 남자는 평범한 여행객인듯 허리춤에 검한자루없이 간단한 로브를 걸치고 있을뿐이지만 대하기 녹록치않은 비범한 분위기가 전신에서 뿜어져나왔다. 그 위험한 분위기에도 차가운 다크블루의 눈동자, 아름답게 빚어낸 코, 붉은 입술에서 쉽게 눈을 뗄수가 없는 메리처럼 각 테이블에 듬성듬성 차서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시시껄렁한 수다를 떨던 사람들도 검푸른 머리카락의 남자에게로 호기심어린 시선들이 힐끔거렸다.
"방 하나"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멍하게 쳐다보았을 아름다운 얼굴에서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주근깨가 자잘히 흩어진 메리가 얼굴을 붉히며 간신히 시선을 떼냈다. 그제야 아름답게 매혹시키는 남자의 어깨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정신을 잃고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또다른 남자를 눈치챈 메리는 당황해서 손님들을 허둥지둥 이층의 방으로 안내했다.
"으..윽....!!"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던 나는 내가 내지른 신음소리에 얼핏 정신이 들어 눈을 떴다. 작은 방이 흐릿한 시야안으로 희미하게 잡히다가 사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긴.. 어디.... 손을 더듬자 뒤척일때 퍼석거리는 소리가 나는 평범한 질감의 천으로된 감촉이 손에 쥐어진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거지..? 눕혀져있던 몸을 일으키다가 나는 채찍을 맞았던 고통을 다시 고스란히 느끼며 하윽...- 하는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아아..젠장, 죽도록 맞아본적이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이렇게 기절할때까지 묶여서 맞아본적이 없어서인지 아픔보다는 두려움이 더크고 수치스러움과 분함이 더 컸다. 아픔으로 아득한 머릿속으로 맞고있다가 정신을 잃어버린데까지 기억해낸 나는 낯선 방안에 누워있는게 이상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여기에 누워있는걸..........으헥..저,저사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몇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나를 노려보는 푸른 불꽃두개를 뒤늦게 발견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 흐릿한 정신의 내게 너따위 인간은 죽어버리라며 마구 화를 내던 저 변태마족놈이 머릿속에 퐁, 떠올랐다.
내가,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도와달라고 한걸까.. 이름을 불렀나.. 그게 아니라면 왜 저 끔찍한 머리카락괴물놈이 여기 함께 있는거냐고..어떻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칼자국난 인상 더러운 남자에게서 저 변태괴물놈이 나를 빼내온것 같기는 한데 나로서는 칼자국난 사내와 변태괴물중 어느쪽의 위험수위가 높은지 알수가 없어서 구해줘서 고맙다는 마음도 안들었다.
힐끔,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쳐서 흠칫, 하는 나를 보고 머리카락괴물변태주제에 꽤 아름다운 얼굴을 한 아시리안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던 거지?"
화낸적 없다는듯이 목소리가 지극히 쿨한데비해 푸른 불꽃을 뿜어내는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다. 왜.. 내가 너에게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데? 너는 그사람들과 다르다는거야. 납치하고 묶고 괴롭힌건 마찬가지야. 그..그 머리카락들로 마구 만져대고!!
"왜 내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거지?"
내가 대답하지 않자 감정이 격앙된듯 화를 꾹꾹 눌러참는 목소리로 이를갈며 내뱉는 비난을 듣고 있자니 무진장 억울해졌다. 죽을만큼 아프고.. 괴롭고.. 서러운건 이쪽이야. 바보변태놈.
"죽는게 낫다고 생각했나. 내 도움보다는 그 하찮은 벌레따위에게 맞아 죽는쪽을 택하는거냐? 고통속에 몸부림쳐도 내도움은 거절한다. 이건가!!"
젠장,나는 이미 죽었어. 새삼스럽게 다시 죽을 일도 없어. 하지만.. 고통스러운건 맞아...... 아파. 죽을만큼..아프다고......몸도, 그리고 마음도 내것이 아닌데.. 아파....아............파.....
"어째서, 왜!!! 내게 도움을 청하느니 인간따위에게 죽는걸 택한 너를 이해할수도 용서할수도 없다. 그러니 지금 이자리에서 널 죽여버리겠다. 인간. 죽어라, 아나이스!!!"
