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왜 주무시면서 우시는 겁니까. .."
침대속에 감싸지듯 누워있는 누군가를 향해 알프레드가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새파란 입가에서 약간씩 새어나오는 호흡만 아니라면 죽은 시체라고 해도 믿을만큼 창백한 안색에 굳게 감겨있는 눈가에 스며드는 눈물의 의미를 물어봤자 깊게 잠들어있는 사람에게서 대답이 들려올리는 없었지만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한말이 아니었다. 흰색 베개언저리에 붉게 흐트러진 머리카락때문에 더 창백해보이는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이는 아르휜이었다.
마물들과의 혈전이 어느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지만 한숨돌릴만큼 안심할 상황이 아직 아닌 그 긴장된 상태에서 아르휜이 뜻밖의 일행들과 함께 크로멜성으로 돌아온게 며칠전이다. 예전일로 인해 레오포드가와는 불편한 관계인 에리카 라이에이드일행과 늘상 여유만만인 사람답지않게 침통한 얼굴로 들어선 프란시스 하워드의 등에 시체처럼 엎혀서... 그리고 꼬박 이틀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다가 언데드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왜 발작을 일으켰는지는 모르는 상태.. 크로멜성의 신관, 마법사, 의원들도 아르휜님이 아픈게 아니라 그저 잠들어있을 뿐이라고 하니... 답답할 뿐이었다. 게다가 마물들도 버거운 상태에서 언데드들이라... ..
헬라이드시가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된건 크로멜성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이미 확인된 사실. 그 시체들이 언데드가 돼서 일어났다는건 사악한 마법을 쓰는 누군가가 일부러 헬라이드에 마법을 걸었다는건데... 도대체 누가.................게다가 언데드로 일어선 시체들을 해치우고 사라졌다는 대단한 마법사로 보였다던 검푸른 머리카락의 남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알프레드는 익숙한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늘 단호하고 차가워보이던 펠릭스의 얼굴은 조금 지쳐보이고 피곤해보였다.
"..아직도 인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은 알프레드에게 상태를 묻는다기 보다는 그저 혼잣말처럼 들렸다. 그저 고개를 읍하고 있는 알프레드를 지나쳐 침대에 다가선 펠릭스의 시선이 창백한 아르휜의 눈가에 맺힌 습한 물기의 흔적에 머물렀다.
..............우는거냐. 아르휜. 꿈속에서도 눈물을 흘릴만큼.. 무엇이 그렇게 슬픈거지?
공간을 장식하는 아기자기한 장식품들이 없어 삭막해보이는 커다랗고 넓은 홀, 회색 대리석으로 이뤄진 바닥에서 층층히 계단으로 이루어진 그 끝부분에 있는 거대한 침대는 바닥까지 한참 흘러내리는 길고 붉은 시트로 덮여있었다.
침대에 팔베개를 하고 비스듬히 누운 검푸른 머리카락의 남자에 짓눌려 붉은 시트가 구겨진만큼 어딘가를 보는 아시리안의 표정역시 못마땅한듯 구겨져있었다.
아시리안이 바라보는 것은 회색공간을 기이하게 찢고 원형의 아지랑이속에서 비추이는 붉은 머리카락의 창백한 남자. 이미 몇번 본 인간들이 들락거리며 용태를 살피는 모습을 짜증스럽게 보다가 귀찮은 벌레들이 모두 사라지고 홀로 방안에 남아 침대속에 잠들어있는 자에게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물속을 통과하듯 아지렁이속에 침투할것 같던 아시리안의 손이 타공간에 파고들었다가 멈칫, 멈추었다.
-...........나........를...............나...를............주............죽............여........-
뻗었던 손을 콰직, 움켜쥐며 아시리안은 푸른 불꽃이 이글거리는 어두운 눈으로 신경쓰이는 귀찮은 놈을 노려보았다.
".....자고 있는 놈을 소멸시키는 취미는 없어. 정말 소멸되길 바란다면 일어나지 그래? 내가 너를 죽일까봐 무서워서 자는척 하는거냐. 아니면 혼날까봐 일부러 안깨는건가...."
