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침대안에 누워서 잠이 들어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햐안 존재와 아시리안의 주변에서 평소보다 거 길어진 검푸른 머리카락들이 그 주변을 빙글빙글 에워쌌다. 인간의 나이로 치면 갓 20을 넘었을법하게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의 얼굴에서 비쩍마른 검은머리 꼬마의 모습을 어렵지않게 연상한 아시리안은 아직 눈물기가 남아있는 눈가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내렸다.
[부탁해.. 펠릭스형을 도와줘...]
함께 가는걸 거부하는게 그 하찮은 붉은 머리카락의 놈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보고싶다고 노래를 불러대 귀찮게 한 주제에 감히 자신을 옆에 두고 그 벌레놈따위나 애절하게 바라보는걸 용서할수가 없었다.
기어오르는것 같아서 혼내주려 했더니..
-나는...좋아하는데...-
-아시리안은 아무나가 아니잖아....-
-진짜 나를 알고 있는건 아시리안 뿐인걸-
“....멍청한 바보주제에....”
투덜거리면서도 아시리안의 얼굴엔 미소가 남아있었다.
영원을 살아가는 마족에게 인간의 삶은 순간적인 찰나일뿐. 그러니 이것은 그저 조금 기분좋은 한순간의 꿈에 불과할지 모르지.. 하지만.. 오랫동안 홀로있어 알지못하던 외로움을 너로 인해 알게 되었다. 아련하게 추억으로만 남겨져 있어 기억조차 희미해진 감정들이 너로 인해 생생하게 살아서 숨쉬고 있지.
아르..너는.. 알지 못할것이다. ..너에게 진심이 되어버렸다는것을 인정하는것이... 소멸된 아나이스를 추억하며 기나긴 세월동안 홀로 살아온 내가.. 너에게 가까이 다가서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 ..... 마족인 이 내가 하찮은 인간인 너를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참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하는것을 말이다.
무의미한 영원의 세월과 너를 가지는 한순간, 둘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망설임없이 너에게 손을 내밀수 있을만큼 너는 내게 놓칠수 없는 아름다운 꿈....다시는 되돌아갈수 없다고 여겼던..... 고통스런 기억의 그림자속에서 잊고 있던.. 아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황홀한 꿈..
아시리안은 아나이스를 닮은 얼굴을 바라보며 아나이스를 추억하는대신 검은머리의 꼬마놈을 떠올리며 그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살짝 부딪치고 창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부터 느꼈던 불쾌한 존재는 이제 가까이에 다가와있었다.
이만큼 와줬으니 이제 이쪽에서 배울나갈 차례이겠지? 다정한 웃음대신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아시리안의 모습이 아르휜이 누워있는 침대안에서 팟, 하고 사라졌다.
공간이동해간 곳에서 먼저 와있던 낯에 익은 누군가의 모습에 아시리안은 차게 웃었다.
"그 흉한 꼴은 여전하군. 나엘. 그러고 보니 지난번엔 썩은 시체들로 장난을 벌인것도 너였나?"
흉한 꼴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나엘이라고 지칭된 녹색머리카락의 남자는 몸전체를 두르고있는 초록의 띠와 초록눈빛때문에 신비로운 녹색식물처럼도 보일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흉가에서 언데드들을 일으켰던 나엘은 아시리안의 말에 불쾌한 빛을 보이지 않고 검푸른 머리카락을 넘실넘실 거리며 힘을 서서히 개방하는 아시리안을 바라보았다.
"저는 당신과 싸우려온것이 아닙니다."
"그나마 주제를 아는게 다행이군.네놈이 나를 이기려면 천년은 빠르지"
"어째서 인간의 편을 드는 겁니까. 인간은 배신을 일삼는 종족, 겨우 하찮은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하나때문에........큭!!!!!"
아시리안이 나엘쪽으로 손을 뻗자 목에 뭔가가 휘감기는 격통을 느끼는듯 나엘이 기괴하게 목을 비틀었다.
"크으윽!!!!!!!"
"주제넘게 왠 참견?."
"가..같은 마족으로서...아..아시지 않습니까. 인간과 마족은 절대로 영혼의 교감을 할 수가..없..."