아.........그래. 왜 내가 이름을 부를수 없었는지.. 도와달라고 할수가 없었는지 이제 알것같다. 증오로 가득차서 말하며 쐐액 길어진 머리카락으로 길게 목을 휘감아 위로 잡아당겨 조이는 힘에 무릎이 저절로 세워졌다. 큭, 하는 고통을 입밖으로 얕게 내뱉으며 나는 간신히 중얼거렸다.
".......니...니까........나...는..........너................의....................."
내가 뭔가를 말하자 죽인다고 으르릉거렸으면서도 호기심이 살짝 동하는지 목을 감싸쥐고 힘껏 조이던 머리카락에서 스르르르 힘이 풀린다.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에서 놓여난 목을 감싸안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너의 아나이스가 아니니까 부를수가 없었어. 아르휜도 아니니까.... 나는 .. 내이름은 하은준이야.. 나는 은준이라고..... 나는..........나...........나는...............젠장...우..윽........."
힘겹게 한마디씩 내뱉을때마다 격해지는 감정을 쫒아가지못한 말이 중간에 뚝 끊기고 이유를 알수없는 물기가 시야를 흐릿하게 가린다. 그리고 방울..방울.. 물방울들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겁게 짓눌러오던 아픔이, 괴로움이, 외로움이, 서글픔이 더이상 어떻게 해버릴수도 없는 격한 감정속에서 끅,끅거리는 울음소리와 함께 토해져서 나는 목을 감싼 손으로 우는 얼굴을 가렸다. 폼잡아봤자 머리카락괴물 변태일뿐인 남자앞에서 우는걸 멈출수 없는 시점에 내가 할수 있는 방어책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인간. 아나이스가 아니라 지난번엔 아르휜이라고 하더니 이제 아르휜도 아니라고 하고 은준이라는건 또 뭐지?"
"그놈의 아나이스란 이름으로 부르지마, 다른 사람이름으로 불리는거 지겨워, 끔찍...해...."
아르휜으로 대신 살아오면서 나.. 이렇게 지쳐있었나.. 끔찍하다라.. 맞아, 정답이야. 하필이면 죽어서도 잘못들어온게 운나쁘게도 가족들에게 미움이나 받고 살아야하는 처지인 아르휜이었다는게 무진장 서럽다.. 미워한다고 느껴지는 만큼, 차가운 말이 심장을 쿡쿡 찌르는것만큼 경멸하고 혐오하는 시선을 받는것만큼.. 아르휜이 아닌데도 나는 고통스러웠다. 펠릭스형님, 레오포드공작, 유테르.... 가장 가까워야할 가족들인데도 쓸모없는 쓰레기취급받는거 꽤 아팠다. 익숙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깊게 생채기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것처럼 아프고.... 아팠다..
뭔가가 내머리를 뒤에서 앞으로 끌어당기자 한손으로 젖은 얼굴을 가린채 푹, 박혔다. 이깟 머리카락괴물변태따위의 품속에서 서러움을 토해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끄윽,거리는 울음이 창피하게 좀체 가라앉지 않는다. 부드러운 질감의 옷이 젖어드는걸 느끼며 뚝뚝 눈물을 흘리기를 한참, 머리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를 내가 하은준이라고 불러주면 너도 내이름을 불러줄건가"
너무 놀라서 품속에 쳐박고 있던 얼굴에서 손을 떼지않은채 크게 떠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푸른 불꽃이 낮게 가라앉아 일렁거리는 다크블루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내려다본다.
"그럼, 그렇게 하겠다. 하은준.."
아...............................................................아......아.......서있던 무릎이 힘을 잃고 털썩 침대에 가라앉는 소리가 들리며 나는 얼굴을 가렸던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내이름이.. 내이름이 .. 살아있는 내존재를 인정하듯이 불려지자 굉장히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눈물이 툭 떨어지는 뺨의 근육이 웃고싶어져서 실룩거린다. 그러나 내가 감동을 길게 느낄새도 없이 성질급한 변태가 조르듯이 채근했다.
"어서 너도.."
에에...뭐..뭐야. 나는 동의한적 없다고.... 하지만 이쪽세계에서는 아무에게도 의미가 없어진 내 이름을 불러줬으니 나를 조금 못되게 괴롭히긴 했지만 머리카락변태괴물이든, 마족이든, 아무래도 좋다. 라는 쪽으로 생각이 쏠린다. 소원이라면 이름따위 얼마든지 불러줄수 있다. 왜 저렇게 이름에 집착한담..이상한 놈..
"...........아...시...리...안..."
