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오포드가의 귀공자-11화 (11/36)

11.

아시리안이 나타나자 나는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아마도 내가 안심하고 의지할 수있는 아시리안이 옆에 있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막다른 곳에 몰린 사람이라도 마음이 의지할 단하나의 뭔가가 있으면 그 조그만 것에 기대고 살아갈 힘을 찾기마련인 것처럼.. 캄캄한 암흑뿐인 어둠속에서도 작은 촛불만 있으면 주변의 사물들이 조금씩 조금씩 눈에 들어오듯이.. 나는 그렇게 아시리안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단지 의지하는것만이 아니라 다른 감정이 섞여있다는 것을 아시리안이 내옆에 없었던 단 며칠사이에 깨닫긴 했지만 아시리안의 곤란한 요구사항은 그 [천천히 알려주겠다는..응응] 인것만은 아니라서 나는 가끔 아시리안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왜 이런곳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는거지?"

뭐야. 떼를 쓰는건 내가 아니라고...

처음에 강제로 끌려갔던 그 회색의 거대한 건물이 있는 곳에 같이 가자고 회유하고 협방성 발언을 조미료로 곁들어 조르고 머리속이 뜨끈뜨끈하게 뎁혀지는 키스를 정신못차리게 퍼부어대며 나를 집요하게 꼬시고 있는건 어디까지나 아시리안인것이다.

"웃...!!...고...고집을 부리는게....아니고...자..잠깐.....!!"

이마에 콧등에 뺨에 새가 부리로 쪼는것처럼 부딪쳐오는 아시리안의 입술에서 도망치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손으로 이마를 아예 콱 눌러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채 내눈을 내려다본다. 푸른 불꽃이 이글거리는 시선에 침대에 눕혀진 몸은 더 깊숙히..깊숙히 가라앉을 것 같다.

"..안가겠다고 버티는 이유가 뭐지?"

짜증이 덕지덕지 묻는 눈빛과는 달리 나직한 목소리는 듣기좋게 부드럽다. ....하지만, 나야말로 궁금한걸? 아시리안.. .... 네가 왜 이러는지..

"덥썩덥썩 잘도 안기는 그 인간때문이냐, 아니면 네놈이 애절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인간때문인가? 아하, 새로 꼬인 벌레 한마리가 더 있었지"

처음의 덥썩덥썩은 프란을 얘기하는것 같고...애절한 시선이라는건.. 단어선택이 잘못된것 같긴 하지만 펠릭스형님을 만날때면 항상 슬프니까.. 펠리스형님을 말하는것 같고. 새로 꼬인 벌레는 또 누구?

"그 날벌레와는 감히 키스까지 하고.."

나를 죄인취급하는 눈빛에 나는 펄쩍 뛰었다.

"뭐..뭐야. 그런적 없어!!"

"호오, 황금벌레가 생각이 나지않는다고 이제 시치미까지 떼시겠다?"

황금벌레?..아.... 맞다, 아시리안을 만나기 바로 전에 만난 황금빛 눈동자의 이상한 남자!! 나는 아시리안이 말한 황금벌레라는 호칭을 우스워해야할지 아니면 어린아이처럼 소유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이 쪼잔함에 한숨을 쉬어야할지 모를 애매한 기분이 됐다. 키스라고? 바람이 스치듯 가볍게 닿기만 했을 뿐이잖아!! 그사람은 결코 아시리안처럼 이렇게 음흉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지 않았었다고!!

"...생각해보니 기분이 나빠졌다. 실컷.. 소독해주지"

소독해준다고? 뭘? 으엑!!! 입술을 한입에 잡아먹을것처럼 집어삼키고 벌려진 입안으로 단숨에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엄청 짜증난다는 얼굴로 내려온 아시리안의 입술로 그 소.독.이란걸 당하며 나는 아시리안이 한달음에 달려온게 엄청 열받아서는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했다. 친구인 프란이 아르휜의 몸을 반가워서 안는것도 엄청 기분나빠하는 아시리안으로서는 다른 남자와 가볍게 입을 맞춘다는것은 용서가 안되는.. 어쩌면 굉장히 열받는 일일수도.. 있을테.....읏..!!..우웃!!.....