......................................................젠장...귀찮은 놈..
"네놈이 얼마나 좋은 꿈을 꾸느라 안깨어나는지 구경이나 해볼까."
아시리안이 손을 뻗자 반지에 써진 글자가 빛을 뿜으며 검은안개가 스멀거리며 피어나오더니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의 몸을 서서히 덮어갔다. 그리고 검은 아지렁이가 일렁거리며 또다른 몽환의 공간을 비췄다. 그리고 짤막한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의 모습을 비춘다.
"이게...하은준.. 네 본래의 모습?.. 쳇.. 도무지 봐줄만한 데라곤 하나도 없군. 삐쩍 마른데다가 볼품없고 못생겼어."
악평을 서슴치않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만한 또래의 다른 사내녀석들이 웃고떠드는 틈바구니속에서 뭐가 그렇게 피곤한지 꿈속에서까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모습에 아시리안은 피식, 웃었다.
....졸려 죽겠는데..누군가가 어깨를 마구 흔들어댄다.
"은준아, 은준아, 야, 임마.. 그만 일어나, 담탱이가 너 열나게 째려본다고!!"
담임선생님이 노려본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책상에 쭈욱 엎드려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키자 담임선생님은 커녕 교실안은 휑하게 비어있다. 주인없이 비어있는 책상과 의자들만이 일정하게 채워져있는 교실을 멍하게 둘러보자 내책상앞줄의 의자에 앉아있는 승호와 책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아있는 정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 어,어떻게 된거야?"
"네!!! 아침부터 꾸벅꾸벅 졸아대던 하은준선수, 점심시간부터 내리 넉다운되더니 마구흔들기, 손등꼬집기등 온갖 방해공작에도 꿋꿋이 잠을 자는 근성을 보여 담탱의 박수까지 받았습니다!!"
우웃!! 이렇게 되면 좀 깨우지..라고 원망도 못한다. 쪼...쪽팔려. 종례시간까지 내리잔거야? 그러고보니 지금 몇시지?
"젠장, 아르바이트!!!"
아, 큰일났다!! 사장님이 한번만 더 늦으면 국물도 없다고 그랬는데...!!! 허둥지둥 일어나서 책가방에 책들을 마구 쑤셔넣자 승호가 머리위에서 쯔쯔쯔 거리며 혀를 찼다.
"얌마, 부자친구는 그냥 뒀다가 국끓여먹을래? 고생하지 말고 우리집으로 들어와, 우리 꼰대한데 허락도 이미 다 받았다고, 넌 몸만 들어오면 된다니까. 우리 꼰대영감이 아들인 나보다 너를 더 이뻐하는건 알지? 오죽하면 호적에서 날 파버리고 너를 채워넣고 싶다고할까. 자식아, 그만 튕기고 우리집으로 들어오라니까 그러네"
또..또 저런소리 한다. 승호가 맨날 농담처럼 하는말에 오늘은 정말로 대꾸해줄 시간도 없어서 정신없이 손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귓가에 정우까지 거드는 소리도 들려왔다.
"야, 데렐라군. 유리구두없어도 받아줄테니까 이만 나한테 시집오시지? 잘해준다니까"
저자식!! 또 저런 소리를!! 집에서 받는 구박을 어느정도 눈치챈뒤부터 정우는 내가 남자신데렐라라고 곧잘 놀려대곤 했다. 그래도 시집오라는건 심했어. 왕자도 아닌주제에.. 왕자라면 적어도 아시리안정도는 되어야.......어?... 아시리안이 누구지? ...