망설이다가 가라앉아 쉰 목소리로 조용히 내뱉자 푸른불꽃이 살짝 감겨든다. 목소리의 울림을 느끼듯 눈을 감고있는 아시리안의 등뒤로 검푸른 머리카락들이 제각각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허공으로 부드럽게 흩날렸다. 바람한점 안부는 방안에서 사방팔방 흩어진 머리카락들은 기분좋게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사각거리며 움직이고 있을뿐이라서 그때처럼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신비해보였다. 이름따위 불러준게 그렇게 좋을까.....정말 기분이 좋은것같은 마족놈이 한심했지만.. 쳇.. 인심쓴김에 한번 더 써주지..뭐..
"아시리안.."
다시한번 이름을 부르자 고요히 감겨있던 푸른불꽃이 서서히 떠지며 나를 똑바로 응시해온다. 마족이라면 굉장히 나쁜짓만 일삼는 사악한 악마일것 같은 느낌인데 눈을 가만히 마주보고 있자니 그게 대중화된 편견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벌레 어쩌고 했지만 욕이 그정도면 양호한거지..도와달라고 말해라, 이름을 불러라 심술을 부리긴 했어도 도와달라고도 안하고 이름도 안불렀는데 결국 도와줬고.. ... 머리카락괴물변태이긴 해도 완전 구제불능은 아닐지도 몰라.
아직 눈가에 남아있는 물기를 부비부비 닦아내던 나는 팔을 움직이자 잊고있던 상처가 아파서 윽,하고 신음을 흘렸다. ...움직이니까..아프다. 이몸으로 다시 숲을 올라야하나 싶으니 저절로 한숨이 더 깊어진다. 피가 흐르는채로 굳어져서 더 흉칙해보이는 채찍자국을 내려다보자 춤추던 머리카락을 얌전히 가라앉힌 아시리안이 손을 상처난쪽으로 가져다대었다.
에? 하며 보는 사이 아시리안의 스윽 다가온 부분에서 푸른빛의 동그란 원형이 서서히 퍼진다. 그리고 상처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찢어진 상처가 아물고 벌겋게 부푼 자국이 가라앉고 희미한 자국까지 남김없이 사라지는 마지막까지 경악해서 보다가 나는 아시리안을 새삼스런 눈으로 다시 볼수밖에 없었다.
"대...대단해..."
감탄하자 아시리안은 무척 잘난체하는 표정으로 나를 거만하게 내려다본다.
트롤의 피로 만들었다는 힐링포션은 흉터가 남았지만 지금은 할퀸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상처가 치유되는걸 눈으로 확인했는데도 깨끗한 상체가 믿어지지않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내리자 아시리안이 내손을 잡아올렸다. 의아해서 올려다보자 묶여있어서 벌겋게 쓸린 자국을 말없이 바라보고있다. 그 시선이 깜짝 놀랄만큼 부드러워서 치료를 해주려는지 아까처럼 다른손을 가져오는걸 뒤늦게 알아채고 허둥지둥 말했다.
"아.....이,이건 괜찮아. 아프지않아."
약간 따끔거리긴 했지만 도움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라 잡힌 손을 슬쩍 비틀어 빼내자 검푸른 시선이 못마땅한듯이 나를 노려본다.
"보기와 달리 쓸데없는 고집을 자주 부리는군. 너는."
"누.누가 쓸데없이 고집을 부린다고 하는거야. 심술궂게 끝까지 안도와준게 누..누군데!!"
정곡이 찔린것같아서 나도모르게 쏘아부치자 말문이 막힌듯 나를 노려다본다. 왠지 분한것도 같고 화가난것도 같은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는 왜 안건져왔냐고 은인에게 떼를 쓰는 뻔뻔한 사람이 된것 같아 찔리긴 찔린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시선을 거두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아무튼 도와줘서..고마워..."
도와달라고 하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구해줬다는건 역시 내가, 아니 아르휜이 이 변태마족의 아나이스라서일까. 이름을 불러준걸 그렇게 받아들이면 곤란한데..
"저기.... 내가 당신의 아나이스가 아니라는건 분명해"
이거... 저 노려보는 눈은 얼렁뚱땅 맺어졌던 평화협정조약이 파국으로 치닫고있는거 맞지? 푸른 불꽃이 다시 사나워지자 나는 변명하듯 서둘러 말했다.
"아..그러니까.. 나는 은준이고.. 이몸의 이름은 아르휜인데.. 현재 아르휜은 없어져서 아나이스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그게 무슨 말이지?"