"닥쳐라!!! 더 건방지게 굴면 네 흉측한 몸뚱이를 반쪽으로 갈라 네주인에게 보내버릴테니.."
"크,크...............큭........아..시.......리..........!!!!"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기형으로 머리가 꺽인 나엘을 집어던지듯 허공속에 내던진 아시리안은 흥, 하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모습을 감췄다. 아시리안이 사라진 지 얼마지나지 않아 쓰러져있던 나엘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기형으로 꺽였던 머리가 우드드득,, 거리며 천천히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재생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엘은 서글픈 시선으로 아시리안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하찮은 인간따위에게 당신의 영원을 맡기려 하십니까. 그자는 배신을 일삼는 하찮은 인간들중의 하나.....마족을 사악하다고 배척하고 신의 후손이라 자만하는.. 추한 이기심을 가진 인간에 불과한 것을...
유난히 붉었던 태양은 한쪽으로 기울은지 오래.. 이제 쓸쓸하게까지 느껴지는 싸늘한 어둠이 고즈넉히 크로멜성을 감싸고있었다.
"프리스트 가네샤. 수고가 많으십니다."
와이번들에게 당한 부상병들을 치료하느라 힘든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가네샤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이는 누군가를 가네샤는 조금 불편한 시선으로 건너보았다. 약한 부상이니 힐링포션도, 신관의 치료도 다른 위급한 병사들을 위해 양보하는 그의 단호한 고지식함을 단면적으로 드러내듯이 펠릭스의 어깨엔 아직 붕대가 감겨있다. 가네샤는 에리카 라이에이드양이 했던 말을 펠릭스에게도 알려야 좋을지 선뜻 판단을 내릴수가 없었다.
만약에 만약이라도 아르휜 폰 레오포드와 함께 있는 자가 정말 사악한 마족이 분명하다면 레오포드가가 무사할리가 없는데.. 아무리 만약의 경우라고는 해도 그건 용맹한 펠릭스에게 너무한 일이 아닌가.. 역시, 말하는게 좋겠어. 라고 힘들게 입을 떼려던 가네샤보다 먼저 지쳐보이는 얼굴의 펠릭스가 입을 열었다.
"에리카 라이에이드양이 신관님들을 만난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좋겠습니까. 아무래도 그 험난한 길을 오셨는데 저에게는 예전일때문에 불편한 감정을 가지시고 계시니.. 저에게는 말하지 못한 혹시 아픈 곳이라도 있으신지 걱정이 됩니다."
여성에게는 신경쓰지 않는 차가운 남자인줄 알았더니.. 의외인 곳에서 세심하구나.. 소문으로는 라이에드가와 혼담이 완전히 깨졌다고 하더니.. 펠릭스님의 마음엔 아직 에리카양이 있는 모양이야. 쯔쯔..에리카님도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주시는 분과 먼저 상의를 해주셨으면 좋으련만... 타인에게 신뢰감을 줄만큼 정직하고 강직한 얼굴을 하고있는 펠릭스를 보며 가네샤는 어렵지않게 결정을 내렸다.
무엇보다 가까운 친동생의 일이지 않은가. 펠릭스님이 그에 대해 모르신다는건 말이 되지 않는일.
"그렇지 않아도 .. 아르휜님과 관련된 일이라.. 상의드릴 말씀이었습니다. 펠릭스님. 하지만 여기서는 좀 곤란하군요.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드리지요"
그리고 신관인 가네샤에게 듣게된 얘기는 펠릭스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한참뒤 프리스트 가네샤의 방에서 나오며 펠릭스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설마..그자가....그자가....마족이라니.. 아르휜이, 아르휜이 마족을 끌고 왔단 말인가!!! 마족을!!!!!! 마족이라...마족.마족..마족!!!!!!!!!!!!!! 마족따위가!!!!!!!!!
평소 지나치리만큼 냉정한 그의 모습을 알고있는 다른사람이 보면 깜짝 놀랄정도로 화를 참지못하고 흥분한 얼굴의 펠릭스는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꽉 쥔 주먹으로 옆의 복도를 쾅, 쳤다. 속에 쌓여있는 응어리진 뭔가를 풀어내려는 움직임었지만 깨진 주먹에서 피가 점점히 고여도 분노한 표정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에리카의 여우같은 계책에 하마터면 아르휜,자신..그리고 더 나아가 레오포드공작가의 입지까지 흔들릴 수도 있었다. 싶으니 에리카를 더 경계하지 않았던것에 대해 화가 치솟았다.