정신이 다시 멍해질만큼 긴 시간동안 농밀하고 야한 키스를 하고도 떨어지기가 아쉬운듯이 이어진 은사를 핥아주고 나서야 아시리안이 고개를 들어 얼이 반쯤 나가있는 내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와 함께 가자. 아르"

그렇게 달콤한 표정으로 유혹하지마.. 아시리안.. 내가 정말 아르가 아니라는것은 아시리안이 제일 잘 알면서...

"하...아.........하..아................하..아............하..아........."

키스로 빼앗겨버려 부족한 숨을 불규칙적으로 몰아쉬는 내게 아시리안이 다시 속삭이는듯한 목소리로 채근해왔다.

"..같이 가자.. 아르"

하아.....하아....달뜬 숨을 몰아쉬며 나는 나를 내려다보는 아시리안의 푸른 불꽃이 일렁거리는 눈빛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르휜이 돌아오려면 이곳에 있어야 하잖아. 그래야 아시리안도 아르휜이 아나이스가 맞는지 확인할수 있고.. 그러니까 함께 있자는 말은 그때가서 해.."

아시리안의 얼굴에서 아이처럼 조르는 듯한 표정이 사라지고 묘한 시선이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무언가를 살피는것처럼 바라보다가 아시리안이 손으로 가볍게 내 뺨을 쓸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왔다.

"....너는... 지금도 죽고싶다고 생각하나?"

"이미 죽었으니까 죽는다는 표현은 좀 그렇고.. 아마 아르휜이 돌아오면 나는 사라지는 거겠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하은준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기분은 어떤것일까...... 아무것도 없이 無로 돌아가는 기분일까. .. 슬퍼하는것도 기뻐하는것도 ..지금처럼 이렇게 생각하는것도 불가능할지도....복잡한 마음을 감추려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침대에 눕혀진 나를 반쯤 덮고있던 아시리안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서, 결론은 사라지고 싶다?"

저렇게 쌀쌀맞게 말할건 뭐람.. 다정한 키스의 여운이 촉촉하게 남아있는 입술에서 차갑고 딱딱하게 내뱉어지는 어조가 신경쓰여 화난건가.싶어서 아시리안을 따라 나도 주섬주섬 침대속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아시리안의 검푸른 머리카락들은 워낙 길어서 앉아있는데도 흰 침대시트위에 푸른빛이 도는 검은 실이 매끄럽게 흩어져있는것 같다. 결좋은 머리카락들의 실체가 그 주인만큼이나 변태스런 괴물이란걸 알고있어도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부끄러운 욕구를 참고 눈을 감으며 무릎을 세워 양팔로 감싸안았다.

"......모르겠어. 하지만 .. 내가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건 싫어. 다른 사람의 대신으로 살아가는건 역시 이상해. 그리고 프란에게도, 펠릭스형님에게도, 그리고.. 아시리안에게도 내가 아닌 아르휜이 빨리 돌아오는 쪽이 좋잖아."

"......했으면서..."

옆에서 얼핏 뭐라고 중얼거리는 말에 응? 하고 고개를 들자 아시리안이 신경질적으로 버럭,소리를 질렀다.

"됐으니까 잠이나 자!!!"

으헷,까..깜짝이야. 내.내..내가 뭐라고 했다고 저렇게 화를 내는지, 정말 성격 이상하다니까.. ... ... 과도하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아시리안에게 놀라서 침대에 눕긴 했지만 옆에 있던 아시리안이 침대에서 나가려는듯 보이자 나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뭐냐, 그 멍청한 눈은?"

...저렇게 화를 내고 있으니 가지말라는 소리도 못하겠다.. 하지만..

".......갈거야?"