인상을 찡그리는걸 보니 내가 생각해도 듣는 사람 못알아들을만큼 너무 횡설수설 한것 같다.
"그러니까.. 차근차근 설명할께. 나는 하은준이고 내가 살던 세상은 여기완 많이 달라. 거기선 마술이라는건 있지만 마법이란건 없고 마물들이란것도 없고 마족이란것도 없어. 못사는 사람 잘사는 사람은 나뉘어져있지만 왕족,귀족,평민도 없지.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 노예신분도 없고 .. "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게 하나의 차원만은 아니라는걸 알고있다. 하지만 차원의 문을 건넌 인간은 처음 보는군. 아니, 건너온건 영혼뿐이라 했던가.."
횡설수설한 내말을 이해해줘서 고마운데.. 아시리안, 믿으려면 완벽하게 믿어줘, 그렇게 눈을 샐쭉하게 뜨고 나를 보는거, 내말이 의심스럽다.. 이거지?
"어쨌든 그쪽에서 나는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는데.. 죽었어야 하는데.. 눈을 뜨니까 아르휜이라는 이 사람의 몸속에 들어와있었어. 그리고 아르휜의 영혼은 사라져버린것같고...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의 아나이스가 맞는지 어쩐지는 가출나간 아르휜의 영혼이 돌아와봐야 알것 같다는거야"
정신나간 미친놈으로만 보지 말아줘. 라는 심정으로 담담하게 말하자 아시리안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얘기하는 너는 죽었다는 거냐?"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런거지.. 길게 말한 사람 민망하게 간단하게 받아들이는구나.
"응, 아마도 그런것 같아. 아시리안."
한번 이름을 입에 담자 그다지 거부감없이 자연스럽게 술술 이름이 입에 올려진다. 아시리안은 잠시 생각하는것 같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아르휜의 영혼이 돌아올때까지 네옆에 있어야겠군. 네말대로라면 언제 돌아올지 알수없는 아르휜의 영혼쪽이 아나이스일지도 모르니까.."
뭐..?..그거야.. 그렇지만....
"하..하지만 나는 펠릭스형님에게 돌아가야하는데? 다들 기다릴거야"
펠릭스형님도, 알프레드도.. 프란도.. 이를 갈며 기다리든 걱정하며 기다리든.. 어쨌든 반기지 않아도 아르휜으로서는 그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하은준에게는 아니지만 아르휜이 존재해야 할곳은 그곳. 가족, 친구들옆...거기니까.
"너를 내옆에 두겠다는게 아니라 내가 너의 옆에 있겠다는 거다."
말을 못알아듣는 꼬마에게 말하듯 잘난척 말하는게 맘에 안들긴 하지만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다.....그러니까 아르휜의 영혼이 언제돌아오는지 감시하기위해선 어쩔수없이 나를 졸졸 따라오겠다는 거잖아.. 귀엽지도 않은 마족한마리를 옆에 달고 같이 돌아다녀도 될까.. 뭐..이마에 나 마족이요, 라고 써붙인것도 아니니까 별 문제는 없으려나..생김새로만 봐서는 다른 인간들처럼 똑같이 평범...이 아니라 지나치게 잘생긴게 조금 문제라면 문제..일지도..
"그럼..너를 내 친구라고 소개할께. 아시리안 너도 나를 다른사람들 앞에서는 은준이라는 이름말고 '아르'라고 불러줘."
"왜그래야하지?"
왜,왜,왜.. 아까부터 느낀거지만 머리카락 변태괴물인 마족 아시리안은 성격도 나쁜 주제에 따지는걸 꽤 좋아하는것 같다.
"으음...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거든. 아르휜의 몸속에 있는게 나 하은준이란걸.. 나는 네가 마족이라는 비밀을 지켜줄테니까 너는 내가 하은준이라는 비밀을 지켜줘. 어때?"
"마족에게 인간들은 쓸데없이 적대적이지. 하찮은 벌레들이 달려드는 시끄러운 상황을 피하려면 너의 의견도 나쁘지 않을거 같긴 하군..은준. 아니.. 아르"
삐질, 하찮은 벌레들이라는건... 사람들을 말하는거? 이 마족과 같이 다녀도 정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방금 내린 결정에 회의가 든다. 하지만 어쩔수 없지. 아시리안에게도 나에게도 아르휜의 영혼이 빨리 돌아오는쪽이 좋은거니까.
"그럼, 좋아. 계약 성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