멈칫 멈춰서긴 했지만 이내 고개를 잘잘 흔들고 탁,탁,탁,탁 거리를 뛰어내달렸다. 신호등앞에 멈춰섰을때는 장거리 릴레이로 숨이 차서 헉,헉 숨을 몰아쉬며 시계를 바라보자 엑, 늦었다. 늦었어. 발을 동동 구르며 신호등을 바라보자 잠시후 빨간색이 초록색으로 바뀐다. 서둘러 걸음을 내딛던 나는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어?... 나.........어디를 가는거지?......여기서.........뭘 하고 있는거지...? 머리가 어지러워서 아픈 머리를 흔드는 사이 복잡하게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나 깜빡거리는 초록 신호등. 달리던 차들이 하나둘 꺼지는 램프처럼 사라지고 세상의 빛이 전부 허상인듯 어둠이 짙게 가라앉는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속에 홀로 서서 나는 어둠이 반쯤 먹어간탓에 투명하고 흐릿하게 보이는 내손을 내려다보았다..........어딜가고 있던것 같은데... 뭘..찾고 있던것 같은데... 생각이 안나네....
[........멍청한 놈..]
머릿속에서 심술궂게 굴려오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누구...........?
[.........입만 산 바보같으니..]
...........어딘가에서 들었던 소리같긴 한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뚝,뚝 흘러내리는 물기의 흔적을 쫒아 뺨에 손을 가져가자 흥건한 물기가 묻어났다. 이상하네.. 왜 눈물이 난다지?
어둠속에서 멍하게 멈춰서있는 내귓가에 빠앙-------------하고 커다란 소음이 들려오고 고개를 천천히 그쪽으로 꺽자 커다란 트럭이 바로 눈앞에서 달려오고 그대로 퍼억.... 하는 둔탁한 소음도 들린다. ..하아............하아..............하아...............숨을 쉬는게 힘들다. 깜박,깜박 눈을 깜박거리며 푸른하늘을 담아가던 눈꺼플이 무거워 감고있자 하아...........하아............거리는 숨소리만이 귓가를 울린다.
우으으으으으... 엄청 피곤해,피곤해,피곤해.. 축늘어진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고 주물주물도 해보고 새까만 어둠이 가라앉은 아파트단지안으로 들어선 나는 막 아파트계단을 오르기전 불이 꺼져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밤 12시가 조금 넘었으니까 다들.. 자고 있겠지? 막 들어서려는 순간 등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준이 이제 오는거냐?"
"아, 아저씨, 안녕하세요."
경비실문을 열고 나오며 아는척하는 경비아저씨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하자 경비아저씨가 아참,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아버지, 술마시고 들어간지 한시간도 채 안됐어. 잠시만 있다가 들어가, 경비실에서 좀 놀다 가든가"
멈칫, 계단을 올르던 걸음을 멈춘채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그냥 올라갈께요. 아저씨, 수고하세요"
경비아저씨에게 웃으며 대답해주고 계단을 올라가는 등뒤에서 아저씨가 혀차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쯔쯔.. 어린게 무슨 고생인지.."
힘차게 계단을 뛰어오르긴 했지만 아무도 없는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술에 취하셔서 아직 주무시고 계시지 않으면 나때문에 집이 또 뒤집힐테니까.. 시간 좀 떼우다가 들어가자..
어두운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피곤한 머리를 무릎위에 묻고있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어느새 아예 머리를 벽에 기댄채 잠들었다가 얼핏 다시 눈을 뜬 나는 화들짝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밤중에 시끄럽게 계단을 걸으면 이웃들에게 미안해지니까 조심조심 걸어서 현관문을 살짝 열자 닫혀있으면 어쩌지란 걱정이 무색하케 다행히 열려있다.
어둠속에서 조심히 신발을 벗어내고 살금살금 내방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주방쪽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멈칫 걸음을 멈춰섰다. 시계를 보니까 새벽 1시가 다되어가있는데...아버지가 술마시다가 잠드셨을지도 모른다 싶어 슬쩍 주방안으로 들어가자 역시 식탁위에 굴러다니는 몇 개의 술병들이 보이고 식탁위에 엎어진채 잠들어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깨워드려야하나 싶어서 다가갔지만 쉽게 손대지 못한채 망설이다가 식탁위의 술병이라도 치우려고 손을 뻗는데 그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아버지가 일어나는 기척에 나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섰다.