그래도 내가 잠든 사이에 다시 사라지면 작별인사도 못한채 다시 헤어지는거고 .. 그래서 조심스럽게 묻자 아시리안이 나를 한참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화가 좀 가라앉은건지 아니면 억지로 참고있는건지 ..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가지않는다."

혼자서라도 당장 가겠다는 소리를 들을지몰라 조마조마했던 참이라 입가에 번지는 기분좋은 웃음을 참을수가 없다.

"그러니까 잠이나 자. 멍청한 놈."

멍청하다고 욕얻어먹고도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냐고 그러면 할말이 없지만.. 낮게 투덜거리는 음성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럼.. 아침에 봐. 아시리안"

크로멜성에 남아있는 병사와 병기들, 마물들에게서 피해온 주민들의 상황을 살피고 오면서 펠릭스의 짜증은 극에 달해있었다. 오크들은 그나마 조금 굴러가는 머리로 군을 이뤄서 마을을 공격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시도해온다는건, 거기다 오크와 와이번이 손을 잡았다? 하, 말도 안되는 소리!! 근처에 아르휜의 일행을 공격했다던 사악한 마법으로 일어선 언데드들까지 더해졌다면 지금 크로멜성을 공격하는 마물들의 문제는 사소한 하나의 사건에 불과할만큼 더 커다란 위험이 닥쳐올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부상당한 병사들의 막사를 둘러보고 돌아오던 펠릭스는 연병장부근에서 얘기를 나누고있는 야나카황자와 에리카를 발견했다. 펠릭스의 시선을 느낀듯 야나카황자가 먼저 돌아보고 에리카가 뒤이어 펠릭스쪽으로 시선을 돌려왔다. 에리카 라이에이드, 이제 상관없는 여자가 노리는것 따위 관심없지만 눈을 마주친 지금처럼 뭔가 숨기고 있는듯한 에리카의 미소는 펠릭스의 날카로워진 심기를 더더욱 불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냉정한 표정이 그리 구겨진걸 보면 상황은 생각보다 더 안좋다는 뜻인가. 펠릭스"

속을 알수없는 야나카황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말을 건네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치켜올린 펠릭스의 차가운 시선이 야나카 황자의 황금빛 눈동자와 부딪쳤다.

강하고, 아름답고, 또 교활한 눈동자... 다른 황자들이 황위에 오르기 위해 귀족들을 포섭하는 동안 전쟁터로 온걸 보면 다른 황자들에 비해 그나마 머리를 굴릴줄 아는 자일수도.. 아니, 어쩌면 지나치게 머리가 영리한 자일수도 있다. 절대적인 위기상황을 자신이 유리한쪽으로 만드는 ..

황위에 누가 오를지에 대해선 아직 지지를 보내지않은채 중립을 지키고 있는 레오포드가 역시 언젠가는 결정을 내려야할 시기가 도래한다는것을 펠릭스는 알고있었다. 치열한 권력의 암투에서 언제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을수만은 없다는것을 레오포드공작..아버지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마물대 인간의 전투속에 감추어져 은밀하게 진행되는 또다른 전쟁이다..눈에 보이지않아서 더 치열한 암투다.

"그렇지 않아도 군사회의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하루에 한번 걸려 하품나오는 회의를 해야하다니, 레이디 에리카. 전쟁이란건 생각보다 더 따분하지 않소?"

에리카를 향해 즐거운듯 하하하하, 소리내서 웃는 야나카황자를 차가운 시선으로 보며 펠릭스는 그의 여유가 무모하고 단순한 배짱인지 아니면 젊어서의 치기인지를 가늠해보았다. 믿을만한 주군을 섬기는건 에오포니아의 검을 든 기사의 당연한 기쁨이겠지만 야나카황자는 아직 그만큼의 신뢰를 주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가진 가치는 스스로 증명해야할 문제다.

"아차, 그러고보니 어제 그대의 동생을 만났는데.. 아르휜이었던가?"