레이디에리카, 이 빚은 잊지 않지. 하지만 이 펠릭스 폰 레오포드가 그리 쉽게 당할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에리카가 나서기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한다는 것 정도는 이미 판단이 서있었다. 레오포드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니.. 아르휜을 그 마족에게서 지키기위해서, 마족과 계약을 한 자라는 오명을 벗기기위해서.. 기꺼이 악역쯤은 감당하리라. 기꺼이.
펠릭스는 야나카황자가 있을곳을 가늠해보며 그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걸었다.
한가지는 확실했다. 이제 레오포드가에게 선택할 기회는 사라졌다는것. 무조건 야나카황자를 돕는 수밖에는 없다는것이다. ... 지금 자신에게는 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
일어나 있기는 진작에 일어나 있었지만 얼굴이 따끔따끔할정도로 내려다보는 시선에 눈을 뜰수가 없다. 왜 눈을 뜰수가 없냐고? 그..그야.. 좀 창피하니까... ... 꾸물거리며 일어나지 않는 머리맡에서 나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민망한 시선의 주인공 아시리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부끄러워한다는건 알겠는데, 그만 일어나지?"
...켁!!! 자는척 하는걸 드..들켰나..? 얼굴을 따끈따끈하게 덥히는 시선이 사라진것 같아 슬금 한쪽눈을 뜨자 ...으헥!!! 검푸른 눈빛과 직통으로 마주쳤다. 깜짝 놀라서 얼른 다시 눈을 감자 아시리안이 웃음을 참는것 같은 목소리로 음흉스럽게 말했다.
"계속 일어나지 않겠다면 덮쳐달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주지"
덮쳐? 뭘????........아..............................아아아앗!!!!!!!!
"이,이..일어났어!!!"
상체를 벌떡 일으키는 나를 아시리안이 한심하다는듯이 쳐다보고 있는것은 알지만 시선 줄데가 없어 고개가 아래로 꺽여내려간다. 끈질기게 달라붙던 입술.. 집요하고 야하게 만지던 손...........아.............................차..창피하다.........
".. 금붕이처럼 눈이 부었군."
으휴, 정말 세심한 데라곤 하나도 없는 변태마족이다. 내눈이 이렇게 부어버린게 누구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뻔뻔한 에로대마왕!! 슬쩍 눈을 흘기자 웃기게 생겼다며 참 못되게도 웃어댄다... 좋아한다는거.. 취소야, 취소!!! 성격이 어쩜 저리 못됬담.. 하지만 그 못된 장난쳐놓고 아이처럼 웃어대는 모습에 심장이 살살 간지럽게 떨려왔다. 머리를 그대로 끌어당겨 아시리안이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서늘한 푸른빛이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퍼지는것을 느끼며 어? 하는 사이 아시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엄청 울어대더군. 하지만 싫지 않았지?"
"읔!!! 이 바보!!! 이 변태!!!"
얼굴이 빨개져서 빽 소리를 지르고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내허리를 순식간에 휘어잡아 아시리안이 뒤에서 안아왔다.
“뭐..뭐야, 놔줘!!”
벗어나려고 허둥지둥 버둥거리자 가만히 있으라고 되려 신경질을 부리고 약각의 실랑이 끝에 결국 얌전히 안겼다. 등이 바짝 밀착된 포즈에 신비한 다크블루의 긴 머리카락이 내 앞쪽을 가리듯이 넘겨와 있고 아시리안의 양팔로 휘어감겨 안겨진 위쪽으로 이제 누구의 것인지 알수가 없어진 심장이 두근,두근,두근,두근 걷잡을수 없이 팔딱거리며 뛰어댄다.
"..........아르.........."
"....왜....왜...?"