“으음...응? 넌 뭐야. 이새끼, 어디서 굴러다니다가 이제 들어와!!!!”
술마셔서 벌개진 얼굴과 벌건 눈이 나를 발견하고 금새 사나워지고 취해서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킨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다짜고짜 뺨을 거세게 쳤다. 변명할 새도 없이 여러차례 거친 손아귀에 뺨을 얻어맞자 찝찔한 핏물이 코에선지 입에선지 흘러나오고 손으로 구타하는것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거친 흥분을 참지 못한건지 슬리퍼를 신은 발로 쓰러진 내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이자식!! 이 쓰레기같은 자식!!! 구역질 나는 놈의 새끼!!!”
퍽, 퍽 , 와닿는 발길질에서 나를 보호하는건 비명도, 변명도 아니란걸 이미 알고있어서 그저 몸을 동그랗게 만채 팔로 얼굴을 가린채 얻어맞았다. 얼굴이 엉망이 된채 아침이 되면 나를 보는 가족들이 더 불편해하니까.. 그렇게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걱정하니까..
그러니까..쓰러져 엎드린채로 몸에 와닿는 매질을 견디며 내가 할수있는것은 얼굴을 가리고 속으로 필사적으로 중얼거리는 것밖에는 없다.
....죄송해요. 아버지..태어나서.. 이런식으로 태어나서 죄송해요......
아버지는 나를 한번도 따스하게 바라본적이 없었다. 어쩌다가 한번씩 눈을 마주칠때도 저절로 몸이 움찔 굳을만큼 차가운 시선으로 볼뿐.. 어머니는 어린아이였을때도 나를 다정하게 안아준적이 한번도 없었다. 가끔씩 바라보기는 하지만.. 이를 악물고, 때로는 참기 힘든것을 바라보듯이.. 보는것조차 고통인것처럼..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예전부터.. 아주 어렸을때부터 알고있었다. 부모님이 은호형에게 주는 다정함을 사랑을 그리워했지만 그것은 왠지 결코 내것이 될수 없다는것을..
두살위의 은호형은 부모님에게 미움받는 어린 동생이 가여웠던건지 혼자 얌전히 놀고 있으면 못살게 괴롭히고 내가 우는 얼굴을 하면 그제야 큰 인심쓴다는듯 달래주는 시늉을 해도 내가 다른 애들에게 맞고 오면 쪽팔리게 병신처럼 맞고다니지 좀 말라고 화를 내며 머리통을 쥐어박고 나를 때린 놈들을 대신 혼내주기도 했다.
그런 형이 어느날 맞아죽기직전까지 나를 주먹으로 치고 발로 밟았다. 정말 죽일것처럼 때려서 아픈것보다는 무서운게 컸던 ....그리고.. 왜..왜..왜라고 생각했던 의문에 대한 답은 얼마안가 나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맞아죽는것보다 더 무서운 진실을...
"볼때마다 끔찍하지도 않아? 언니나 형부나 대단해, 강도에게 강간당해 난 자식을 키우는 언니나 아내를 강간한 강도의 자식을 매일매일 바라보는 형부나 정말 독하다독하다 해도 어떻게 그렇게 지독할수가 있어.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이제 은호까지 알게 됐다며? 그럼, 은준이가 사실을 알게되는것도 시간문제야. 그럼 그애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애가 받는 상처 어떻게 하려고!!!아무리 강도자식이라도 그애도 사람이고 언니자식이야!!"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지 거실로 들릴만큼 엄마를 책망하는 이모의 큰 목소리가 안방에서 들려왔다.
"어린것이 주눅들어서 이리저리 눈치만 보고.. 가엽고 불쌍하지도 않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 키우면서 그놈의 자식새끼라고 복수하는거야? 자신없으면 처음부터 고아원에 버리던가 할것이지.. 키우기로 맘먹었으면 좀 따뜻하게 대해주던가, 이게 무슨 못할 짓이야!!"
아...............아......................................아...................................................그..래..서...