...아르휜을 만났다고? 눈치채지 못할만큼 미세하게 찌푸려진 펠릭스의 눈빛을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으나 야나카황자가 도발하듯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펠릭스, 그대의 동생은 무척 탐내고 싶어지는 보석이더군."

검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창밖을 향해 서있는 아시리안의 잘생긴 눈썹이 곤란한 문제에 직면했을때처럼 꾸깃하게 구겨졌다. 강제로 데리고 돌아갈수도 있다. 놈이 동의따윈 필요없어. 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럴수가 없다. 멍청한 꼬마놈의 꿈을 본 이상 그럴수가 없어졌다. 그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할지 몰라도 덥썩거리고 안기좋아하는 불쾌한 인간을 통해서.. 분통이 터질만큼 애절한 시선으로 보는 붉은 머리카락의 인간을 통해서 멍청한 녀석이 되돌아보는것은 극복하지 못한 슬픈 기억의 그림자...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은 아픈 기억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락하는건 거기까지다. 하찮은 벌레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인간따위는 모두 상대할 가치도 없는 먼지만큼이나 미미한 존재... 내버려두는것은 빼앗기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멍청한 녀석이 한심하게 우는걸 보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것을 빼앗으려하면, 내것에 위해를 가하면, 내것을 다치게 하면, 내것을 울게하면..................모조리 죽인다.

인간이 만들어논 세상따위 갈기갈기 찢어버릴테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방대한 힘을 숨겨놓은 분노가 아이러니하게 평화롭고 고요한 얼굴의 푸른 불꽃속에서 깊숙이 가라앉아 자글자글 타오른다. 바로 그순간 아시리안은 언제가부터 느끼고 있는 하찮은 벌레에 불과한 여자를 향해 경고하듯이 차디찬 시선을 내리깔았다.

야나카황자를 펠릭스가 체어간후 성의 건물로 들어가려던 에리카는 높은 창가쪽에서 검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존재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떳다. ...........아시리안!! 역시, 아르휜이 정신을 차리자 나타나셨군!!  마치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듯 까마득한 아래의 에리카에게 내려꽂히는 소름끼치는 무서운 시선에 꾸미고있는 계획을 들킬새라 흠칫 놀란 에리카가 서둘러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마...마족주제에!!! 마물들이나 부리는 사악한 마족주제에!!! 사내의 몸이나 만지는 마족주제에!!

하찮은 벌레를 보듯 무시하는 시선은 두려운 동시에 분하기 짝이 없는 거라서 에리카는 새초롬한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마족은 마족, 아무리 아름다워도 마족은 마족일뿐, 아르휜도 펠릭스도 용서할수 없지만 번번히 자존심을 짓밟은 저 마족도 결코 용서할수가 없다.

아르휜따위가 뭐그리 대단하다고!! 안본사이에 멍청해지고 상대하기에도 우스운 꼴이 된 그 아르휜따위가 뭐그리 대단하다고, 모드들 아르휜, 아르휜 한단말이지?

바람둥이로 소문났으나 에오포니아의 귀족아가씨중 누구도 혼담을 거절할리 없을만큼 매력적인 그 프란시스 하워드도 자신따위는 아랑곳없이 아르휜 따위의 뒤꽁무니만 쫒아다니며 절절매더니 차갑고 도도한 펠릭스는 자신이 설마 손톱으로 아르휜의 뺨이라도 할퀼까 눈에 불을키고 보호하려하고, 저 아름다운 마족은 처음부터 자신의 미모따위엔 눈하나 깜짝안하고 바보같고 멍청해진 아르휜따위만을 항상 바라보더니 이제는 야나카황자까지 아르휜따위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지 않은가!!!!

아르휜이 무척 탐내고 싶어지는 보석이라고? 레오포드가의 망나니인 그 아르휜이? 나를 모욕한 그 건방진 아르휜이?

용서할수 없어, 절대, 용서못해..!!

에리카는 핏물이 뚝뚝 베어나올것처럼 붉은 입술을 하얀이로 힘껏 짓깨물었다.