"....다시 듣고 싶으니까 말해봐"
아예 눈까지 딱 감은 얼굴을 목덜미부근에 얹고 칭얼대는 아이처럼 조르는 말에 웃고싶어지는 기분과.. 가슴에 퍼지는 따뜻하고 따스한 살랑거리는 바람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어젯밤에 교육받은 대로 왈왈 거려주었다.
".....좋아해.. 나,.. 아시리안이..좋아.........."
지금까지 아르휜의 몸에 들어온게 쓸쓸하고 외롭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만큼.. 죽기전에, 아니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전에 .. 아시리안을 알게되서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몇번이나 생각할만큼... ..............아직 살아있다는게 고마워질만큼.... ..행복해.. ..정말...행복해...아시리안..
등뒤에서 양팔까지 한아름 안고있는걸로도 모자라 언제 다시 길어졌는지 길게 늘어나 건너온 검푸른 머리카락들이 넘실넘실 춤을 추며 소중한듯이 나를 부드럽게 휘어감는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고 아시리안에게 등을 편안하게 기댔다.
바깥쪽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밝은 햇살이 침대에서 아침부터 아시리안에게 껴안겨있는 나를 비추었지만 ..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언제 사라질지 모를 위태로운 나자신도.. 언젠간 깨져버릴지도 모를 꿈같은 이 이순간도... 모두 잊고 지금은 이대로 있기로 했다.
누구도 나를 이렇게 소중하게 대해준적이 없었어.......사라져버리는거 두렵지만.. 너를 잃게 될까봐 더 무서워........가만히 안겨있어도.. 눈물이 날만큼............울고 싶을만큼... 아시리안..네가.......좋아...
아깝고.......안타깝고... 아쉽기그지없는..애절한 마음... .. 아시리안......소중한....나의.......아시리안...........
“그런데..아시리안, 궁금한게 있어..”
아시리안에게 안겨있는채 검푸른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묻자 나를 품에 안은채 아시리안이 대답했다.
“뭐지?”
“그때 처음 만났을때.. 왜 거기 서있었던 거야? 왜있지.. 마족도.. 그런데를 가는건가 싶어서...”
늘 궁금했었다. 아시리안은 왜 그 19세미만 골목인것 같은 거리에 서서 그 가게를 쳐다보고 있었던걸까..라고. .. 물론 아시리안도 프란처럼 여자들과 이런저런 일들을 할수도 있겠지만 ..웬지 그건 어울리지가 않아서.. 아니, 그 공간과 아시리안이라는 존재자체가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서.. 내내 궁금했었다.
“그곳이 예전에 내 모체였던 인간여자가 기거하던 곳이었으니까”
“모체라면.. 어머니? 아시리안의 어머니가 인간이야?”
너무 놀라서 아시리안의 품에서 일어서려하자 성급한 내몸을 다시 감싸안으며 아시리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멍청아, 말을 끝까지 들어.”
“어?..아..알았어.”
“마족은 인간과 달리 마력으로 이루어진 생명체다, 단지 인간여자의 몸을 빌어 태어날 뿐이야. 마족은 허약한 인간들처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무리지어 살지 않는다. 태어나기 전부터 사고할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홀로 사는거지.”
그렇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게 그거 아닌가도 싶었다. 그러니까 그 사창가에 아시리안을 낳아준 어머니가 예전에 살았다는 거잖아..
“그럼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셔?”
내질문에 아시리안이 기가막히다는듯 콧웃음을 친다.
“멍청한 질문만 해대는군. 너는 내가 지금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인간의 수명이 삼백년을 넘길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그렇구나.. 삼백년...가만 삼백년이면...아시리안의 나이도 삼..삼백? 이 순 사기꾼, 호호 할아버지주제에 그얼굴은 뭐냐고, 그얼굴은!! 이라고 새삼 분개했지만 인간의 나이와 마족인 아시리안의 나이가 동일한 개념으로 적용될수 없다는 것쯤 나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인간여자따위 어머니가 아니라고 했으면서 아시리안은 왜 삼백년이나 지난 후에도 그곳에 서있었던 걸까.. 아나이스가 소멸된후 아시리안이 홀로 보낸 시간은 얼마나 길었던걸까..... 그것만큼은 감히 물어볼수가 없다. 혹 대답을 해준다해도 그것은 유한한 인생을 살아온 내가 결코 이해할수 없는 것일테니까..