"그럴수..그럴수 있을줄 알았어, 내뱃속에서난 내자식이니까 사랑할수 있을줄 알았어, 하지만.. 마음만큼 쉽지 않더라.. 내얼굴은 전혀 닮지 않는 그애의 전부가 그 놈의 얼굴을 닮은것 같아서 볼때마다 목을 졸라버리고 싶어서 손이 떨렸어.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하게 웃고있는걸 보면!! 안아주지 않아도, 노려보고 있어도, 다 이해할수 있다는것처럼 어린게 독하게 울지도 않고 웃는걸 보면 그애가 악마의 자식같다는 생각이 들어. 강간범의 피를 이어받은 주제에 선량한 얼굴로 나를, 나를 비웃고 있는것 같아서 미칠것 같아. 우리앞에서는 얼굴한번 찡그리지도않고 웃는얼굴만 보이는 그애가 징그러울만큼 끔찍해.
애아버지가 가끔 술마시고 그애 때리는거 알지?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이면 아무렇지도 않은것처럼 웃고다녀, 그런애를 어떻게 이해해야해? 아무리 내배로 낳았어도 강간범의 자식인 주제에 그이를, 나를, 이제 은호까지 가혹한 가해자로 만드는 그애를 어떻게 해야하냐구!! 차라리 낙태시켜 버릴걸, 낳지 말것을 하루에도 수만번 후회해. 죽었으면 좋겠다고,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증오해. 내배로 낳았어도... 천사처럼 웃고 있어도......그애가...너무............너무.............원망스러워...........".
심장을 누군가가 뜯어지는것 같다.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것 같아.........
내가........나를 낳아준 엄마를 사랑하는게... 잘못인가요.. 내가.. 나를 키워준 아빠를 사랑하는게 죄가 되나요.. 태어나면서 죄를 잉태하고 있어서.. 행복할 자격도.. 사랑할 자격도 .. 사랑받을 자격도.. 내겐.. 없는건가요...................................................................................그런..내가 사라져서...조금.. 편해졌어요?
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나는 조용히 아파트를 나섰다.
......................내가 죽어서.........이제.......행복하세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정말..그랬으면 좋겠는데....................................어?........어어??
훌쩍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라라라, 맞다. 나 죽었지. 교통사고 나서.. 죽었는데..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멍청하고 한심한 꼴은 지겨울만큼 보여줬으니까 그만 일어나, 이 멍청아]
어라라? 아무도 없는데 들리는 목소리에 까만 어둠속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머릿속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네가 계속 거기 있겠다면 나도 귀찮게 기다리는건 그만두기로 하겠다. 발가벗겨 천천히 맛있게 먹어주지]
맛있게 먹는다고? 뭘?
[하지만 걱정마라, 남자몸은 아무리 강간해도 골치아픈 애는 안태어나니까]
컥.. 뭐...뭐야?!! 상처받은 어린 영혼에게 이렇게 무식하게 엄청 못된 말을 하다니!!!
[네놈이 하도 째째하게 구는 통에 귀여운 유두만 만져봤을뿐이라 아쉽기그지 없었는데 잘됐군]
으...........으악!!! 뭐..뭐야!!!! 나도 모르게 가슴부분을 방어하려고 양팔로 몸을 감싸자 그런꼴이 우습다는듯이 비꼬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다시 들렸다.
[그 꿈이나 실컷 꾸시지. 멍청이. 그동안 니몸을 듬뿍 귀여워해줄테니]
뭐..뭐라곳!!!!!!!! 온몸에 소름이 다다다닥 오르는걸 느끼며 나는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아시리안, 이 변태얏!!!!!!!!!!!!!!!!!"
눈을 반짝 뜨자 낡았지만 고풍스런 문양을 띈 천장이 보인다. 몇번 눈을 깜박거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내가누운 침대옆 의자에 앉아 침대에 머리를 푸욱 박고있는 꼴사나운 모양새로 자고있는 누군가가 보인다. ..불쌍해보이게 왜 이러고 잔담?.. 침대시트에 여기저기 흩어진 푸른 머리카락들을 향해 손을 뻗자 바스락거리는 작은 기척을 느낀듯 프란이 침대에 박았던 고개를 들고 멍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잘.. 잤어?"