목표는 닫힌 문 손잡이의 직경 5cm위. 정신을 집중하기위해 눈을 감았다가 반짝 뜨고 잡고있던 단도를 그쪽으로 휘익 날리자 부르르 하는 떨림도 없을만큼 정확한 목표지점에 단검이 꽂힌게 보였다. 나는 놀란 눈으로 목표지점에 정확하게 꽂혀있는 단도를 그리고 그 단검을 던진 내손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보았다. .... 어떻게 된거지? 길게 잠을 자고 일어난 이후로 가벼워진 몸도 그렇고 예민해진 감각도 그렇고 ..

아시리안에게 황금벌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황금빛눈동자의 남자가 내게 접근했을때 나도 모르게 단검을 빠르게 빼어 겨눴던게 아무래도 이상하고 몸의 감각도 예전하고 틀려서 시범적으로 검을 던져본것이지만.. 이렇게 되면 더이상은 모른척 나몰라라 할수가 없어진다.

연필깍기밖에 안해본 내 영혼이 아르휜의 몸에 적응해가는거라기 보다는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기위해 아르휜의 몸이 감각을 되찾고 있는 것인걸까. 그럼.. 사라진 아르휜은? 돌아올 생각도 안하는 아르휜은 어디에 있는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어서 끙끙거리며 머리를 쥐어뜯기 일보직전 단검이 깊숙이 꽂힌채 닫혀있던 문이 슬그머니 열리고 프란이 떨떠름한 얼굴로 들어왔다.

"아르.. 너 나를 죽이려고 작정했냐?"

"...어?..."

"노크하려다가 사망신고낼뻔 했다, 이자식아!!"

...에... 아마도 프란이 문을 열기 바로 직전 내가 검을 던진 모양이다. 하지만 나도 단검이 그리 깊숙이 박힐줄을 몰랐다고... 아슬아슬하게 프란의 팔에 닿기직전 멈춰있는 단검에 미안해하기에 앞서 불현듯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한번만 더 아르라고 불러봐, 혀를 잘라주지. 프란시스 하워드-

-정말 너무하는군. 아르휜, 친구의 혀를 자르겠다고 협박이나 하다니-

-협박인지 아닌지는 두고보면 알테고, 그리고 누가 너따위와 친구라는 거냐!!-

...................이건....이건..........누구의..기억?

흐릿해진 시야에 뭔가가 일렁일렁거리고 어디에선가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안들려? 야임마, 아르!!"

희미한 목소리가 점차 선명해지고 어깨를 잘잘잘 흔드는 움직임에 멍했던 정신을 차리고 나는 나를 이상하다는듯이 보는 프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르?!! 왜그래. 또 몸이 안좋아졌냐?"

걱정스럽게 나를 살피는 조심스런 눈빛에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아무것도...아무것도 아니야.."

그 목소리들은.. 아르휜의 기억인가.. 그런데 왜 내게 들린거지? 그때 호숫가에서 -멍청하긴- 이라고 했던 목소리는.. 착각이 아니었던 걸까.

"제정신 차렸으면 밖에 가서 니 애인 좀 데리고 들어와"

....애인이라니? 접수가 안되서 눈만 깜박거리다가 켁, 처음에 프란이 아시리안을 보고 애인사궜냐고 한게 생각나서 나는 화들짝 놀라 더듬거렸다.

"무..무..무슨소리야. 애.애인이라니!! 아,아시리안과는 그런 사이 아니야.."

입술을 핥고 깨물고 혀까지 농락하던 그 야한 키스를 들킨것 같아 당황해서 버벅대자 프란이 수상하다는듯이 나를 지그시 보았다.

"그거야 그남자가 너를 보는 시선이 뭐랄까.. 좀.... 그런데 좀 이상한걸, 왜 그렇게 당황하지. 아르?"

또.. 조사하면 다나와. 이런 시선이다. 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화제를 돌렸다.