그때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앗, 하고 화들짝 놀라 부산하게 떨어진 내가 아시리안의 멍청하다는 구박에도 꿋꿋이 옷매무새를 다듬는 사이 다시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네!! 네, 가요!!"
서둘러 문쪽으로 다가가서 문을 연 나는 깜짝 놀랐다. 그때 크로멜성에서 처음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보러 온뒤 단한번도 내방에 찾아온 적 없던 펠릭스형님이었다. 아프고, 시린 가슴이 쿵쾅거리는걸 느끼며 왜 온것일까를 생각하는 사이 차가운 얼굴로 바닥을 보고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올려 붉은 눈빛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니, 잠깐이긴 했지만 힐긋거리는 시선은 방안의 아시리안쪽을 잠깐 보는것 같기도 했으나 곧 용건은 내게라는듯 내쪽으로 다시 시선이 왔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아르휜"
차가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어떤 예감에 흠칫 등을 떨고 아시리안이 있는 방안을 나도 모르게 보려하자 내가 시선을 돌리는걸 용서할수 없다는듯 펠릭스형님이 단호하게 다시 말했다.
"내방으로 가지. 형제끼리의 얘기니 제삼자는 끼지 않는게 좋겠지? 그건 네가 너의 친구에게 잘 말해줄거라고 본다."
항상 차갑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불길한 예감으로 불안이 뭉실뭉실 타고 올라오진 않았었다. 아시리안을 돌아보고 싶지만 강하게 나를 쏘아보고있는 붉은 시선에 사로잡혀 감히 고개를 돌릴수조차 없었다.
[아시리안.. 잠깐 펠릭스형님하고 얘기좀 하고 올께]
[흥, 붉은 벌레가 오니 당장에 그쪽으로 가시겠다? 허둥지둥 떨어지는 꼴이 가관이더군.]
[으이그..바보, 그 벌레 소리좀 하지마. 내가 너를 변태벌레라고 부르면 좋아?]
[뭐야!!!조금 잘해주니까 금방 기어오르는거냐!!!]
짜증섞인 말투로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귀가, 아니지.. 머릿속이 다 멍멍해졌다.
[아우..시,시끄러워...암튼 다녀올께]
[맘대로해!!!]
맘대로 하라면서.. 툴툴거리는것같기도 한 목소리는 내가 애절한 시선으로 본다는 펠릭스형님과 단둘이 있겠다는게 꽤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지 신경질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어린아이가 자기것에 대해 독점하고 싶어하는 것같은 행동, 말들을 그전에는 아르휜의 몸에 대한 소유권쯤으로 생각했지만 저런 말들이 나에 대한 거라고 생각하니까 왠지...........기쁘다. .. 내가 언제부터 이런녀석이 되었다지?.. 아시리안이 심술부리는걸 보고 기쁘다고 생각하다니.. 뭔가 좀 이상하다..
그러나..솔직하지 못하고 비비꼬여있으면서도 굉장히 직선적이고 소유욕도 심하지만 강제가 아니라 속으로는 나를 배려하면서 하는 말들이란거 이제 알아서.. 나는 아시리안이 심술궂게 하는 말에 긴장으로 잔뜩 굳어있던 불안하기만 한 마음이 조금 풀리는걸 느꼈다.
[금방...다녀올께........]
펠릭스형님은 아르휜을 싫어하기만 하는건 아니어도.. 불편하게 생각하니까 얘기가 그렇게 길어지진 않을거야. 무슨 얘기를 들을까. 지난번에 얘기했던것처럼 전쟁에 방해만 되니까 먼저 레오포드가로 돌아가라고 할수도 있고...기억상실에 대한걸 물어볼수도 있고.. 어쩌면 아시리안에 대해 물어볼지도 모르는데 뭐라고 대답하지...? 레오포드가로 돌아가라고 하면 아시리안과 함께 가야되나..?.......아니면............
나.... 아시리안이 함께 가자는 곳으로 갈까? ...아니...그건..안돼.. 대답은 분명하게 나왔다. 아르휜의 몸을 차지한것도 모자라 아르휜을 가족들에게서 친구들에게서 떼어낼수는 없는 일이다. 그럴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내가 그러고 싶어도.. 이세상엔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는거니까..