아직 잠이 덜깬것같은 부스스한 얼굴이 좀 우스워서 웃고싶은걸 참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하품을 하며 프란이 기지개를 켰다.
"우하아아아아암.. 잘 잘리가 있냐. 니가 이러고 안깨어나는........어?.. 아..아르? 아르!!!"
멍하게 대답을 해주다가 내가 눈을 뜬걸 뒤늦게 알아챘는지 기지개를 키던 손을 내리고 프란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너.너.너어!!! 이자식!!! 이자식!!!!! 사람 있는대로 걱정시키고!!!!!!!!!!!!!!!"
화를 내는건지 안심하는건지 저렇게 소리소리 지르려고 침대옆을 지키고 있었던건지 .. 반응이 신선하긴 하지만 곧 프란이 침대에 누워있는 내쪽으로 상체를 숙여 나를 꽉 끌어안았다.
"..............걱..정...하게 해서...............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걱정해줘서.. 끌어안긴채 가만히 웃으며 나는 힘없는 손을 들어 프란의 등을 마주안았다. 그런데.. 프란, 혹시 아시리안이 어디있는지 알아?
내가 기절한것과 동시에 그 수많은 시체떼들을 날려버리며 아시리안역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기절한 나를 업고 에리카일행과 프란이 크로멜성에 도착한게 사흘전.. 사흘내내 아르휜이 잠을 자는사이 한번도 모습을 보인적 없다는 아시리안.. 그 아시리안의 정체에 대해 프란이 무진장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변태마족]이라고 쉽게 대답해줄수는 없는 문제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얼버무렸다.
그나저나.. 이상하네. 어디로 간거지? 꿈속에서까지 얄밉고 못된 소리만 골라해대던 아시리안역시 내꿈의 일부분이었을까.. 아직 내 손가락에 끼어있는 반지를 내려다보고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옆에 있을거라고 생각해서인지 없으니까 서운하다. 새끼손가락에 끼어있는 반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만지며 나는 망설이다가 머릿속으로 전음을 실어보았다.
[....아시리안.......아시리안........?]
....................................................................
[...바보변태.. 머리카락괴물!!]
................................................................으음.. 변태라고 하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이 조용하니까 들리지 않는건가.. 싶다. 같은 공간에 있어야 전음도 전달되는걸까. 나는 왜 안되지? 처음에 아시리안은 눈에 안보여도 막 해대던데..
[성격나쁘고.. 심술만 부리고.. 맨말 따지기만 하고.. 음흉한 바보... 마족주제에 엄청 쪼잔하고.. 잘난척만 하는 왕거만 덩어리..]
쳇... 아무리 흉을 보아도 머릿속이 잠잠한걸 보고 나는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들리지 않는게 맞나보다.. 만약 듣고있다면 자기 얘기 나쁘게 하는거 엄청 싫어하는 잘난척대마왕이 가만히 있을리 없으니까...
[...바보변태.. 머리카락괴물!!]
............................!!............
[성격나쁘고..심술만 부리고...]
..........................빠직..!!
[마족주제에 엄청 쪼잔하고..]
...................빠지직!!!!!!
[잘난척만 하는 왕거만덩어리]
........빠지지지직!!!!!!!!!!!!!!!!!!! 저게 진짜!!!
찌릿찌릿한 전류를 전신에서 뿜어대며 분노하는 아시리안의 이마엔 그가 참을만큼 참았음을 알려주듯 여러개의 힘줄이 이마에 투두둑 불거져나와있었다.
멍청한 짓만 해대길래 건져왔더니.!!!. 입만 산놈이 아직 호됫맛을 못봤군그래!!!
둥근 원형의 아지렁이가 비추이는 곳쪽으로 전류가 빠직빠직 흐르는 손을 뻗던 아시리안은 침대에 무릎을 세운채 앉아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녀석이 웅얼거리는 작은 목소리에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보고싶어.."