"네가 이상한 말을 하니까 그러지. 그런데 아시리안이 왜?"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였다. 같은 남자끼린데 애인이냐고 하는건 놀리는 거겠지? 하지만 같은 남자끼리인데도 진한 키스를 받는걸 이상하다고는 생각도 못하고있다가 애인이냐고 하는 소리를 듣자 굉장히 당황스럽다. 내가 아시리안을 좋아하는건 맞지만.. 아시리안이 녹일듯이 키스해주는것도 그리 싫지는 않지만.. ...애인, 인건 아닌것 같다. 무엇보다 아시리안역시 나를 통해 아나이스를 보고있을테니까..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프란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뛰어난 미모로 창쪽을 바라보고 서서 이 성안의 남자든 여자든 다 홀리고 있는 중이니까 사고나기 전에 얼른 데리고 들어와."

아아앗, 여..역시 지나치게 잘생긴 아시리안과 함께하기엔 문제가 많이 될지도.. 아시리안에게 로브의 후드자락이라도 덮고 있으라고 그럴까? 그러면 또 왜그래야하냐고 따지고 들면서 성질을 피울텐데.. 벌레 따위가 코피를 쏟으며 기절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막 이러면서...에휴..뻔하다.

문쪽에 꽂혀있는 단검을 쑥 잡아빼서 허리춤에 매고 문을 열자 내가 채 두리번거리며 아시리안을 찾아헤매기도 전에 복잡한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법한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란의 말처럼 복도에 난 커다란 창쪽에 반쯤 비껴선채 아시리안이 서있는건 맞지만............두두둥!! 프,프란.. 저 두사람이 왜 아시리안과 함께 있는거지? .. 내이마로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워낙 자존심강하고 오만해서라기 보다는 원래 타고나길 그렇게 생겨먹은것 같은 마족 아시리안의 표현을 빌자면 내가 애절하게 바라봐서 신경에 거슬른다는 펠릭스형님과 나와 뽀뽀를 해서 더더욱 신경에 거슬르게 되버린것같은 황금벌레, 아니 황금빛 눈동자의 남자가 아시리안과 대치상태로 서있는 중이었다.

성격나쁜 마족 아시리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한사람도 아니고 저렇게 세트메뉴로 함께 나타나다닛!! 이게 대체 뭔일이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다 못해 살벌하기까지한 그쪽으로 칼위를 걷는 무녀가 된 심정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아시리안!!"

내가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자 아시리안이 그로서는 지금 무진장 참고있다는 인상을 팍팍 풍길만큼 짜증이 덕지덕지 묻는 눈빛으로 힐긋 나를 돌아보았고 펠릭스형님과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도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오, 이자의 이름이 아시리안이었군. 이름이 뭔지 물었는데 대답을 안하고 노려만 보길래 아르휜, 자네의 친구가 말을 못하는건가 생각하고 있었지."

나는 에리카가 이름을 불렀을때처럼 과도하게 성질을 피울까 염려되어 아시리안을 슬금 올려다보았지만 꽤 기특하게도 아시리안은 표정에 변화도 없이 묵묵히 있을뿐이었다. 내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마라, 이 황금벌레.. 이러면 꽤 곤란해질게 뻔했는데..다행이다. 고마워. 아시리안..

아시리안의 썰렁한 분위기에 전혀 주눅들지도 기죽지도 않고 호기심을 거둘 생각도 없어보이는 황금빛눈동자의 남자가 펠릭스형님쪽을 슬쩍 보며 말했다.

"아르휜의 친구가 나로서는 무척 탐이 나지만 아무래도 그는 내가 찝적거리는게 싫은듯 하군"

아시리안에게...찌..찝적? 찝쩍거리다가 찜통위에 올려져 찐만두처럼 삶아질수도 있어요. 당신.....

어이없다는 빛을 숨기기가 힘들었는지 펠릭스형님의 차가운 시선이 나를, 그리고 아시리안을 훑어보다가 황금빛눈동자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자입니다. 야나카황자님. 그런 판단은 너무 성급한것 같군요."