아시리안과 헤어지는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있는 나로서는 어느쪽으로 생각하든 마음이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레오포드가에 아시리안을 데리고가는건 아시리안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강요하는것 같아서 미안하고 아시리안이 함께 가자는 곳으로 가는건 아르휜의 가족들에게 미안한 일이니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하은준으로 살아있고 가족들을 놔두고 아시리안이 함께 가자고 나를 꼬셨다면.. 나는 뒤를 돌아보지않고 아시리안에게 갈수 있을까?.. ..아시리안과 함께 있기를 마음이 아무리 절실해도 그럴수 없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아시리안을 좋아하는 것처럼 가족들역시 사랑하니까. 아시리안을 좋아하는 하은준이 나인것처럼 가족들을 사랑하는 하은준역시 나이니까. ..
마찬가지로 친구인 프란을 좋아하는 나도.. 형님인 펠릭스를 좋아하는 나도.. 동생인 유테르를 좋아하는 나도.. 지금 아르휜으로서의 내모습, 아시리안을 좋아하기때문에 그들에게서 떠나간다는건 그만큼 나스스로의 모습을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 아마 아르휜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들을 하는 사이에 펠릭스형님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형님의 방은 아닌듯 꽤 넓게 트인 서재였다. 내방에 가자, 라고 했던 걸 떠올렸지만 나로선 펠릭스형님의 뒤를 따들 수 밖에 없었다. 안에 들어선 내게 펠릭스형님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아르휜.. 지금까지 너는 레오포드가를, 아니 아버지와 나를 어떻게 하면 더 괴롭힐수 있을까 .. 연구하는것 같은 망나니같은 놈이었다. 아버지는 너를 포기했고 나역시 이번이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너를 이번 전쟁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지금 역시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
...기회? 무슨 기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의아해서 시선을 들자 차가운 시선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너와 함께 있던 자에 대해서 내게 사실대로 말해주길 바란다. 아르휜, 네가 내동생이라면.. 아니 레오포드가의 핏줄이 흐르는 혈육이라면 더이상... 더이상 나를, 아버지를 배신하지는 마라"
...배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도대체 무슨 소리를.....두려움으로 흠칫, 굳는 나를 붉은 눈빛으로 옭아매듯 노려보며 펠릭스형님이 이어 말했다.
"아시리안, 그자는 마족이냐"
..............쿵.......................쿠웅........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어..어떻게....... 하지만 이상했다. 아시리안이 마족이란게.. 그게 저런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다그칠만큼의 일이었던 걸까. 아시리안은 마족이란걸 들키면 인간들이 시끄럽게 덤벼든다고 했었지만.. 아시리안은... 아시리안은........다른 마족과 달......아니.. 같을지 몰라도 사람들을 도와줬어..도와줬다고........
"대답해라. 아르휜!!"
엄하게 추궁당하자 심장이 두근,두근 거세게 박동하는걸 느끼며 동요해서 흔들리는 시선을 떨구었다.
“아..아시리안은 마족이 아니...”
시선을 피하고 더듬거리는 내말을 끊고 펠릭스형님이 소리쳤다.
“사실대로 말해라!!”
두근...이미 알고있어.. 알고있어.... 아시리안이 인간과 마족은 사이가 않좋다고 하긴 했지만 아시리안은 언데드도 물리쳐줬고.. 와이번도 물리쳐줬고.. 어쩌면 사실대로 말해도 될지도..몰라..
“아르휜!!!!”
아무 대답도 못하는 나를 재촉하는 커다란 목소리에 저절로 움츠러드는걸 느끼며 나는 작게 대답했다.
"...예........아시리안은 마족..입니다.....하지만..."
하지만 아시리안은 사람들을 도와줬다고 말하려고 고개를 들어올린 시야에 검을 빼어드는 펠릭스형님의 모습이 보였다.
"..........??!!!"
"사악한 마족에게 정신을 조종당하는 너같은 놈을 동생으로 둔적 없다. 더이상 레오포드가의 명예를 더럽히며 수치스런 목숨을 연명하지 말고 죽어라. 아르휜!!"