....................................뭐??!!!!!!!.......마치 잘못들은건가라고 생각하는 아시리안에게 다시 들려주듯 몸을 작게 웅크린 녀석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게 귀를 크게 열어두어서라기보다는 신경이 그쪽으로 온통 가있어서 보다 선명히 들려왔다.
".............보고싶어...............아시리안.."
........!!!!!!!!!!!!.............하............머.........멍청한..놈.......같으니... 한심한 바보주제에..
힘을 제어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라 전신에서 맘껏 분출시키던 분노의 기운이 바람처럼 사라지는걸 채 느끼지 못한채 아시리안은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보고싶다는 말에 두근..... 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번개를 맞은것처럼 직통하는 흥분..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껴안고 키스를 퍼붓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육체를 유린하고 싶다. 더할나위없는 쾌락을 가르쳐주고 쾌감으로 무너져 애원하는 소리를, 울부짖는 얼굴을 보고...싶다. .. 그러나....아시리안은 움직일수가 없었다.
...........중요한건 아나이스일뿐이다. 보고싶은것도 그리워하는것도 아나이스일뿐이다. ...그러나................................멍청한것 만큼이나 실제로 하는짓도 멍청한 짓만 제대로 골라한는 저 검은머리꼬마놈을 내버려둘수가 없다. .. 신경쓰이는 귀찮은 벌레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나이스를 닮은 그 얼굴속에서 실제로 보고있는건 누구인지 ....혼란스러웠다.
순수하고 순진한 그 혼이 속한 것은 분명 이세계..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 귀찮은 벌레따위에게 어느샌가 진심이 되어버린것을..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온몸이 파직파직한 전기가 솟아오를만큼 넘쳐흐르는 욕구, 갈증과도 같은 욕망에도 가만히 서있는 아시리안을 대신해서 뒤에서 넘실거리던 검푸른 머리카락들이 붉은 머리카락의 존재가 들어있는 아지랑이쪽으로 뻗어갔다. 만지고 싶어서 참을수가 없는데도 성역처럼 가로막고있는 공간의 장벽때문에 닿지 못하는게 화가 난듯 잔뜩 흥분한채 성을 내며 그 주변을 빠르게 맴돈다.
절실히 원하던것 대신.. 희미하게 고개를 들이민 불손한 그림자..
그토록 바라고, 원하는.. 절대적인 아나이스의 존재를 비집고 천천히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그 무엇...
-나를..............나를........주..............죽...........여...- 라는 말에 소원이라면 얼마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안고있는 팔을 거둘수 없을만큼, 아니 사라져버릴까봐 잃어버리게될까봐 오히려 꽉 끌어안아 품에 가두어버린 그 아이러니한 모순...
-사먹으려면 댓가를 지불해야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게 없어-................................마족을 옆에두고 그따위 한심한 말이나 내뱉는 멍청한 놈을...
-그거 참 불쌍하네. 아시리안. 맛있는걸 먹는게 얼마나 행복한데. 겨우 빵쪼가리 하나 씹으면서 무슨 행복이냐고? 배고픈 사람은 그래. 그러니 아시리안은 알수없을걸. 빵하나에 감사하는 마음은-
- 작은 곤충도, 아주 작은 벌레도 살아있기위해서 발버둥쳐. 무가치하고 약한 벌레는 살아있을 권리가 없는걸까. -
-그러지 않는게 좋겠어. 저렇게 말하는걸 좋아하는데 말까지 못하게 되면 너무 불쌍해지잖아-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아...가끔 심술을 부려도 친절하고 잘해주는걸 알고있어.. 말은 못되게 해도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있다는것도.. 알아-
............물러터진 바보놈따위를..............입만 산 멍청이따위에게......진심이 되어버린건가....
아나이스완 분명히 다른 존재라는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저절로 시선이 가는건 아나이스의 얼굴이기때문이라고 억지로 납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깨닫는게 좀 느렸을뿐.. 어쩌면 .. 정말 반했던것은 진작부터일지 모르겠다고 아시리안은 납득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이제야 인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