황자? 그거.. 왕자라는거와 비슷한 말이게....흐엑, 저런 푼수떼기같은 말이나 내뱉는 사람이?

"물론, 훌룡한 인재를 알아보는것도 훌룡한 군주로서의 덕목이지. 그리고 신뢰받고 싶으면 먼저 상대를 신뢰해주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펠릭스?"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야나카황자라는 사람이 저 말을 하고 싶어서 푼수같이 찝.적거린다는 말을 했다는건 지금의 태도로 미루어 어렵지않게 짐작할수 있다. 지금 야나카황자의 황금빛 눈동자는 창밖의 태양보다도 더 반짝반짝 빛을 내며 진지한 표정을 짓고있으니까. 거기다가 아시리안을 보쌈하고 싶은 사람치곤 펠릭스형님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동자가 참 오묘하네..저사람..

헌데, 이보세요. 두분.. 큰일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던길이나 기시는게 좋으실텐데... 스멀거리는 불길한 내 예감을 확신으로 만들어주고 싶은지 머릿속에서 아시리안의 화가 엄청 난듯한 전음이 들려왔다.

[....이 귀찮은 버러지들을 눈앞에서 당장 치우지 않으면 너부터 가만 두지 않겠다]

왜,왜 불통이 죄없는 내게 튀는 거야아..

[내.내가 뭘 어쨌다고!!]

[그걸 몰라서 묻나!!!!!]

[뭐야. 모르니까...묻는..거잖..아..]

변명하듯 웅얼거리자 아시리안은 아주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나를 야렸다.

“그럼, 아르휜, 그리고 그쪽 친구도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금안의 야나카황자가 부드러운 미소로 아시리안과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넨후 우리들을 남겨두고 다른쪽으로 바삐 걸어가준게 나로서는 퍽 다행스러운 일..  펠릭스형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아시리안과 내쪽을 쳐다보지도 않은채 차가운 뒷모습만을 보이며 걸어간다. 야나카황자가 탐난다고 하던건 펠릭스형님을 자기 수하로 두고 싶다고 하는 말이었던 건가? 거의 비슷한 체형의 두남자가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야나카황자가 내게 이상한 짓을 해서? 아니면 아시리안이 계속 화를 내고 있어서? ...아,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는건 그래서가 아닌것 같다..

걱정해주는건가 싶었던 펠릭스형님이 다시 냉막한 눈빛으로 아르휜을 보기 때문이다. 조금쯤 화해할수 있지 않을까.. 형제로서의 정을 기대해도 좋지않을까 싶던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게 안타까워서다. 이렇게 되면 고생고생해서 여기까지 온 보람도 없는것 같아서...다시 처음으로 돌아간것같아서 가슴이 아파서다.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펠릭스형님이 앞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만큼 내눈앞에서 작아지는 모습을, 아니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게 심장이 찢어지는것처럼 아파오고... 갑자기 머릿속에서 이상한 말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한번만...한번만 돌아봐줘... 다른건 바라지 않아. 다른건...........욕심내지.........않아...-

무슨..?..이거...무슨 소리........머리가 울리는지 심장이 울리는지 몸속이 저릿저릿 울려와서 다리를 휘청거리자 잠시 의식에서 지워져있던 아시리안이 얼른 팔을 잡아줘서 내가 바닥에 쓰러질뻔한걸 저지했다.

"...아르?"

이상하다는듯이 나를 보는 아시리안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잠시 멈추고 있었을지 모를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건.....이 감정은.....도대체....뭐지?  나는 천천히 펠릭스형님이 걸어간 쪽으로 고개를 꺽었다. 펠릭스형님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단지 창밖에서 비추인 햇빛 때문에 길어진 그의 그림자가 복도에 달라붙어 있을뿐. 그리고 잠시후 그림자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지금은 평소처럼 얌전히 뛰고 있을뿐인 심장에 가만히 손을 대어보았다.

...이상하네.. 그거.. 뭐였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